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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인생은 치장할 수 없다

임권택 감독의 <화장>이 삶과 죽음과 욕망을 보여주는 방식

<화장>

<화장>은 장례 행렬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두 검은 상복을 입은 무리 가운데 앞줄에 선 중년 남자 오정식(안성기)이 문득 뒤돌아본다. 행렬의 끝에 붉은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보인다. 오정식이 상무로 재직 중인 회사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오정식이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여자 추은주(김규리)다. 이 영화는 오정식의 죽어가는 아내(김호정)에 대한 기록과 그런 아내를 간호하면서 젊은 여직원을 마음에 뒀던 오정식의 내면의 추이에 관한 묘사다. 원작소설도 비슷한 구성이었지만 원작에서 독백으로 묘사한 추은주에 대한 오 상무의 마음은 훨씬 건조하게 객관적으로 그려진다.

맹렬한 직설화법

이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때로 돌출하듯이 맹렬한 직설화법으로 오정식의 욕망을 그리는 장면들이다. 현재와 과거가 오가는 가운데, 영화 중반 오정식과 그의 아내가 별장에 가서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좋은 예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참을 수 없이 비루한 느낌을 주는데 차마 연민이라도 할 수 없는 늙은 중년 남자와 여전히 여자이고 싶은, 죽어가는 여자의 참혹한 섹스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 전에 오정식은 병실에서 아내로부터 타박을 받는다. 환자 병수발로 피로에 지친 오정식에게 아내는 와인을 마시고 취한 채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지 않느냐고 다그친다. 이 장면 뒤에 따라붙는 것이 별장에서의 섹스 장면이다. 아내는 샤워를 하고 남편은 그사이 비아그라를 먹는다. 침대에 누운 아내는 남편에게 침대에 오르라고 손짓으로 청한다. 남편은 머뭇머뭇 침대에 누워서도 가만히 망설이고 있다. 아내가 남편의 손을 자기 가슴에 얹자 남편은 다시 마지못해 아내의 몸 위에 오른다. 키스하고 삽입하고 아파하는 아내에게 그만할까를 묻고 계속하라는 아내의 말에 기계적으로 성교를 계속하는 이 부부의 모습은, 감상적인 음악이 깔리지 않았더라면 더욱 참혹했을 것이다. 절실하게 몸을 통해 자신을 여자로 감각하고 싶은 아내의 표정과 달리 남편 오정식의 동작과 표정은 그저 황망할 뿐이다. 아내를 여자로 느끼지 못하는 남편은 전립선 비대증을 앓고 있는 그 자신의 불구의 몸으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채 몸을 쓰고 있다. 여자는 아마도 남자의 식은 마음을 알 것이고 남편 못지않게 그녀 자신도 황폐한 사막의 마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오정식의 내면을 직설로 드러내듯이 추은주의 나신이 인터컷된다. 전혀 다른 조명과 색조로, 음란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추은주의 나신 장면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오정식의 정념에 대한 임권택 감독의 차가운 시선으로 보인다. 그것은 몸이 따라주지 않는 욕망이므로 더욱 추하다. 그것이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추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동반한 것이기 때문에 추하다. 발기하지 않는 연약한 육체, 아내와의 짧은 성교도 감당하기 힘든 육체가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욕망은 생경하다. 그는 이것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선 잘 볼 수 없었던, 추은주의 인터컷이 대변하는 직설의 장면은 크레딧 시퀀스의 장례 행렬 장면 외에도 한번 더 나온다. 추은주가 결혼하는 날을 피해 의도적으로 출장을 떠난 오정식은 후원하는 공연단의 무용 공연을 보고 거래처 임직원들과 피곤한 술자리를 가진다. 숙소로 돌아온 그는 거래처 사장이 보낸 접대부를 물리치고 새벽까지 숙소 베란다에서 상념에 젖어 맥주를 마신다. 갑자기 꿈 장면이 등장하고 오정식이 낮에 본 공연의 무용수들이 고혹적인 춤을 추고 있다. 오정식은 그들 사이를 헤매며 추은주를 찾는다. 홀린 듯이 돌아다니며 추은주인 줄 알고 무용수의 몸을 잡지만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다. 이윽고 추은주를 발견한 오정식이 그녀의 몸을 잡을 때 그것은 악몽으로 드러난다. 아내의 병실 침대 옆에서 잠을 자던 오정식은 악몽에 놀라 화들짝 깨어난다. 마치 징벌인 듯한 느낌을 주는 이런 갑작스런 대비는 <화장>에서 내내 지속되는 연결방식이다.

