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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 cross] 항상 엔딩을 생각하고 글을 쓴다
이예지 사진 오계옥 2015-04-06

드라마 작가 유보라

지성, 황정음 주연의 드라마 <비밀>로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드라마계의 뉴웨이브로 떠오른 유보라 작가를 기억하는가. 무서운 신인 유보라 작가가 김새론, 김향기 주연의 삼일절 특집극 <눈길>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그녀가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위안부를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눈길>은 드라마로선 이례적으로 영화로 재편집해 극장 개봉을 추진 중이다. 인기 드라마를 마치고 차기작으로 단막극을 선택한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최근 새로운 미니시리즈를 구상 중이라는 유보라 작가를 만났다. 포즈를 취하는 사진 촬영은 민망하다며 반려견 뭉치와 함께 촬영에 임하고, 원빈에 대한 마음을 수줍게 고백하는 그녀는 기대보다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관심 있는 소재에 대한 조리 있는 언변과 드라마 작법에 대한 노하우는 그녀가 완연한 프로페셔널임을 느끼게 했다.

-드라마 <비밀>의 지성, 황정음 커플이 최근 <킬미 힐미>로 또다시 인기몰이를 했다. ‘지성이면 정음’이라는 유행어까지 생기면서 <비밀>을 복습하는 열풍도 일었다.

=정말인가? 두분이 다시 나와 나 역시 신기했다. 워낙 재미있어서 나도 팬으로서 즐겁게 봤다. <킬미 힐미>의 신세기(지성)가 <비밀>의 조민혁(지성)과 닮았다는 말도 들었는데, 신세기가 더 멋있더라. (웃음) <비밀>은 캐스팅이 뒤늦게 된 편이었다. 캐스팅이 일찍 됐으면 배우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같이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었겠지만, 지성씨와 황정음씨를 잘 모른 채로 각본을 쓰게 됐다. 그런데 두분이 캐릭터를 워낙 잘 잡아가니까 곧 그들의 말투나 습관을 따라 쓰게 되더라.

-<비밀> 이후 많은 제안이 있었을 것 같은데 단막극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비밀>은 이미 기획된 작품에 합류한 경우였다. 얕은 상태에서 급하게 쏟아내다 보니 다음 것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 스스로를 채우는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평소 관심 있었던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미니시리즈보다는 단막극이 더 적합한 것 같아 삼일절 특집극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비밀>로 일약 주목받는 작가가 되기 전까지의 시간이 궁금하다.

=대학 학부 때는 문예창작과의 소설 전공이었다. 재학 시절 운 좋게 신춘문예로 등단을 했지만 이후 잘 풀리지는 않았다. 장편소설 공모전에서도 많이 떨어졌다. 자꾸 떨어지다 보니, 수상한 작품들을 보면서 ‘왜 내 것이 안 되고 이게 됐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제야 왜 내가 떨어졌는지 알게 된다. 학부 졸업 후엔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에 진학해 시나리오를 공부했다. 연출도 해봤는데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었고. (웃음) 졸업작품으로 쓴 장편 시나리오를 조금 줄여 단막극 공모전에 내보았는데 당선이 됐다. 이후 단막극들을 작업했고, <비밀>이라는 작품에 투입되었다. 계속 갈아타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갈아탄 경험이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일조한 것 같다. <연우의 여름> <18세> <태권, 도를 아십니까> 같은 풋풋한 방황도, <상권이> <저어새, 날아가다> 같은 외로운 중년의 이야기도 유연하게 소화해냈다. 선호하는 장르나 관심사가 있나.

=계속 찾아가는 중이다. 다양한 소재를 다룰 수 있었던 건 단막극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그게 단막극의 존재 이유다.

-가장 최근작인 삼일절 특집 드라마 스페셜 <눈길>은 먼저 제안한 아이템으로 알고 있다.

=맞다. 위안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먼저 PD님에게 제안을 드렸고, 적극적으로 삼일절에 편성해주셨다. 기획 당시엔 살아남은 분들의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걸 풀려고 했더니 힘든 여자의 일생이 되더라. <눈길>은 청소년들이 많이 봐줬으면 했던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시대의 이야기도 보여주는, 정석대로 가는 작품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전 조사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했다고 들었는데.

=인터뷰 자체가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인 취재 대신 시대상에 대한 조사, 의상에 대한 고증을 최대한으로 하려 했다.

-촬영 당시에도 어린 배우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

=20대 여배우를 쓰면 성적인 느낌으로 비칠까봐 10대 배우들을 쓰고자 했다. 다만, 10대 배우들을 쓰게 되면 그것이 그들에게 폭력이 되지는 않을까 고민이 됐다. 그래서 성적인 장면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PD님이 연출할 때도 직접적인 표현이 필요한 부분은 따로 촬영해 배우들이 연속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했다.

-<눈길>의 1, 2부를 연이어 보니 마치 영화 한편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눈길>은 편집을 다시 해서 극장 개봉을 추진하고 있다. 드라마 단막극을 영화로 개봉하는 것은 최초인 것으로 알고 있다. 크게는 아니고 소규모로 개봉할 것 같다.

-<눈길>의 종분, 영애나 <비밀>의 강유정, 조민혁이나 디테일한 특징을 잘 살려 캐릭터를 잡는 것 같다.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을 그리려고 노력한다. 배우의 습관과 말투를 살려서 쓰려는 편이다. 어느 순간 쓰다보면 캐릭터가 알아서 움직인다고 하는데, 아직 그 경지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껏 제일 감정을 이입하면서 쓴 캐릭터는 누구인가.

