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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누가 죽음을 숭고하다 하였나

<올 댓 재즈>, 밥 포시 그리고 랠프 번스

<올 댓 재즈>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욕망 때문이든, 아니면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공포 때문이든 인간은 오래전부터 죽음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인간이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심지어 어느 지점부터 인간은 죽음을 동경했다. 고대 그리스의 염세주의에서부터 근대의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사의 찬미’는 삶의 사악함, 허무함은 물론이고 초월, 속죄, 구원, 의지의 순결 등 모든 것을 담아왔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죽음을 그린 수많은 예술들 가운데서 나는 말러의 교향곡 ‘대지의 노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작품의 제목은 ‘현세의 노래’라고 불려야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이 곡의 독일어 제목인 ‘Das Lied vonder Erde’에서 ‘에르데’(Erde)는 땅, 지구라는 뜻도 있지만 현세, 이승이라는 뜻도 있다). 왜냐하면 전체 6악장의 이 교향곡에서 마지막 악장이자, 연주 시간 약 30분에 이르면서 전체 작품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아다지오 악장 <고별>은 바로 현세와의 고별, 죽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당 시대의 두 시인인 맹호연과 왕유의 시를 바탕으로 가사가 붙여진 이 악장은 많은 오페라에서처럼 극적인 죽음을 그리고 있지 않다. 그저 이 세상을 살다가 회한을 남긴 채 서산에 걸린 저녁노을처럼 쓸쓸히 저물어가는 죽음이다. <고별>의 가사 중에서 말러가 직접 쓴 마지막 부분은 현세를 ‘타향’으로, 이제 곧 돌아갈 이승을 ‘고향’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고향으로 떠돈다. 나의 안식처로. 더이상 타향을 떠돌지 않으리. 마음은 고요히 그때를 기다린다.

사랑하는 대지는 봄에 이곳저곳 꽃을 피우며 새로이 푸르러지고 어디서나, 영원히 타향은 푸르고 밝게 빛나리라. 영원히… 영원히….”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두가 경험하는 죽음은 사실 타인의 죽음이다. 모두가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기록한 사람은, 저승사자를 따라가 염라대왕을 만나고 때가 이르다 해 다시 되돌아온 <전설의 고향>에 등장할 법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죽음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죽음은 육체의 쇠락이고 점점 꺼져가는 의식의 소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남루하고 보잘것없다. 아무것도 살필 수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다. 말러는 “영원히 타향은 푸르고 밝게 빛나리라”라고 했지만 실제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 앞의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의 의식은 꺼져가고 사람들은 그를 더이상 사람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임종을 바로 앞둔 발자크의 모습을 생생히 기록해두었다. 위고가 늦은 밤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미 임종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안 발자크의 부인 한스카는 자리를 비웠고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하인, 하녀들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곪아 들어간 발자크의 육체는 방 안 가득 악취를 뿜었으며 검푸른 피부에 수염을 깎지 않은 그는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만 낼 뿐 주변의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위고가 발자크의 손을 잡았을 때 아무런 힘이 없는 그의 손은 축축한 땀으로 젖어 있었을 뿐이다. 보라. 이것이 누구도 예외 없이 맞이할 죽음의 모습이다.

얄궂게도 전남편이 죽기만을 기다렸던 8년을 포함해 무려 17년의 기다림과 교제 끝에 한스카 부인과 결혼한 발자크는 결혼한 그해(51살)에 결국 죽음을 맞이했고, 심지어 그가 숨을 거둘 때 한스카는 새로운 애인이었던 화가 장 지구와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발자크의 죽음을 알리려고 하인들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자 잠에서 깨어난 한스카가 투덜거리면서 머리를 매만지고 옷을 주워입고 사람들 앞에서 애써 슬픈 척 연기하는 모습을 장 지구는 상세히 기록해두었다(<죽음을 그리다>,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주영 옮김).

보라. 이것이 죽음의 모습이다. 죽어가는 자의 의식은 희미해지고 곁의 사람들은 그를 더이상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처럼 아내의 임종이 임박한 상황에서 남편은 단돈 3달러를 벌려고 왕복 사흘이 걸리는 곳에 목재를 운반하라며 두 아들을 보내고,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 어린 막내는 관 속에 누워 있는 엄마의 시신이 숨을 쉬라고 송곳으로 관 뚜껑을 뚫다가 엄마의 얼굴에 송곳 자국을 낸다. 이미 부패해버린 시신을 끌고 가족은 멀리 떨어진 장지로 여행을 떠나지만 첫째 아들은 다리가 부러지고 여행의 무모함을 안 둘째 아들은 엄마의 관이 안치되었던 헛간에 불을 질렀다가 미쳐버렸으며 임신을 숨기고 있던 딸은 낙태 약을 구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그리고 이들을 이끌고 간 아버지는 읍내에 들러 그렇게 원하던 의치를 새로 해넣고 그동안 몰래 사귀던 여인을 새엄마라고 아이들에게 소개한다. 이것이 죽음의 모습이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혹시 주마등처럼이나마 눈앞에 스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장엄한 교향곡이 아니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카바레 쇼 같은 것일 거다. 더욱이 망자 자신의 악행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냉소를 받을 때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은 웅장한 말러의 교향곡일 리가 만무하다.