그것은 사랑일까

<화장>에서의 장면 전환은 간결하면서도 앞 장면의 의미를 부연하지 않고 오히려 단호하게 거부하는 느낌을 주는 것들이 상당하다. 이를테면 영화 후반부에 문상객이 다 빠져나간 장례식장에서 오정식과 대화를 나누던 오정식의 딸은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적이 없지 않느냐고 묻는다. ‘사랑’이라는 관념적인 말 뒤에 붙는 다음 장면은 대변 처리가 원활하지 않은 아내가 변을 보자 욕실에서 오정식이 아내의 뒤를 닦아주는 장면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수치스럽다. 돌봐주는 아줌마가 오면 하겠다고 아내가 간청해도 남편은 냄새가 난다고 듣지 않는다. 남편은 몸이 불편한 아내를 다스리기에 쩔쩔매면서 아내의 아랫도리를 닦아준다. 앞쪽은 자기가 하겠다고 한사코 우기던 아내가 샤워기를 잡자 물줄기가 사방으로 튄다. 샤워기를 빼앗은 남편 오정식이 아내의 아랫도리를 다 닦아주고 일으켜 세울 무렵 아내는 다시 또 나온다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 장면에서도 남편은 물론 영화 내내 그가 그랬듯이 감정을 전혀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친절하고 부드러운 억양을 최대한 유지한 채로 아내의 용변 처리를 도와준다. 이 장면에서 그의 몸짓은 사랑에 속하는 것일까, 아닐까. 아기처럼 똥을 싸는 아내가 남편에게 보이는 미안함과 수치심은 사랑의 감정과 얼마나 멀리 떨어진 것일까.

아빠에게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딸은 다른 앞선 장면에선 병실에서 오정식과 함께 떡볶이 등의 간식을 먹다 병실에 퍼진 용변 냄새에 코를 찌푸리고 당황한다. 오정식이 침대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아내의 기저귀를 익숙한 솜씨로 갈아주는 동안 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저 당황해하면서 아직 젊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늙고 병든 엄마의 몸에서 똥이 나온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화면 밖으로 나가 울음을 터뜨린다. 여기서 그녀의 행위는 사랑인가, 아닌가. 물론 이 영화가 사랑의 의미를 묻는 영화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남용되는 사랑 따위의 관념적인 말의 의미를 떠나서 이 영화는 인간이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 욕망한다는 것 등의 구체적인 물질적 증거를 냉철하게 화면에 나열하고 있다. 그 나열의 밀도와 패턴이 정밀해서 영화 곳곳에선 때로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차가운 공기가 배어난다. 인간에 대한 어떤 감상적 수식도 배제한 흔적들이어서 그렇다.

이를테면 크레딧이 끝나고 보이는 영화 첫 시작 장면도 인상적이다. 오정식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아내는 임종한다. 오정식은 간호사가 오기 전에 아내의 죽음을 알리는, 삐 소리가 나는 계기판을 끈다. 그는 병원 직원들이 아내의 시신을 옮기는 침대 옆에 서서 하복부를 붙잡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지만 그는 전립선 비대증을 앓고 있으며 그 때문에 오줌을 누지 못한다. 딸에게 아내의 임종을 알리고 그가 장례 준비를 하기 전에 찾는 곳은 인근의 비뇨기과 병원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오정식에게 나이 든 의사는 오정식이 앓고 있는 병이 병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일종의 노화현상이라고 말한다. 간호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민망함을 감추면서 오정식의 요도에 튜브를 꽂는다. 습관적인 친절을 가장한 간호사의 어투와 앞서 의사가 보여줬던 어투는 당사자의 고통이 대다수 사람들에겐 그저 심드렁한 일상의 일과일 뿐이라는 걸 드러낸다. 매일매일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지만 우리 대다수는 그것에 관심이 없고 의식하지 못하듯이, 또는 누군가는 처절하게 병으로 고통을 앓고 있지만 당사자나 주변 사람이 아니면 그 고통을 알지 못하듯이, 이 고통의 상대성은 숙명적이다. 오정식이 사우나를 하는 다음 장면에선 벗은 남자들의 몸이 화면에 어른거린다. 결코 멋있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의 육체들이 보일 때 욕탕에 앉은 오정식의 시점에서 화면은 과거 회상 장면으로 넘어간다. 첫 장면에서 죽었던 아내는 건강한 모습으로 튼실한 개 보리와 함께 공원에서 놀고 있다. 이 영화에선 추은주와 더불어 유일하게 생명력 넘치는 존재로 보이는 보리라는 이름의 개는 활기차게 뛰어다니며 오정식의 아내와 딸을 즐겁게 해준다. 영화가 끝날 무렵 오정식은 추은주에 대한 모호한 감정을 단호히 정리하고 동시에 아내가 어쩌면 자신보다 더 끔찍이 여겼을지도 모를 이 개를 안락사 처리한다. 그건 오정식의 아내가 생전에 부탁한 것이기도 했다. 아내는 보리를 키울 자신이 없으면 나랑 같이 보내달라고, 개는 주인팔자를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정식은 당신 가면 안락사시킬 거라고 차갑게 말한다. 이것은 아내에 대한 오정식의 마음의 바닥을 드러내는 장면이었을까.

