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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감독은 대명사다
김곡(영화감독) 2015-11-06

영화산업노조에서 발표한 스탭 레벨 분류에 대하여

감독이라고 폼 잡고서 모니터 앞에서 다리 꼬고 앉아 있던 어느 현장이었다. 꽤나 친한 조명감독에게 선문답처럼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조명감독이여. 그대는 영화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심 그 조명감독이 “영화의 본질은 빛입니다”라고 대답하기라도 하면, “이런 후카시 같으니라고!”라고 마구 놀려댈 요량으로 던진 농담이었지만, 그의 대답은 농담치고는 너무나 현명했다. 그 대답은 “영화의 본질은 스케줄입니다”였기 때문이었다. 난 꼬았던 다리를 푼다. 그래. 영화의 본질은 스케줄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한날한시에 모여야 만들어지는 게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감독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다. 영화는 스탭들이 만드는 것이다. 꿈과 환영처럼 펼쳐지는 저 스크린 뒤, 거기엔 카메라와 붐대를 들고 버티고 있는, 무전기와 연장을 들고 뛰어다니고 있는 스탭들이 있다.

프리 프로덕션, 현장, 포스트 프로덕션에 모두 참여하는 연출부와 제작부

나 스스로 반성하고 복습하는 의미에서 스탭 계통도를 한번 그려보기로 한다(지금도 현장에 계신 영화인들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오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먼저 연출부와 제작부가 있다. 프리 프로덕션부터 현장, 그리고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줄기차게 행군하는 부서이기에 영화 제작의 척추 같은 존재들이다. 연출부는 감독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아니다. 연출부는 감독의 머리와 마음속에 막연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를 뽑아내고 구체화하여, 분명한 이미지로 태어나도록 돕는 사람들이다. 그런 건 감독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절대 아니다. 시나리오상에서 공간과 소품 등은 언제나 추상적인 형태로만 존재한다(또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구체화는 언제나 여러 의견이 덧붙여지고 또는 탈락되는 논의를 통해서, 심지어 서로의 세계관과 미학관을 힐난해대는 격한 논쟁을 통해서 끄집어내어져야 한다. 그래서 연출부의 진정한 돌격대장은 감독이 아니라 조감독이다. 조감독은 끊임없이 감독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또 압박해서, 이미지가 구체화되도록 돕는다. 좋은 조감독은 감독이 막연하게 “사과”라고 말할 때 “무슨 사과냐. 빨간 사과냐 푸른 사과냐, 실하냐 상했냐”라고 끊임없이 반문하고 자극하고 압박하는 조감독이고, 좋은 감독은 바로 그러한 자극과 압박을 사랑할 줄 아는 감독이다. 연출부가 감독의 꼬붕이 아닌 것처럼, 제작부는 PD의 꼬붕이 아니다. 제작부는 연출부가 현실화한 이미지를 현실에 비로소 접붙여주는 역할을 한다. 스탭들의 식대와 교통비 책정까지 아우르는 예산 집행부터 장소 섭외까지 모든 허드렛일들을 제작부가 도맡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컨대 ‘낡아서 쓰러질 것만 같은 모퉁이 선술집’이라는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은 연출부지만 그것이 오픈세트여야 하는지 세트여야 하는지, 헌팅으로 버리는 시간보다는 세트 제작에 투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지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PD와 제작부의 몫이다. 연출부가 현실을 이미지로 만든다면, 제작부는 이미지를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연출부가 감독의 뇌를 파고든다면, 제작부는 세상의 몸뚱이를 파고든다. 연출부가 프로덕션의 뇌라면, 제작부는 프로덕션의 팔다리인 것이다(영화 제작 과정 내내 나타나는 연출부와 제작부의 고운 정 미운 정 관계는 바로 이 미묘한 애증관계 때문이다).

