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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순례자들의 계절
박수민(영화감독) 2015-12-01

연애와 영화 - 한 남자의 영화 목록과 그 사례를 통한 고찰

<이터널 선샤인>

짧은 가을이 사라져 긴 겨울로 접어드는 이 시기는 추위에 대한 육체의 감각이 마음으로 곧장 이어진다. 고독한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간에 홀로 혹은 둘이서 연애영화를 보기 좋은 때다. <이터널 선샤인>(2004)의 재개봉 흥행이 개봉 성적을 넘어섰다는 소식을 접하니, 누군가가 시기를 읽는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동안 시네마테크에 한두번 걸릴 때면 몇몇 관객이 마치 유적처럼 이 영화를 다시 찾곤 했다. 어떤 영화들은 개인의 유적이 되고, 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유적지가 된다. 이것은 현대 도시에서 우리가 떠날 수 있는 일종의 순례다.

순례자들의 영화에서 열성 팬의 프랜차이즈, 오타쿠의 컬트, 근본주의자의 클래식과 외골수의 외사랑을 받는 외로운 영화들을 빼고 나면 연애영화가 남는다. 극장 안은 대략 이런 모습이다. 자기 인생의 영화라며 당신도 감화, 감동받을 거라 동행에게 말하는 사람의 달뜬 미소와 외딴 자리에 홀로 앉아 침묵하며 그대도 언젠가 혼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러 오리라 마음속으로 예견하는 사람의 묘한 표정. 어떤 연애의 시작과 진행과 종말 이후가 함께 극장에 있다.

장르로서 멜로가 아니라 연애영화라는 이상한 구분을 만든 까닭은, 서로 연애하는 두 사람이 같이 본 영화 중 몇몇 작품은 일반적 영화 경험을 넘어 또다른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영화의 내용이 당시 둘의 상황이나 관계의 양상에 맞아떨어지고, 결국 사람은 떠나고 이후에는 영화만이 남아 각별해진다. 세월이 지나도 영화와 함께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연애의 기억. 이 경우, 연애는 그 영화를 파괴해버린다. ‘연애영화’는 연애에 의해 작품 본연의 본질적 가치보다 더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영화들의 통칭이다.

여기 글을 쓰며 홀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사례를 들기로 한다. 그는 여러 차례 연애를 했고 지난 연애를 몇편의 영화 목록으로 기억한다. 먼저 그가 처음 만났던 여인에 대한 연애영화는 <이터널 선샤인>과 피터 잭슨의 <킹콩>(2005)이다. 그녀는 <킹콩>을 보고 나오던 길에 “나도 저런 사랑 한번 받아봤음 좋겠다”라고 무심한 듯 말했고, 남자는 웃었다. 그는 여자를 보편적인 감정에는 좀 무던한, 특수한 성격의 사람이라 믿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영화가 끝나자 남자는 뜻 모를 감정에 북받쳐 흐르는 눈물을 여자 몰래 훔치다 그녀 역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당시 둘은 지지부진한 관계를 남자가 주장하는 이상한 의리로 지탱하고 있는 상태였다. 오랜 연애의 역사에 남겨진 것은 개똥 같은 기억들뿐이었고, 망한 연애의 기억을 지우겠냐는 (그래봤자 똑같다는) 영화의 화두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남자가 <킹콩>에 대한 여자의 감상을 이해한 것은 그녀의 결단으로 관계를 끝내고 나서도 더 훗날의 일이다. 한국을 떠나기 위해 물품을 정리하던 여자는 처치 곤란한 물건이라며 예전에 남자가 써보냈던 서한들을 그에게 돌려보냈다. 남자는 지극히 냉정한 마음으로, 되돌려 받은 자신의 편지를 손수 잘게 찢었다. 또 몇해가 지나 우연히 케이블로 다시 본 <킹콩>의 한 장면에서야, 남자는 느닷없이 깨달았다. 미녀(나오미 와츠)를 찾아 뉴욕 한복판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던 짐승이 마침내 그녀를 찾아내자 하는 행동은 그저 가만히 여자를 손에 쥔 채, 그녀가 아닌 세상을 보며 자랑스러운 듯 제 가슴을 쿵쿵 두들기는 것이다. 사랑 대신 가짜 의리를 내민 비겁함이 아니라, 진짜 사랑을 쟁취한 수컷의 자신에 대한 떳떳함이 그 장면에 있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짐승. 그래서 결국 숭고하게 죽는 짐승 앞에서, 사랑에게서 도망친 덕에 살아 있는 수컷 인간은 부끄러운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부끄러움보다 외로움을 더 절실히 감각하므로 새로운 연애를 멈추지 못했다. 에릭 로메르의 세계를 살면서 홍상수의 새 영화가 나올 때마다 이별을 요구하고 또 번복하길 반복하던 한 영화학도와의 연애는 칠종칠금(七縱七擒) 끝에 기억에 남을 영화보다는 유의해야 할 감독들의 이름만 남겼다. 남자의 글에 먼저 호감을 표하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났던 어느 소녀는 자기 예술에 눈을 뜨자 우디 앨런 안경을 끼고서 스스로 영화를 찍고자 휙 떠나버렸다. <시네도키, 뉴욕>(2007)을 같이 본 후 다시 홀로 남겨진 남자는 “I’m Just a Little Person”이라는 가사를 절절하게 읊으며 내 연애가 영화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설마 영화가 내 연애를 파괴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찰리 카우프먼이 각본을 쓰거나 존 브리옹이 음악을 맡은 영화는 가슴을 무너트릴 가능성이 크니까 조심하면서.

