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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아무렴, 꼬마야
김혜리 2015-10-29

※<슬로우 웨스트>의 상세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더 홈즈맨>

<더 홈즈맨>의 주인공 힐러리 스왱크는 서부극 전통에 충실하게, 밭을 힘겹게 쟁기질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반면 공동각본가 겸 감독이자 주연인 토미 리 존스는 프레임 안으로 굴러떨어지듯 입장한다. 그의 캐릭터 떠돌이 조지 브릭스(토미 리 존스)는 주인이 비운 집을 무단 점거했다가 마을 주민들이 굴뚝에 폭약을 투척하자 내복바람으로 뛰쳐나온다. 얼굴을 뒤덮은 검댕은 특유의 깊은 주름을 우스꽝스럽게 부각시키고 떡진 성긴 머리칼에서는 김이 피어오른다. 많은 출연작에서 이 배우가 보여준 하늘이 두쪽 나도 미동 없는 ‘마이 웨이’의 화신 같은 모습과 사뭇 대조적이다. 평소 존스가 긍지와 책임감을 안고 세태를 말없이 한탄하는 인물을 연기했다면 <더 홈즈맨>의 그는 척박한 세상과 더불어 적당히 미치고 야비해진 노인네다.

09/28

소년은 스코틀랜드에서 대양을 건너 신대륙의 콜로라도에 도착한다. 그의 이름은 제이(코디 스밋 맥피), 여행의 목적은 사랑하는 아가씨 로즈(카렌 피스토리우스)를 만나는 거다. 소작농인 로즈와 그녀의 아버지는 제이를 로즈와 떨어뜨려놓으려는 소년의 귀족 친척을 과실로 해쳐 도망자가 됐다. 장도에 오른 제이가 처음 마주치는 것은 마을을 파괴당한 원주민들이다. 안개 낀 숲이 시작될 무렵, 산전수전 다 겪은 서부 사나이 사일러스(마이클 파스빈더)가 접근해 소년의 무방비한 처지를 일깨우며 에스코트 서비스를 강매한다. 로즈의 막연한 주소인 ‘서쪽’(west)에 닿기까지 소년과 남자는 인디언 학살자, 아프리카 출신 노래하는 3인조, 현상금 사냥꾼, 굶어 죽어가는 스웨덴계 가족, 문명을 냉소한 나머지 사기꾼이 된 독일인 등과 마주친다. 오직 맹목적 사랑으로 서쪽으로 나아가는 홍안의 제이는 온 서부를 통틀어 가장 대책 없는 연약한 존재지만, 여정이 끝나갈 무렵에는 냉정한 동행 사일러스로 하여금 생존 제일주의를 버리게 만들며, 나아가 서부라는 공간을 자신의 흔적으로 ‘변질’시킨다(로즈는 제이를 ‘써니 보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그러했듯, 제이는 자신이 영구히 변모시킨 혹성에 머물진 못한다.

의미심장한 에피소드가 나열되다가 ‘천국의 문’ 같은 궁극의 공간에 이르러, 모든 갈등이 불꽃놀이를 벌이며 플롯들이 완벽한 피날레로 매듭지어지는 <슬로우 웨스트>는, 여행기 구조의 동화를 연상시킨다. 이 감상에는 이야기의 천진난만함보다 명료한 미적 규율로 전체가 정돈된 인상이 크게 작용한다. 등장인물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아예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서부의 인구 밀도도 각 장면을 동화 일러스트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긴 서부영화도 일종의 동화라면 동화다. 웨스턴 속 서부와 역사적 서부의 실체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있다. 한때 서부영화는 미국인들에게 마을을 습격한 나쁜 용에 대적하는 유럽의 영웅전설 대신이었다(지금은 그 자리를 슈퍼히어로영화들이 이어받았다). 판타지로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미묘하게 초현실적인 음악과 미술, 기존 서부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수목과 꽃- 촬영지가 뉴질랜드다- 들도 <슬로우 웨스트>의 특이한 조성(調性)에 한몫한다. 영화의 첫 신에서 제이는 밤하늘의 오리온 성좌를 총으로 쏘는 흉내를 내는데, 보이지 않는 총탄에 맞은 별들은 순서대로 파랗게 빛난다. 이것이 존 매클레인 감독이 택한 톤이다. 요즘 트렌드를 거스르는 80분대의 짧은 러닝타임도 동화적 인상과 무관하지 않다. 서너개의 코드와 리프로 완성된 3분대의 멋진 음악을 듣는 기분이다. 딱히 존 매클레인 감독이 뮤지션 출신이라 갖다 붙인 비유만은 아니다. 예컨대 제이가 고향에서 로즈의 화살에 맞는 시늉을 하던 놀이가 인디언들의 기습으로 다시 소환되는 대목, 잡화점에서 제이가 입어본 재킷의 총알구멍이 피날레의 한 모티브로 변주되는 순간은 잘 짜인 소곡의 재현부 같다.

