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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다시 시작하면 우리 과연 다를까
허지웅(작가) 일러스트레이션 민소원(일러스트레이션) 2015-11-24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반복과 후회의 역사를 깨닫다

<이터널 선샤인>에는 잠언집이 등장한다. 오랜 시간 동안 <이터널 선샤인>은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로 그 잠언집 같은 위력을 발휘해왔다. 수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에 위로받고 희망을 품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연인과 다시 시작한 커플은 몇이나 될까. 아마도 그 선택을 저주하며 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한 연인들의 수와 얼추 비슷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지금은 당신의 모든 게 마음에 들어요”, “지금은 그렇겠죠. 그런데 곧 거슬려할 테고 나는 당신을 지루해할 거예요”, “괜찮아요”, “괜찮아요”로 이어지는 마술같이 낭만적인 화해의 끝에서 나는 늘 당혹스러웠다.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걸까? 저렇게 쉽게?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노릇이다. 그들은 기억을 지웠으니까. 결론은 알고 있지만 그 결론에 이르렀던 모든 괴로움을 잊었으니까. 그래서 실감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장은 괜찮을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안 괜찮은 선택을 한 수많은 이들과는 달리 말이다.

모두가 누군가를 만나고 그중 몇몇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운좋은 누군가들은 정말 만났어야 할 누군가와 만나 다시 없을 기억들을 남긴다. 가장 멋진 것과 가장 창피한 것들을 나눈다. 가장 훌륭한 것과 가장 추한 것을 교환한다. 나는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너는 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우리가 얼마나 어울리는 사람들인지 감탄하고 좋아한다. 타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개그들이 오가고 그들끼리는 킥킥대며 좋아한다. 온전히 둘만이 누릴 수 있는 시간과 감정들이 쌓여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을 믿고, 알고, 만족하고, 사랑한다. 비밀을 공유하고 서로의 비밀이 우리와 우리 밖의 세상 사이에 안전하기 짝이 없는 벽을 쌓아올린다고 생각한다. 벽은 갈수록 두터워져가고 문밖에서 폭탄이 터져도 우리 둘은 안전할 것만 같다. 네 살이 내 살처럼 아프고 내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스스로 어여쁘게 여긴다.

그리고 헤어진다.

그렇게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출근을 하고 브레이크를 누르거나 액셀을 밟거나 좌회전을 하거나 유턴을 하거나 결재를 받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나누거나 소변을 보면서 눈앞에 붙은 ‘좋은 생각’류의 글귀들을 읽는 이 모든 순간들을 지배하는 단 한 가지 생각 말이다. 침대에 누워 그(녀)가 나를 사랑했던 시간들을 기억해내고 사소한 신호들을 되새기고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속았다는 괘씸함과 대체 나는 얼마나 멍청한 것인가라는 자책감과 나와는 달리 그(녀)가 지금 누리고 있을 평안함을 상상하는 괴로움이 어우러져 범벅이 되다보면 뇌가 출렁거리며 조금씩 녹아 흘러내려 눈앞을 캄캄하게 덮어버리는 기분이다. 머리를 세게 흔들어 기합을 넣고 잠에 들 수 있는 최적의 자세를 찾아 숨을 고르고 나면 아까 했던 생각들이 똑같은 과정을 밟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리고 3천 번째 눈앞이 캄캄해지고 나면 창밖으로 동이 트는 걸 발견하게 되겠지.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 화장실로 걸음을 옮겨보지만 소용이 없다. 밤새 녹아내린 뇌가 온몸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것이다.

씨발 대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이별이란.

그럴 때면 <이터널 선샤인>이 떠오를 만하다. 이 빌어먹을 기억을 송두리째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의 지루함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고자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에게 <이터널 선샤인>은 달콤한 가정을 제시한다. 지울 수만 있다면. 심지어 이 영화처럼 그(녀)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항상 궁금했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시제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이터널 선샤인>은 2004년에 나온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그 흔한 휴대폰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게 90년대 초•중반의 풍경이다. 도로 위의 차들. 기억을 지우는 장비들. 컴퓨터, 편지. 전화. 응답기. 전부 옛날 것들이다. 처음에는 그냥 복고풍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반복해서 볼수록 확실해졌다. <이터널 선샤인>이 그리고 있는 풍경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사람의 기준에서 훨씬 이전의 것들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저 이야기가 회상되고 있는 시점, 그러니까 2004년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어떤 모습일까.

찰리 카우프먼의 본래 각본에는 영화의 가장 처음과 마지막 시퀀스에서 좀더 나이든 조엘과 클레멘타인, 그러니까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 화자의 시점에서 그들이 등장한다. 클레멘타인은 방금 기억을 지웠으며 과거에도 이미 여러 번 기억을 지운 이력이 있다. 모두 조엘에 관련해서 말이다.

본래 원안대로였다면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낭만은 덜어지고 판단은 선명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다시 반복하고 싶어 한다. 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만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로서 건재했을 것이라 상상한다. 그러나 이별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방아쇠가 있었던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헤어진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통틀어 확실하게 배우는 것 하나는, 언제나 실수는 반복되고 누구나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 하나 이 반복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모든 것은 점멸하며 사그라든다. 후기 로마가 공화정 시대 로마처럼 눈부셨던가. 한심한 것들은 반복되고 좋은 것들은 기억에만 남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웠기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심한 것들을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지웠다. 그리고 다시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지웠다. 그리고 다시 반복했다.… 하느님 맙소사,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끔찍하다. 대체 왜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것들뿐인가.

그래서. 만약 내게 저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두번 돌아보지 않고 기억을 지울 것이다. 그 모든 게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걸 이미 모두 알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상관없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시 만날 수 있다. 만약 그들이 기억을 모두 지운다면 말이다. 생각이 이 즈음에 이르고 나니 <이터널 선샤인>에 포함되지 않은 원안의 장면들이 크게 상관없어진다. 이 상상력이 허락된다면 우리는 모두 기억을 지우고 그 짧은 사랑을 음주와 주정처럼 반복하는 걸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특별하지 않다. 우리는 한심하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벡의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이 흘러나온다. 그렇다. 모두가 언젠가는 배운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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