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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의 덕통사고] 따뜻한 간지러움
송경원 2016-05-19

<룸> <트럼보> <브루클린> 스크린 틈새로 비친 봄볕 쬐는 나날

<브루클린>

가깝다는 이유로 괜히 사랑스러워지는 것들이 있다. <브루클린>을 보고 극장 밖을 나서던 날, 문득 배가 고파졌다. 극장 주변이야 번화가라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도 몇 군데 있었지만 굳이 동네 근처 시장골목 백반집을 찾아갔다. 조금 과한 양념과 조미료로 기억되는 대수로울 것 없는 가게인데 꽤 자주 찾는 편이다. 크고 작은 핑계가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가까워서다. 때로 애정은 물리적인 거리에 비례한다. 가깝다는 이유로 괜히 살갑게 느껴지고 눈에서 멀어지면 어여쁘던 것들도 점차 마음이 식는다. 한참을 발품 팔아 찾아간 맛집보다 이젠 조미료 양까지 인이 박인 동네 식당이 더 정겨울 때가 있다. 얼른 배를 채우고 집에 가서 침대에 몸을 던지도록 허락하는 그 거리가 매번 고맙다.

<브루클린>의 마지막, 에일리스(시얼샤 로넌)가 배관공 토니(에머리 코언)의 가게 앞을 찾아가 그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두 사람을 따라 미소 지었다. 앞으로 두 사람에게 펼쳐질 운명이 마냥 낙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안락한 고향에서처럼 보장된 미래는 없다. 하지만 그날 에일리스를 비춘 화사한 햇살, 그 따사로운 순간을 기억한다면 갓 걸음을 뗀 연인들도 브루클린을 새로운 고향으로 넉넉히 품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어졌다. 영화를 본 후 갑작스레 허기에 시달린 건 아마도 그 순간, 골목길 한구석에서 나른하게 쬐던 봄볕의 간지러움이 기억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따뜻함이란 약간의 허기를 동반한, 하굣길 차마 들어가보지 못했던 낯선 골목길을 바라보던 두근거림 사이를 맴도는 감정이다. 감정을 나타내는 모호한 단어는 많지만 따뜻함 내지 온기처럼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체험에 기댄 표현도 드문 것 같다. 따뜻함은 지금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방향의 단어다. 따뜻해지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의지의 말이라 해도 좋겠다. 불안을 걷어내고 편안한 것들을 발견하는 과정에 온몸에 스며들 온기, ‘따뜻함’! 이 짧은 울림 아래 뒤엉킨 두려움과 기대, 괴로움과 행복을 풀어헤치다 보면 끝끝내 한줌 햇볕을 향해 나아가려는 꿈틀거림의 흔적을 발견한다.

<룸>

최근 몇몇 외화들을 보며 따뜻함의 의미를 다시 곱씹는 중이다. 다루기 난망한 소재들을 정면으로 마주 하면서도 온기를 머금은 시선을 잃지 않는 영화들이 연이어 눈에 띈다. <브루클린>도 그중 하나다. 그간 이민자를 다룬 영화들은 주로 그들의 고난과 사회의 어둠에 카메라를 비춰왔다. 보호 장치 없는 야생의 욕망에 던져진 채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해야 했던 이민자의 드라마는 사회의 부조리나 인간의 본성을 비추는 거울 노릇을 했다. 아름다운 꽃은 시궁창에서 핀다는 믿음으로 인물을 점점 더 가혹한 곳으로 몰아간 영화들도 적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기억의 창고를 더듬어보건대 <브루클린>은 평범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시선으로 내려와 온전히 여성의 시선으로 주변을 담은 첫 번째 영화가 아닌가 싶다. 물론 에일리스가 처한 상황이 마냥 쉽고 낙관적이라는 건 아니다. 괴로움이란 이기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주관적이고, 기본적으로 거리와 밀접한 감정이라 저 멀리 전쟁의 포화보다 당장 텅 빈 방이 주는 공허가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브루클린>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할 법한 허전한 순간들을 담담하게 모아 전한다. 이를테면 의례적인 인사 외엔 하루에 한마디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 에일리스가 늦은 밤 시간을 쪼개 이역만리 언니에게 편지를 쓰는 심정은 퇴근 후 텅 빈 방의 공기를 닮았다. 낯설고 두렵다는 추상적인 감정에 피와 살이 돌게 하는 건 이처럼 자잘하고 보잘것없는 시간들이다.

스크린에 눈을 맞추는 내내 따뜻한 물밑에 잠긴 것 같은 편안함을 주는 영화는 또 있다. 납치 감금을 소재로 한 <>, 비운의 할리우드 작가의 삶을 다룬 <트럼보>를 보며 기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소재도 방식도 전혀 다른 영화들이었지만 한결같이 수면 아래 흐르는 따뜻한 물줄기에 발을 담근 기분이 들었다. 자극적이라고 해도 좋을 소재를 다룬 이 영화들이 이토록 온기를 품을 수 있었던 건 어떤 인력이 작동한 걸까. 아마도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보면 할리우드영화의 어떤 경향이나 무의식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거기까지 촉수를 뻗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감지되는 건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려는 움직임, 운동, 혹은 온도 차다. 이들 영화에서 봄날의 따스함이 느껴진다면 그건 차가운 현실을 버티고 선 인물들이 바라보는 방향, 그러니까 의지의 문제다. (물론 이건 인물의 의지라기보다는 카메라의 의지를 말한다.) 일련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차분히 내려다본 후 더 나은 상태로 이동하려는 과정에 있다. <>에서 납치되어 강제로 아이까지 낳은 조이(브리 라슨)는 자신의 불행을 연민하기 전에 아들 잭(제이콥 트렘블레이)의 기분을 먼저 염려한다. 가족을 위해 생계형 대필작가를 자처한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턴)가 끝내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건 (물론 타고난 천성도 한몫했겠지만)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오리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의 밝음은 짙은 어둠을 두르고 있기에 더 빛난다. 영화가 품은 한줌 온기는 막연한 낙관과 낭만의 따스함이 아니라 오늘을 견디게 하는 절박한 버팀목인 셈이다.

<트럼보>

낯선 풍경이 내 안에 녹아내리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과 소소한 사연들이 필요하다. 최근 할리우드영화들에서 발견한 따스함에서 그 여유를 발견한다. <> <트럼보> 그리고 <브루클린>은 한겨울 살얼음을 녹이는 봄볕을 닮았다. 그건 구체적인 에피소드 하나하나로 설명되기보다는 좀더 따뜻한 상태로 나아가려는 일련의 태도로 다가온다. 내 기억 속 봄볕의 따스함은 아직은 약간 쌀랑한 골목길 바람도 포함한 체험이다. 그 쌀쌀한 공기와 부드럽게 등을 떠미는 햇살이 동시에 느껴질 때 비로소 따스함을 말할 수 있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한줌 온기를 보듬을 줄 아는 이 영화들을 보며 의외의 순간 뜻밖의 선물 같은 봄볕을 만끽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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