=단막극 같은 경우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들어가다 보니 머리를 쓰면서 체계적으로 쓰게 된다. <비밀>의 경우는 급하게 쓰다 보니 생각을 정리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썼다. 안도훈(배수빈), 강유정(황정음) 역할에 이입하면서 썼던 것 같다. 조민혁(지성)과 신세연(이다희) 캐릭터는 둘 다 재벌이라 이입이 되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캐릭터가 조금 떠 있는 듯 보였을 수도 있다.

-작품들을 보면 캐스팅된 배우들의 연기가 항상 좋다.

=캐릭터를 잘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배우들이 호연해준 덕이 컸다. <눈길>은 김새론, 김향기씨가 캐스팅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제 됐다” 싶었다.

-배우를 먼저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도 하나.

=원래는 배우와 상관없이 글을 쓰는 편이었다. 그런데 생각이 달라진 계기가 있었다. 단편 <기린과 아프리카>에서 한예리씨가 인상적이어서 저 배우와 언젠가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연우의 여름>에서 만나게 됐다. 그리던 배우와 함께하는 경험을 한번 하고 나니 좋다는 걸 알게 됐고, 꿈을 꾸게 됐다.

-어떤 배우와 작업하길 꿈꾸나.

=원빈이다. 영화에서도 좋지만 드라마 <꼭지>에서 정말 좋았다. 이제 드라마에 한번쯤은 나와주실 때도 되지 않았나. 로망이다.

-어떤 캐릭터를 제안해보고 싶은가.

=그런 건 없고 그냥 원빈. (웃음)

-<125 전승철>이라는 박정범 감독의 영화 시나리오도 썼다. 영화와 드라마 각본 모두 해본 입장에서 작업에 어떤 차이가 있나.

=드라마는 시간이 빠듯하다 보니 대본이 명확해야 한다. 시간이 없을 땐 대본대로 찍을 수밖에 없지 않나. 영화는 작가가 디테일하게 지문을 쓰기보다는, 연출의 의도가 더 많이 담기게 된다. 내러티브 작법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환경의 차이는 어떤가.

=영화 환경이 더 어렵지만 드라마도 쉽지는 않다. 신인이 힘든 건 영화나 드라마나 비슷하다. 그래도 드라마 극본쪽은 산업 구조가 잡혀 있다 보니 계약이 된 상태에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고, 방송작가협회에서는 체계적으로 관리를 해준다. 저작권에 있어서도 영화는 시나리오작가 지분이 미미하지만 드라마는 권리를 인정해준다.

-드라마 산업에서 뉴웨이브를 이끌어갈 또 다른 작가가 있다면 누구를 꼽고 싶은가.

=최근에 신인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특히 KBS 공모전 출신이고 단막극 <마귀>와 <감격시대>를 쓴 채승대 작가님. 그리고 <정도전>의 정현민 작가님. 남자 작가들의 글은 굵직하게 가는 맛이 있다.

-차기작 계획은 어떤가. 영화 생각은 없는지 궁금하다.

=멜로가 깔려 있는 누아르 장르로 미니시리즈를 구상 중이다. 정통 누아르이되 과장되지 않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을 하고 싶다. 영화 작업도 의향이 있다. 구체적으로 얘기할 단계는 아니지만 초반 작업 중이다.

-또 다뤄보고 싶은 소재가 있다면.

=근현대사 시대극이다. 사극은 많은데, 격동의 시기였던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는 의외로 별로 없다. 현재 사회가 부조리한 것 자체가 근현대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왔기 때문일 텐데, 대놓고 부조리를 파헤친다기보다는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눈길>도 그런 생각으로 했던 작품이다.

-드라마 공모전을 통해 데뷔했기 때문에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롤모델로도 여겨질 것 같다. 지망생들에게 작법에 대한 노하우나 팁을 준다면.

=공모전에 응모할 분들이라면 수준은 사실 비슷비슷할 거다. 결국 자기가 생각하는 주제를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의 문제다.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 이야기의 의도를 알게 하는 것, 자기가 생각한 걸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항상 엔딩을 생각하고 글을 쓴다. 중간은 비어 있더라도 마지막은 생각해놓는다. 그러면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가더라도 엔딩을 생각하며 다잡을 수 있다. <비밀>도 엔딩에 대한 그림이 있었다.

-그외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나.

=최종심에 올라가지 않으면 심사평에도 안 오르기 때문에 자신의 글이 뭐가 잘못됐는지 잘 모른다. 나 역시 엄한 데서 삽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고 답답했었다. 결국 그런 분들이 듣고 싶은 말은 “괜찮아, 계속 써도 돼” 일 것이다. 분명 좋은 이야기를 가진 분들이 많을 것이다. 용기를 가지고 계속 썼으면 좋겠다.

<눈길>

1944년 일제 강점기 말을 배경으로, 위안부로 끌려간 두 소녀의 우정을 다룬 삼일절 특집극. 부잣집 아가씨 영애(김새론)와 가난한 종분(김향기)이 함께 위안부에 끌려간 후에 겪는 관계 변화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의지하게 되는 과정을 소녀들의 눈높이에서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 자극적인 성적 묘사를 배제한 담담한 표현은 오히려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액자 구조로 현재 시점에서 방황하는 십대 청소년 은수를 등장시키면서 세대간의 외연을 넓혔다. 현재 영화로 재편집하여 극장 상영을 추진 중이다. 올해 2월28일∼3월1일 KBS1TV에서 방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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