09/29

처음 만났을 때 제이를 물정 모르는 호구로 여겼던 사일러스는 철없는 소년의 꿈에 서서히 물들어간다. 주로 제이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는 대꾸였던 “아무렴, 꼬마야”(Sure, Kid.)라는 사일러스의 말버릇에는 어느새 조금씩 진심이 실리게 된다(이 대사는 우리가 잘 아는 서부극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사이기도 해서 재미있다). 여정 중간쯤 이르러 관객은 로즈와 사일러스가 아늑한 오두막에서 ‘제이버드’라 불리는 아기를 돌보는 환상 장면을 보게 되는데, 이는 뜻밖에도 제이가 아니라 사일러스의 꿈으로 밝혀진다. 삶에는 생존과 죽음 이외의 무엇이 더 있다는 제이의 사고방식에 사일러스의 무의식이 문을 여는 조짐이다. 이쯤에서 영화는 순수한 영혼에 감화된 죄 많은 남자가 영웅적 행위로 어린 연인들을 돕고 자기도 구원받는 이야기가 될 법하지만 <슬로우 웨스트>는 (다행히도) 그런 동화는 아니다.

<슬로우 웨스트>는 미련한 순진함, 말하자면 나이브(naive)함에 대한 명상이다. 제이의 동기는 순금처럼 정결하다. 열여섯살의 연인을 움직이는 동력은 의심 한점 없는 사랑과 자기로 인한 살인자의 오명을 책임지겠다는 고결한 의지다. 그러나 정작 제이가 매달리는 완전한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는 플래시백 장면에서 관객은 제이를 향한 로즈의 감정이 기껏해야 누이 같은 우정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회상신들은 로맨틱한 음악으로 포근히 감싸여 있으나 존 매클레인 감독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둘의 과거사를 객관적으로 찍었다. 소년의 사랑은 진짜지만, 위대한 사랑의 행위를 감행하도록 만든 기억은 오해였다. 서글픈 진실은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공격당하는 로즈의 오두막에 제이가 마침내 뛰어들었을 때 소년에게도 명백해진다. 반사적으로 침입자를 쏜 로즈의 총에 제이는 그녀의 이름조차 불러보지 못하고 쓰러진다. 다음이 더 냉혹하다. 로즈는 그로부터 한참 동안 제이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마지막 숨을 색색 내쉬는 제이 앞에서, 아마도 현재의 연인인 다른 남자로부터 키스를 받는다. 존 매클레인 감독은 잔인하게 섬세하다. 로즈의 새로운 남자는 제이가 흘린 피를 이마에 발라 결의를 표시하며, 하필 선반의 소금까지 떨어져 제이의 치명상에 뿌려진다. 영원 같은 몇분 후 제이를 알아본 로즈가 다가왔을 때 소년은 운다. 그는 그저 너무 늦게 각성한 바보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로즈에 의해 제이의 손에 쥐어진 권총은 마지막 위기에 로즈를 구하여 소년의 위대한 목표를 완수한다. 뒤늦게 다리를 끌며 나타난 사일러스가 소년의 사랑을 증언하자 로즈가 대꾸한다. “그의 심장은 틀린 자리에 있었죠.”(His heart was in the wrong place.) 틀린 대상에게 사랑을 바친 오류, 그녀의 총탄이 날아간 곳에 있었던 소년의 심장을 함께 일컫는 중의적 대사다. 제이는 나이브하고 어리석었으나 로즈에게 생명을. 사일러스에게 (생사 이상의) 삶을 남긴다. <슬로우 웨스트>는 이 공교로운 조홧속에서 매혹을 발견한다.

