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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역사는 더디게 온다 이름 모를 희생자들과 함께

<벅 앤 프리처> 그리고 마디그라 인디언들

<벅 앤 프리처>

역사는 징그럽다. 끔찍하게 징글징글하다. 수많은 피를 대지에 뿌리고 그 값으로 한발을 앞으로 내디뎠나 하면 이내 반동의 힘은 역사를 뒷걸음치게 만든다. 수구의 교활함은 사람들을 갈라놓고 서로 싸우게 만들며 자신들의 문제를 내팽개쳐놓고 무관심하게 만든다. 그래서 역사는 온통 멍투성이다. 아주 더디게, 징그럽게 더디게, 한발씩 내디딜 뿐이다.

내가 겪은 역사만 해도 그렇다. 내가 태어났을 때 세상은 이미 거대한 군사 훈련소 같은 곳이었다. 그 군사 훈련소는 내 유소년기 13년 내내 콘크리트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콘크리트에 균열이 간 것은 내가 열세살 되던 해 가을이었고, 그로부터 2년 뒤 내 나이 열다섯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핏값으로 시민들의 손에 기본적인 참정권이 주어지기까지는 7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그 후에도 역사는 또 한번 우리를 배반했고 그 참정권으로 정권을 교체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또 필요했다. 내 나이 서른두살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수구의 반격은 다른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뒤, 역사는 결국 또다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사이 돈의 포로가 되었고 세상에 무관심해졌으며 세대와 지역으로 찢어져 자신의 처지도 모른 채 서로 할퀴고 물어뜯어야 했다. 그렇게 8년이 흘렀다. 난 어느새 쉰한살이 되었다.

엉금엉금 천천히 기어가는 역사

이것은 비단 우리 역사만이 아니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에 처음 출마한 것은 1952년, 그의 나이 44살 때였다. 하지만 세번의 고배 끝에 그가 대통령에 오른 것은 18년 뒤인 1970년, 62살이 되어서였다. 역사가 간신히 한발을 내디딘 것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수구의 반격은 본격화되었다. 기업의 의도적인 폐업과 물류봉쇄, 미국의 경제제재 등으로 칠레는 생필품 부족, 경기 침체로 신음했고 중산층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에 있었던 총선에서 민중연합이 국민들의 변함없는 지지로 승리를 거두자 더이상 참지 못한 피노체트 군부는 탱크를 앞세워 대통령 궁을 공격해 아옌데를 사살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했다. 그리고 그 권력은 나의 유소년 시절의 ‘군사 훈련소’와 마찬가지로 무려 17년간 지속되었다. 1970년 아옌데 정부 출범부터 1973년 군부 쿠데타까지를 다룬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감독 엘비오 소토, 1975)는, 그래서 30년 전 VHS테이프로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눈물짓게 한다. 역사는 피떡이 되어 엉금엉금 천천히 기어갈 뿐이다.

신대륙 발견 이후로 350년 이상 지속된 아프리카인에 대한 노예제도는 1850년대에 이르러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미 북부의 몇몇 주가 노예제를 폐지했고 같은 정책을 공약한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늘 역사는 진보가 이뤄진 것 같은 그 순간부터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한다. 노예제 폐지를 반대하는 남부 11개주가 연이어 미 연방을 탈퇴하자 연방제를 유지하려는 북부는 남부를 상대로 이듬해부터 4년 동안의 긴 내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1865년 북부의 승리로 미국에서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일 뿐이다. 350년 이상 계속된 악습의 관성은 만만치가 않다. 이때부터 역사는 또 다른 피를 흘린다. 백인과 유색인 사이의 법에 의한 고약한 분리정책은 ‘양반’에 속한다(유색인은 백인들이 이용하는 학교, 병원, 식당, 화장실, 숙박업소에 출입할 수 없고 극장, 버스에서도 그 좌석은 분리되어 있다). 흑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폭력, 린치가 이때부터 만연했고 KKK단 같은 불법 폭력단체에 대해 주정부는 물론이고 연방정부에서도 수수방관이었다.

흑인판 ‘출애굽기’

영화 <벅 앤 프리처>(감독 시드니 포이티어, 1972)는 노예제가 끝난 바로 그 무렵의 이야기다. 자유인이 된 흑인들은 약속되었던 토지는 고사하고 백인 농장의 피고용인으로 일을 했지만 임금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폭력에 시달린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미지의 거친 서부로 그들의 땅을 찾아 대이동을 시작한다. 그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엑소더스’이자 알려져 있지 않은 서부 개척사였다(이를 근거로 이미 1910년대부터 시드니 베셰, 젤리 롤 모턴, 키드 오리, 조 다렌스버그를 비롯한 뉴올리언스의 재즈 연주자들이 서부 시장을 개척했다는 기록들은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들이 서부로 향하는 장면에서 소니 테리(하모니카)와 브라우니 맥기(기타)의 쓸쓸하면서도 불길한 울림은 황량한 들판을 가로지른다. 음악감독은 베니 카터. 흑인들의 서부로 가는 길을 백인들이 그냥 놔둘 리 없다. 노동력 확보를 위해 남부 농장주들은 인간 사냥꾼들을 고용해 흑인들을 루이지애나주 농장으로 강제로 다시 끌고 가려 한다. 그리고 서부의 지리를 잘 알기에 한 촌락의 흑인들을 콜로라도로 인도하던 벅(시드니 포이티어)을 현상수배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흑인판 ‘출애굽기’며 전형적인 선악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감독 시드니 포이티어의 시각이 놀라운 것은 그가 피해자 흑인들의 추함을 결코 감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에 서부로 향하는 긴 행렬 속에서 흑인 남성이 흑인 여성을 강간하려는 장면은 언뜻 사소한 것 같지만 간과할 수 없는 일례였다. 영화 전반. 무리보다 며칠 먼저 행로를 답사하던 벅과 전도사(해리 벨라폰테)는 필연적으로 지날 수밖에 없는 인디언 구역에 들어가 인디언 추장과 협상을 한다. 5일 동안 인디언 구역으로 마차가 지나가고 성인 한명당 통행료 8달러, 어린이 무료, 그 기간에 들소 두 마리를 잡아 식량으로 쓸 수 있다는 조건에 합의한다. 하지만 영화 종반 흑인들이 인디언 지역에 근접했을 때 벅과 전도사는 다시 한번 추장을 만난다. 백인 사냥꾼들이 바로 뒤에 쫓아와 말과 식량 그리고 총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디언 추장은 다른 것은 몰라도 총은 안 된다고 거절한다. 골치 아픈 싸움에 말려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벅은 당신의 적이 곧 우리의 적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추장은 대답한다. “당신 흑인들도 우리를 죽였소.” 실제로 남북전쟁 후 남부 흑인부대인 일명 ‘버펄로 솔저스’는 서부 인디언 토벌에 투입되었다. 그 부대의 하사였던 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마지막에 벅과 전도사가 위기에 몰렸을 때 멀리서 싸움을 관망하던 인디언들은 백인 사냥꾼들에게 결정적인 한방을 쏨으로써 흑인들의 여정을 돕는다. 그 도움으로 흑인들은 콜로라도의 평온한 들판에 도착한다. 그들 앞에는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인종차별의 긴 시간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그 순간 역사는 한 걸음 앞으로 자신의 발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가해자들을 도운 이름 모를 인디언들의 희생이 함께하고 있다. 19세기 말엽부터 현재까지 뉴올리언스의 마디그라 축제에서는 흑인들이 인디언 복장을 하고 행렬을 하는 오랜 전통이 있는데, 그 연원에는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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