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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싫으면 시집가
권혁웅(시인) 2015-03-13

[ 시르면 시집까ː ]

겉뜻 속뜻의 반대 속뜻 겉뜻의 반대

주석 이 표제의 뜻을 이상하게 풀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말이 매우 광범위한 문맥에서 쓰이기 때문이다. 동음이의어나 유음이의어를 타고 출현한 말놀이는 무척 많다. “일러라 일러라 일본 놈.” “짜증나면 짜장면, 우울하면 울면.”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보이나?” “너무해. 나는 배추할게.” “사랑해 너만을, 나는 양파를.” “네가 정말 원한다면… 나는 네모할게.”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삽 좀 줘.” “닥쳐. 닭을 왜 쳐?” 적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VIP카드처럼.

말놀이는 중독성이 강하지만,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기 때문에 재활용할 때는 그만큼 썰렁 유머가 되기도 쉽다. 이중에서도 생명력이 강하기로는 저 말만 한 게 없다(방금 소만 한… 이라고 썼다 지웠다). “싫어” 하고 소리치는 딸 앞에서,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저 말을 이어붙인다. 모녀의 핏줄 속에 랩 본능이 숨은 것일까? 그런데 자주 쓰인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 문맥에서 활용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표준 해석은 이렇다. 잔소리 듣기 싫으면 시집가서 좋아하는 사람 말 들으며 살아. 부모는 잔소리꾼, 남편은 아첨꾼이란 얘기다. 그런데 이 말놀이는 좀더 이어지기도 한다. 싫으면 시집가서 시아버지 구두 닦아. 시집가서 고생해봐. 친정이 얼마나 천국이었는지 깨달을 테니. 나도 네가 싫으니 싫으면 시집가버려. 이렇게 읽으면 이 꼴 저 꼴 안 보고 널 보내버리겠다는 선언이다. 여자의 삶의 단계를 결혼으로 끝내겠다는 심보다. 싫으면 시집가서 행복해져. 이 말은 표준 해석과 같아 보이지만 여자에게는 시집이 만사형통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는 처음 해석과 천양지차다. 여자의 삶의 궁극적 행복은 결혼에 있으며, 그것만 잘 치르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순진무구 내지는 백치미의 소산이다. 싫으면 네 시집으로 돌아가. 이건 친정을 찾아온 딸에게 하는 이상한 잔소리다. 출가외인이라는 봉건적 관념에 꽉 막힌 어른의 소리다. 이런저런 꼴 보기 싫으면 시집이나 가. 앞에서의 보기 싫은 주체는 부모지만 이번 주체는 딸이다. 묵은 장롱 내다버리듯 딸을 치우겠다는 것이니 딸은 미리부터 출가외인이다.

그러니 이 말을 한 가지로 정의할 수가 없다. 이 뜻인가 싶으면 저 뜻이다. 내가 한 축복이 듣는 딸에겐 저주일 수도 있으니 안 하느니만 못한 축복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새로운 뜻이 추가됐다. 혼자 살기도 벅차서 연애하기도 힘든 청춘이 늘고 있어서다. 이런 곤고한 삶 앞에 대고 “싫으면 시집가”라는 말은 (너라도 그 팍팍한 삶에서 탈출하라는) 축복일까? (갈 수 없는 걸 빤히 알면서 부아를 돋우는) 저주일까?

용례 이 말의 반대는 뭘까? 좋으면 뭘 하면 좋지? 운을 맞출 필요가 있다면 “좋으면 종쳐”나 “좋으면 조심해” 같은 말이 되겠지만, 그냥 단순한 반대도 가능할 것이다. “싫으면 시집가지 마.” 이때의 시집은 ‘시월드’를 말한다. 며칠 전이 설날이었지. 민족 최고의 명절을 유격 훈련하듯 치른 며느리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