10/01

곱씹어보면 바보처럼 죽은 자는 제이만이 아니다. 이 영화의 죽음들은 모조리 허무하다. 어설픈 좀도둑의 마구잡이 총질에 쓰러지고, 엉덩이를 까내린 채 숨지고, 돌부리에 부딪치고 빨랫줄에 걸리고 도끼질하던 나무에 깔려 죽어간다. 순수의 표상인 제이조차 겁에 질린 나머지 똑같이 겁에 질린 여인을 등 뒤에서 눈을 질끈 감고 쏘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얼척 없는 죽음들의 묘사에는 타란티노풍의 블랙 유머도 깃들어 있지만 그것은 무늬에 불과하다. 산다는 일에 불가피하게 포함돼 있는 바보스러움과 허망함을 <슬로우 웨스트>는 작정하고 주시한다. <슬로우 웨스트>는 생존이 삶의 유일한 동기로 남은 척박한 세계에서 생사가 얼마나 어이없이 갈리는지 내내 보여준다. 그리고 클라이맥스가 휩쓸고 간 자리에 정적이 내린 순간, 지금까지 우리가 죽음을 목도한 모든 인물의 시신을 한컷씩 다시 스크린에 불러낸다. 이 숏들의 몽타주는 왜 필요한가? 존 매클레인 감독은 “지금까지 당신들이 즐긴 모험이 사실 이런 살육이었다”라고 갑자기 뒤통수를 치며 설교하거나 자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몽타주는 정중한 애도에 가깝다. 주인공들이 목표를 성취하기까지 그 도정에 쌓인 죽음의 부피를 인지하는 의식이다. 판단이 가리키는 옳은 일을 행하고 감정에 충실히 행동한다고 해서, 삶이 정당한 보상을 돌려준다는 보장은 없으며 온 세상이 숨죽인 관객이 되어 일제히 갈채를 보내는 영광 따위는 없다. 내게 <슬로우 웨스트>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삶의 우스꽝스러움에서 아름다움을 길어올린 영화다.

<하늘을 걷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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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추억

1974년 프랑스의 줄타기 예술가 필리프 프티(조셉 고든 레빗)는 뉴욕에서 완공을 앞둔 세계 최고층 쌍둥이 빌딩에 도전한다. 타고난 재주로 이 세계에 경이로운 이미지를 더하는 일을 소명으로 여기는 남자에게 더한 목표는 없다. 프티의 회고록에 기초한 로버트 저메키스의 <하늘을 걷는 남자>는 환상 동화처럼 출발해 하이스트 무비의 방식으로 전개되다가 초월적인 퍼포먼스로 마무리된다. 덧붙여 <하늘을 걷는 남자>는 14주기를 맞은 9•11의 비극에 바치는 특별한 진혼곡이다. 영화는 이제 세계무역센터의 행복한 추억도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에서 프티가 회고를 들려주는 장소도 프랑스가 미국에 보낸 선물이었던 자유의 여신상 꼭대기이고, 프티 본인도 뉴욕의 역사에 아름다운 삽화를 선사했다. 도전을 마친 프티에게 발급된 무역센터 옥상 출입증의 기한은 ‘영원’이다. 줄곧 수다스럽던 이 영화의 ‘말줄임표’는 맨해튼의 나머지가 사라진 어둠 속에서 빛나는 쌍둥이 타워의 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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