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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경사기도권] 팀 커리의 이십면상
허지웅(작가) 일러스트레이션 한차연(일러스트레이션) 2015-04-30

<록키 호러 픽쳐 쇼> <피의 피에로>를 비롯한 영화들에서 나를 사로잡은 팀 커리의 69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다. 오래전 일이다. 자정이 넘도록 잠이 오지 않아 TV를 틀었다.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맞추다 2번에 가서 시선이 멈추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늠할 수 없는 누군가가 거기 있었다. 얼굴 가득 두껍게 분칠을 하고 빨갛다 못해 검정에 가까운 립스틱을 칠한 채 엄청나게 큰 두눈과 입을 껌벅이며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런 목소리도 처음 들었다. 게다가 자꾸만, 브라운관 너머의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영화 속 인물이 왜 상대역을 보지 않고 내쪽을 바라보며 말을 하고 윙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공뿐만이 아니었다. 그 영화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상했다. 이상했다, 라는 말 이외에 저 모든 광경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내 또래가 90년대 초반에 이 영화를 봤다면 그 경로가 대개 이와 비슷할 것이다. <록키 호러 픽쳐 쇼>(1975)였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지켜보았다. 제목도 내용도 장르도 이게 과연 영화이긴 한지도 알지 못했다. 심야에 < AFKN >에서 포르노를 보았다는 도시전설이 떠올랐다. 그래서 보는 걸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런데 갈수록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그러니까 그게 이를테면 뭐랄까, 불온했다. 인류가 봐선 안 되는 걸 보고 있다는 본능적인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미군이 현관문을 박살내고 들어와 이 영화는 실수로 송출된 것이며 한국의 청소년이 0시 이후 미군 방송을 볼 경우 사살한다고 외칠 것만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화 내내 거의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프랭크 박사가 죽음을 맞이하고 영화가 끝났다. 시간이 한참 더 흘러 창을 통해 볕이 스미기 시작하는데 나는 여전히 소파 위에 박혀 있었다. 꼼짝할 수 없었다. 가슴이 저릿한 게 명치 주변에 쥐가 난 것 같았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후로 오랫동안 이 영화에 사로잡혀 살았다. 모두가 흉물스럽다고 기겁하는 포스터를 방 안 가득 붙여놓고 노래를 외우고 타임워프 춤을 따라 추었다. 그리고 프랭크 박사를 흠모했다. <록키 호러 픽쳐 쇼>는, 프랭크 박사는 그렇게 내 인생을 뒤흔들어놓았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다. 역시 오래전 일이다. 교실마다 칠판 옆의 상단 모서리에 작은 TV가 달려 있었다. 그냥 TV도 아니고 무려 비디오데크가 붙어 있는 비디오비전이었다. 시청각 교육을 위해 전격 설치되었다는 최첨단의 교보재였으나 막상 교육을 위해 이 첨단의 교보재가 활용된 일은 거의 없었다. 시험이 끝나거나 학기 마지막 날이 되면 우리는 대여점에서 영화를 빌려와 선생님의 허락을 구한 뒤 단체관람을 했다. 나는 그렇게 모두 다 같이 한 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다. 도서 부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다보니 비디오를 빌려오는 일은 대개 내 몫이었고 나는 막중한 사명감을 짊어진 채 영화를 고르는 일에 한 시간 두 시간씩 공을 들이고는 했다.

그날 내가 빌려온 영화는 <피의 피에로>(1990)였다. 무서운 영화를 여럿이 함께 보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알고 있었다.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원제는 다른 것 같았으나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를 향하는 내내 이 영화를 빨리 함께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흡사 내가 만든 영화처럼 말이다.

숨죽인 50명의 소년 소녀들이 교실 천장 한쪽의 작은 브라운관을 노려보는 가운데 영화가 시작되었다. ‘스티븐 킹의 IT’라는 원제가 화면 가득 붉은색으로 빵, 하고 떴다. 그 아래에는 작게 ‘피의 피에로’라는 자막이 따라왔다. 나는 원제와 출시명이 다른 영화들이 대놓고 대담하게 뻥을 치는 이 순간이 늘 즐거웠다. 제목이 그게 아닌데 뭐가 피의 피에로람 헤헤헤헤헤헤. 화면이 밝아지고 소녀가 등장했다. 작은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었다. 곧이어 집 마당의 풍경. 소녀가 기척을 느끼고 어딘가를 바라본다. 이불 빨래들이 가득 널려 있는 공간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소녀에게 말을 걸고 있다.