임권택의 엄격한 시선

오정식의 추은주에 대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죽어가는 아내의 썩은 육체를 간병하는 자신의 피로한 육신에서 문득 용솟음치는 젊음의 활력과 그로 인해 느껴지는 생명의 약동에 반한 것일까. 처음에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오정식과 추은주가 처음 회사에서 조우할 때,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추은주를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정식이 몰래 훔쳐볼 때, 젊기 때문에 깨끗하고 모든 것이 조절 가능한 강건한 육체를 보며 오정식은 자신에게는 이미 사라진 생기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욕망이 개입하는 순간, 영화는 그에게 딱히 명시적으로 단죄를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동정하지도 연민할 수도 없는 시점에 관객을 몰아넣는다. 이를테면 오정식이 회사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몽롱하게 의자에 앉아 곯아떨어져 있을 때 추은주는 지공다스라는 와인을 시키며 마치 오정식에게 하는 듯이 그 술에 대한 헌사를 말한다. 그 술은 ‘풍성하고 중후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깊어지고 부드러워지며, 첫맛은 냉정해 보이는데 입 안에서 굴리다보면 편안한 향기가 풀어져서 자상해진다’는 것이다. 화면은 그녀의 논평을 깔고 졸고 있는 듯, 동시에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한 오정식을 향해 다가간다.

이 회식의 헤어지는 자리에서 오정식은 추은주로부터 와인을 선물받고 택시 뒷자리에서 회사 직원 무리 사이에 있는 눈부신 추은주의 모습을 본다. 그것이 실재일 리는 없다. 오정식은 그 자신만의 환상을 본다. 택시를 돌려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지만 추은주는 없다. 그날 밤 오정식은 두 차례나 택시를 돌려 추은주를 향해 돌아가지만 실패한다. 혼자서 그가 모텔들이 즐비한 밤거리를 술이 막 깨기 시작한 황폐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광경은 이 영화를 떠올릴 때 잊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도덕적 단죄의 느낌 없이, 연민도 동정도 없이, 자신의 허물어져 가는 육체에 대한 자각과 아내의 썩어가는 육체에 대한 피로감이 중첩된 몰골로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욕망에 일시적으로 무너진 채로 방황한다.

물론 그는 냉정을 되찾는다. 아내는 죽었고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찾아오는 추은주를 물리치며 아내가 아끼던 개를 안락사시킨 채 오정식은 아내가 죽기 전의 직업적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가 지휘하는 광고 카피를 ‘가벼워진다’로 정하는 통화를 한 후 그가 걸어가는 모습은 이 영화 내내 봤던 어떤 모습보다 단호하다. 임권택 감독의 많은 영화들, 심지어 <오염된 자식들>과 같은 1980년대의 평작들에서조차 나는 임권택 감독이 등장인물에게 보이는 그 엄격한 시선이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어떤 의미로 치장할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과 욕망 등에 관한 이 영화는 어른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절제된 화면으로 인물에 대한 공격과 포용을 자연스레 포갠다.

누가 만들어도 소설 <화장>을 이만큼 영화로 잘 만들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거장의 공력에 관해 새삼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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