<올 댓 재즈>

삶의 대가로서의 어떤 죽음

안무가이자 뮤지컬 감독 밥 포시의 영화 <올 댓 재즈>(1979)는 자전적인 영화이자 죽음에 관한 영화다. 포시는 1975년 뮤지컬 <시카고>와 영화 <레니>를 동시에 연출한 적이 있는데 영화 속 주인공이자 안무가이며 뮤지컬 감독이고 영화감독인 조 기디언(로이 샤이더) 역시 신작 뮤지컬 한편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영화 <스탠드 업>을 편집하느라 늘 과중한 노동에 시달린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각성제 덱서드린을 입에 넣고 샤워를 하는 순간부터 담배는 그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조는 기회가 될 때마다 새로운 여성과의 섹스에 집착하지만 그에게는 동거하고 있는 애인이자 뮤지컬 배우인 케이티 재거(앤 라인킹), 역시 뮤지컬 배우인 전처 오드리 패리스(릴런드 팔머), 뮤지컬 배우 지망생인 어린 딸 미셸(에르제벳 푈디)이 있다. 이 가족 관계 역시 포시의 실제 상황으로, 그는 70년대에 세 번째 부인이자 뮤지컬 배우인 그웬버던과 이혼했고 그들 사이에는 훗날 뮤지컬 배우가 된 니콜이 있었으며 포시는 더이상 결혼하지 않고 새로운 여성(들)과 동거했다.

포시는 1961년 무대 리허설 도중 뇌전증(간질)으로 쓰러진 적이 있다. 이때 충격으로 그에게 늘 들러붙은 공포감은 <올 댓 재즈>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의 조는 쉴 새 없는 작업과 줄담배로 갑자기 심장에 이상증세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작 뮤지컬의 대본 연습이 시작되는 날 그의 귀에는 배우들의 대사가 전혀 들리지 않고 오로지 배우들의 파안대소하는 표정만이 묵음 속에 자신에 대한 조롱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미 죽음의 전주곡이 시작된 것이다. 조는 급히 입원하고 이로 인해 뮤지컬 개막은 4개월 뒤로 연기되었으며, 영화 <스탠드 업>은 그가 병원에 있는 도중에 개봉했다.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영화 초반부터 불쑥불쑥 삽입되었던 몇몇 기이한 장면들이 완전한 정체를 드러낸다. 검은 천막이 드리워져 있고 분장실 조명과도 같은 전구들이 켜 있으며 무대, 분장실, 주방 등이 한데 섞여 있는 알 수 없는 공간. 조는 자신의 여성 편력, 예술가로서의 자질 부족 등 마음속 깊이 담아둔 이야기를 하얀 옷을 입은 한 여성에게 고해성사하듯 이야기한다. 물론 그 여성은 죽음의 천사, 엔젤리크(제시카 랭)다. 병원에서 조의 건강은 다소 호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내려온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방문하는 방문객과 파티를 열고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심지어 성관계를 갖는다. 그를 찾아온 영화 제작자는 <스탠드 업>의 흥행 성공의 소식을 전한다. 조는 흡족한 마음에 TV를 켜고 <스탠드 업>에 관한 한 평론가의 평을 지켜본다. 하지만 레슬리 페리란 이름으로 등장하면서 다분히 폴린 케일을 연상시키는 이 여성 평론가는 <스탠드 업>에 혹평을 쏟아부으며 풍선 네개 만점에 반개밖에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조는 예술가인 것이 확실하다. 의사들의 엄중경고도 무시하던 그가 평론가의 혹평을 이마에 땀을 흘리며 지켜보다가 힘없이 침대에 눕게 되니 말이다. 결국 꽉 막힌 대동맥 두개를 뚫기 위한 심장수술이 시작되고 사경을 헤매는 조의 싸구려 뮤지컬 <병원 환각>이 시작된다.

이 대목에서부터 이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은 랠프 번스의 기지가 돋보인다. 스탠 게츠의 색소폰 연주로 전설이 된 명곡 <초가을>(Early Autumn)의 작곡가이자 우디 허먼, 레이 찰스의 빅밴드 편곡을 통해 재즈계에서 일급 편곡자로 인정을 받아온 그는 1960년부터 포시의 뮤지컬 음악을 맡았고 70년대부터는 <바나나 공화국>(우디 앨런), <뉴욕 뉴욕>(마틴 스코시즈)의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전방위로 활동한 대표적인 재즈 편곡자다(그 점에서 그는 퀸시 존스, 랄로 시프린과 견줄 만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죽어가는 자의 죄의식을 희극적으로 표현하려는 포시의 연출 의도에 따라 그는 19세기 말 미국 유랑 악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보드빌 쇼의 사운드를 빌려온다.

자, 이제 망자가 연출하는 마지막 쇼를 함께 감상해보자.