광대였다. 대머리에 붉은색 뒷머리가 무성하고 얇은 눈썹과 큰 두눈. 빨간 코와 주름 너머로 새하얗게 무고해 보이는 웃음이 드러났다. 광대를 보고 소녀가 웃음 지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광대의 입이 커지는가 싶더니 상어 같은 이빨이 드러났다. 광대의 얼굴이 화면 가득 차올랐다. 표정을 가로지르는 그늘이 생겨났다. 눈도 입술도 잔인하게 일그러졌다.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광대의 이빨이 교차되었다. 목젖까지 클로즈업! 50명의 비명이 교실을 채웠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러나 달랐다. 이번에는 나도 같이 놀랐기 때문이다. 저 광대의 얼굴.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표정이었다. 영화 내내 광대가 등장할 때마다 기겁을 했다. 급기야 우리 분단 맨앞줄의 여자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잘 울던 애이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당혹감과 미안함, 그리고 광대에 대한 충격으로 거의 가위가 들린 듯 웅크린 채 영화를 지켜보아야 했다. 광대의 이름은 페니와이즈였다. 이 영화를 몇번 더 보았다. 원작 소설도 읽었다. 가장 좋아하는 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영화 버전의 페니와이즈를 볼 때마다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무서움을 잘 타지 않는다. 그런데 페니와이즈만은 달랐다. 저런 건 본 적이 없었다. 이후로도 그랬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캐릭터와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캐릭터가 모두 한 사람의 배우였다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록키 호러 픽쳐 쇼>의 프랭크 박사와 <피의 피에로>의 페니와이즈를 연기한 건 같은 사람이었다. 팀 커리였다.

이 남자가 배우를 하지 않았다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어렸을 때 즐겨 읽었던 탐정소설의 캐릭터 가운데 ‘니주멘소’라는 괴도가 있었다. 에도가와 란포의 소년탐정단 시리즈에 등장하는 ‘이십면상’ 말이다. 변장의 귀재로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 심지어 그 자신조차 원래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렸다는(…) 이십면상. 내게 있어 팀 커리야말로 이십면상 그 자체다. <록키 호러 픽쳐 쇼>로 영화 데뷔한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무대와 스크린을 들쑤셔왔다. 그는 단 한번도 슈퍼스타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게, 또 누군가에게 팀 커리는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나 명망 있는 배우 이상의 무언가였다.

눈동자가 세개는 있어도 될 법한 큰 눈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안면 근육, 거기에 길게 찢어진 입이 만들어내는 표정은 어느 옷을 입혀놓아도 압도적이고 독보적이며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팀 커리의 얼굴은 어딘가, 아무래도 보호자와 함께 보면 안 될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새겨져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음란하다가도 치명적으로 일그러져 소름끼치는 얼굴이다. 여기에 훌륭한 노래 실력까지(그는 가수이기도 하다). 마성의 아무개라는 식상한 수사는 오로지 팀 커리에게만 허락되어야 마땅하다. 형, 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아, 라고 말하게 만드는 단 한 사람이다.

물론 그런 게 늘 도움만 되었던 건 아니다. 팀 커리는 팀 버튼 버전의 <배트맨>(1989)에서 조커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너무 소름끼친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외부에는 그가 2순위였으며 본래 잭 니콜슨이 1순위였다고 알려졌다. 대신 영화가 히트한 이후 기획된 TV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조커의 목소리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이마저 엎어지고 마크 해밀이 조커 역할에 낙점됐다. 이번에도 이유는 같았다. 목소리가 너무 소름끼쳐서. 또! 두번씩이나! 소름끼쳐서 영원히 고통받는 팀 커리! 어찌됐든 <배트맨>이 개봉한 이듬해 <피의 피에로>로 사람 죽이는 광대 역할을 했으니 미련이 남지는 않을 듯.

지난 4월19일은 팀 커리의 69번째 생일이었다.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고전 게임 <가브리엘 나이트>에서 가브리엘 나이트의 목소리를 형이 연기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내 취향을 미친 듯이 관통하는 형, 사랑합니다. 생일 축하해요. 날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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