빛과 빛에 반사될 대상을 다루는 현장의 기술 스탭들

촬영, 조명, 미술, 의상, 분장, 소품, 녹음, 특효/특분과 같은 기술 스탭들이 있다. ‘감독이 현장에서 모두를 잃어도 촬영감독만은 잃으면 안 된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현장에서 촬영감독의 책임과 포스는 엄청나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부는 뷰파인더를 통해서 영화의 매 컷을 최초로 목격하는, 그야말로 최초의 관객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50mm로 보느냐, 85mm로 보느냐에 따라서 풍경과 감정선이 확 달라진다. 같은 동선을 하나로 남기느냐 두번 쪼개느냐에 따라서 동세와 긴장감은 확 달라진다. 듣기에는 엄청나게 폼나는 역할 같지만, 그 뒤엔 엄청난 노동강도가 숨어 있다. 촬영부는 언제나 카메라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사실 쉴 틈이 없다. 카메라가 돌기 전에 일하고 카메라가 도는 동안에 쉴 수 있는 다른 부서(미술, 조명, 분장 등)에 비해서 촬영부는 바로 그 카메라를 돌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명부는 촬영부가 받아들일 그 빛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어떤 빛을 받느냐에 따라 인물과 풍경은 무서워 보이기도,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장면의 분위기에 따라서 광원의 위치와 강도를 신속하게 결정하는 기술, 좋은 광질을 위해서 골목 전등을 갈러 전봇대까지 기어오르는 감전을 불사하는 헌신, 밤 촬영을 하다가 촬영시간이 오버되어 해가 뜨는 불상사의 경우에는, 창문 틈새를 먹천과 고보로 막아대는 그들의 무데뽀 스피릿은 언제 봐도 존경스럽다. 한 셋업 안에서 조명팀은 쉴 틈은 있지만, 대신 무게라는 가혹한 노동강도를 떠맡는다. 도와준답시고 C스탠드 세개를 한번에 들었다가 어깻죽지에 일주일짜리 담이 온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확언할 수 있다. 조명장비, 졸라 무겁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스탭들의 참여율이 의외로 높은 팀 또한 조명부다(실제로 우리나라에도 몇몇 여성 조명감독들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촬영팀과 조명팀이 한 묶음인 것처럼 미술, 의상, 분장, 소품이 또 한 묶음이다. 전자가 빛을 다룬다면, 후자는 빛이 반사될 그 대상을 다룬다. 의상, 분장, 소품/세트까지 미술에 포함된다고 본다면, 그들은 하나의 미술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이렇게 세분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작업 진행상의 편의 때문일 듯하다). 물론 연출부와의 공조 속에서 미술 작업은 이루어지지만, 언제나 더 많고 좋은 이미지들을 펼쳐내는 것은 미술부 쪽이다. 이미지 작업(시나리오에 글씨로 남아 있는 이미지들을 찾아내고 전개하는 작업)에 있어서 연출부와 미술부의 미묘한 경쟁관계는 영화에 결국 약이 되기 마련이다. 통칭 미술감독들의 서재에는 자신이 했던 영화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두꺼운 앨범들이 꽂혀 있다. 그 앨범 하나하나엔 그 두께만큼이나 조사하고 찾아내고 모아놓았던 각종 이미지 자료들이 빼곡하게 담겨져 있으니, 그것은 하나의 세계라고 말해도 좋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아무리 일러스트레이션 자료집을 뒤져도 영화에 적당한 이미지가 없을 경우, 아예 자기 손으로 도안을 그려내거나 이마저도 성에 안 차서 미니어처 디오라마로 먼저 만들어보는 미술감독도 있다. 미술부는 정말 장면을 ‘디자인’하는 셈이다. 아참, 녹음이 빠졌다. 동시녹음은 사실 조금은 외로운 파트다. 다른 부서들이 모두 시각적 이미지를 다룰 때, 녹음은 청각적 이미지를 다루기 때문이다. 지면이 점점 모자라니 짧게 찬양해보자. 예전에 롱테이크 장면을 찍을 때였다. 나는 그때 동시기사님(으레 ‘녹음기사’ 보다는 ‘동시기사’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특수분장’을 ‘특분’이라고 줄여 부르는 것처럼 ‘동시녹음’을 왜 ‘동녹’이라고 부르지 않는지도 알 수 없다, 쩝)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롱테이크 안에서 시시각각 변화되는 숏 사이즈를 예측하고, 움직이는 카메라와 인물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붐대를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도룡검을 휘두르는 조선 최고 검객처럼 보였다.

편집, 믹싱, CG 등 포스트 프로덕션 스탭

이제야 프로덕션이 끝나고, 후반(포스트 프로덕션)이 남았다. 후반 또한 기나긴 여정이다. 편집, 믹싱, CG, DI, 음악 등이 있지만, 지면 압박이 더더욱 심해지는 관계로 편집에 대해서만 언급해보면, 편집실은 그야말로 전쟁터다. 편집이 픽스되어야 믹싱, CG, DI가 비로소 작업을 할 수 있는 우선권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편집은 현장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들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집실엔- 감독, 조감독, 편집기사 외에도- 항상 영화사 대표와 가끔은 투자자들이 오고 가며, 편집권 투쟁이 벌어진다. 편집술만큼이나 중요한 편집기사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장에서 조감독과 제작실장이 했던 것처럼, 편집기사는 감독과 대표님들(?), 작품성과 대중성을 조율하고 중개하는 뚜마담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편집기사는 컷을 잘 연결하는 것만큼, 사람을 잘 연결한다.

이쯤 펼쳐보고 나니(사실 아직 한참 모자라다), 마지막 질문- 감독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감독은 이 모든 스탭들의 의견과 제언을 듣고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지는 작전과장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언제나 두 얼굴이다(감독이 특수한 스탭인 건 이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영화를 책임진다는 의미에선 고유명사지만, 그 많은 스탭들이 지지고 볶으며 만들어가는 공정을 대변한다는 의미에선 대명사일 뿐이다. 우린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또는 감독 봉준호를 말하지만, 그들도 역시 대명사일 뿐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스탭들의 창조력을 대변하는 대명사. 과연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던 바로 그 스탭이 아니었다면, 구로사와가 구로사와고, 봉준호가 봉준호일까? 만약 우리가 감독 이름으로 한 영화를 대변한다면 그 많고 많은 스탭들을 일일이 명명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 역이 아니다.

얼마 전 영화산업노조에서 발표한 스탭 레벨 분류는- 그 의도가 어찌되었건 간에- 여러 스탭들에게 상처였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출/제작부가 촬영/조명부보다 낮은 레벨로 책정된 노동공학적 어이상실은 둘째치고서라도, 최고의 레벨에 ‘감독급’이라는 추상명사가 올라와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그림이다. 그것은 감독 밑으로 줄을 선 것이 마치 스탭들인 것처럼, 그래서 감독급을 기준으로 고기에 등급을 나누듯 스탭 레벨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임금 교섭을 위한 장치라고 해도, 스탭들의 각 고유한 이름들을 직급의 이름과 잠깐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