물론 연애영화에 서글픈 경우만 있는 건 아니다. 좋았던 한때를 추억하게 하는 것도 있다. 이 남자의 가장 최근이자 최후의 연애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도둑맞은 키스>(1968)는 시네마테크 밖으로 나온 두 연인이 내내 행복한 기분으로 종로 거리를 거닐게 했던 영화다. 하지만 둘의 추억은 짧고 혼자의 현실은 길다. 연인과 순간을 공유한 죄로 불멸이 되고 마는 연애영화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오랜 처벌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랑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둘은 함께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엔딩? 마지막 연애에서 생전 처음 결혼을 생각한 남자는 궁극의 연애영화를 만나고야 만다.

데릭 시엔프랜스의 <블루 발렌타인>(2010)은 관계가 어떻게 일상의 삶에 의해 붕괴하는지를 그린다. 두 사람이 만나 기적처럼 사랑에 빠지지만 행복의 환상은 현실의 시간에 착실히 깎여나간다. 어떤 관계도 서로를 동등하게 사랑할 순 없다. 한쪽의 헌신이 있다면 받는 쪽의 죄의식도 있다. 소통이 멈추자 내부는 곪는다. 정체된 관계 속 슬그머니 들어서는 다른 선택의 가능성.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문신을 하고 있던 딘(라이언 고슬링)은 신디(미셸 윌리엄스)를 떠나고, 아이는 엄마에게 아빠가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이 엔딩을 채우는 것은 놀랍게도, 화려한 불꽃놀이다. 극장에서 연인과 함께 펑펑 눈물을 쏟았던 남자는 자신의 삶에서도 이 불꽃놀이가 끝날 것임을 직감했다.

남자의 영화 목록은 모든 연애가 망한 이후의 성찰에 도달한다. 목록의 마지막은 이누도 잇신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이다. 이 영화에서도 두 연인의 이별 직전 종착지는 <블루 발렌타인>과 같이 인공적으로 꾸민 모텔이다. 험한 세상 위에 둘만의 왕국을 능히 건설하리라 믿는, 연애의 환상에 대한 지독한 진담. 중요한 것은 의지할 타자로서의 둘이 아니라 먼저 홀로 굳건한 나 자신이다. 쓸쓸한 모텔 방처럼 텅 빈 집 안, 이제 소파 위에 홀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남자는 영화를 보다 조용히 울면서 깨닫는다. 지금까지 츠네오라 믿었던 자신이 어쩌면 조제일 수도 있다는 것. 연애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조제이며 츠네오이며 또 카나에라는 것. 떠난 사람을 애써 용서했듯이, 그만 나 자신을 용서해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것.

지금까지 결코 필자가 아닐 이 남자의 사례를 통해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연애영화의 교훈은, 둘이서 보는 영화도 결국 혼자 보는 영화가 되므로 애초에 영화는 혼자 보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혼자 하는 영화 감상은 작품 자체의 본질을 여간해선 흐리지 않는다. 플롯과 서사의 개연성은 물론, 배우의 연기와 연출과 미장센의 디테일도 눈에 더 잘 들어온다. 정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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