1막 <당신이 떠난 후에>(After You’ve Gone). 주연 오드리, 조연 케이티와 미셸. 전처, 애인, 딸이 함께 나와 과장된 몸짓과 우스꽝스런 목소리로 춤과 노래를 들려준다. 모던재즈 팬들은 이 친숙한 스탠더드 넘버가 이토록 희극적으로 개작된 경우를 좀처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둥이 남편에게 전처는 조롱하듯 노래한다.

“잊지 말아요/ 그때가 올 거예요/ 잊지 말아요/ 그때가 올 거예요/ 언젠가 당신이 외로워질 때면/ 당신의 마음(심장)은 나처럼 찢어지고/ 오직 나만을 그리워할 거예요/ 당신이 멀리 떠난 후에.”

2막 <변해야 해요>(There’ll Be Some Change Made). 주연 케이티, 조연 오드리와 미셸.

“막무가내 당신 스타일을 바꾸는 게 좋을걸요/ 백발에 늙은 당신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멈추세요/ 변하세요/ 멈추세요/ 변하세요/ 당신이 사는 방식을/ 오늘 당장/ 제발.”

3막 <지금 누가 슬픈 거죠?>(Who’s Sorry Now). 20년대 카바레풍의 복장을 한 여성 무용수 열명이 등장한다. 그들은 조를 거쳐간 수많은 여인들이다. “지금 누가 슬픈 거죠?/ 지금 누가 슬픈 거죠?/ 누구 마음(심장)이 아프냐고요?/ 모든 약속을 다 깨놓고/ 누가 슬프고 우울한가요/ 당신 때문에 울었던 우리들처럼/ 지금은 누가 울고 있죠?/ 결국에는/ 당신의 친구들처럼/ 우리도 어떻게든 당신에게 경고했건만/ 당신은 당신 방식대로 살았으니/ 그 값을 지불해야 해요/ 당신이 지금 슬프다니 그거 잘됐군요.”

4막 <얼마 후면>(Some of These Days). 주연 미셸, 조연 오드리와 케이티.

“얼마 후면/ 내가 그리울 거예요, 아빠/ 얼마 후면/ 외로울 거예요, 아빠/ 내가 끌어안던 것이/ 내가 뽀뽀해주던 것이/ 모두 그리울 거예요, 아빠/ 아빠가 멀리 떠나면/ 나도 외로울 거예요/ 오로지 아빠 때문이죠/ 아시잖아요 아빠/ 아빤 아빠 맘대로 사신 거(엄청났지!)/ 아빠가 떠나시면/ 내 꿈을 엄청, 엄청, 엄청, 꾸실걸요?/ 당신의 어리고 사랑스런 아이를 너무 너무 너무 그리워하실 거라고요.”

하얀 캐딜락 영구차에 올라탄 세 여인은 손을 흔들며 멀리 떠나간다. 이때 산소호흡기를 입에 물고 침대에 누워 있는 조는 나지막이 “안 돼, 안 돼”를 읊조린다. 이때 이 쇼를 촬영하고 있던 또 다른 조가 누워 있는 조에게 말한다. “조용히 해. 자넨 여기에서 대사가 없어.”

하지만 이제 마지막 피날레 쇼가 남아 있다. 이제 그는 무대를 연출하지 않고 직접 무대에 올라와 있다. 객석에는 그의 가족을 비롯한 뮤지컬 단원들, 제작자, 의사들, 심지어 그가 어린 시절 탭댄서로 데뷔했을 때 나이트클럽 쇼에서 함께 일했던 스트립 걸들이 상반신을 노출한 채 앉아 있다. 무대에서는 그가 늘 TV에서 보던 그의 동료 오코너 플러드(벤 버린)가 노래를 부른다. 에벌리 브러더스가 불렀던 <바이 바이 러브>(Bye bye Love). 하지만 이 사랑의 이별 노래는 삶과의 이별 노래로 바뀌었다. 가사에서 러브(love)는 라이프(life)로, 크라이(cry)는 다이(die)로 바뀐 것이다.

“삶이여 안녕/ 행복이여 안녕/ 반가워 외로움이여/ 난 지금 죽어가고 있어/ 안녕 내 사랑/ 안녕 아름다운 그대/ 반가워 공허함이여/ 난 지금 죽어가고 있어.” 노래가 끝나자 조는 객석을 돌며 생전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저 멀리 서 있는 엔젤리크를 향해, 어둠 속을 향해 미끄러지듯 빨려간다. 조가 환상의 마지막 쇼를 보고 있을 때 현실의 뮤지컬 제작진은 테이블에 앉아 계산기를 두드린다. 그의 건강이 이미 좋지 않자 그들은 보험에 들었고 조의 죽음으로 뮤지컬이 무대에 오르지 못할 때 오히려 보험금을 타게 돼 그들은 대략 52만달러의 흑자를 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코 엄숙하다고 할 수 없는 난삽하고 상투적인 마지막 쇼가 막을 내린다. 대형 비닐 백 위에 누운 조의 시신 위로 가차 없이 지퍼가 올라간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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