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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향 감독이 김을분 할머니께
2002-03-29

“할머니, 그냥 살아만 있어”

“아이고, 감독 선상 아니신가. 안녕하세요-?” 내가 전화할 때마다 할머닌 이렇게 받으신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달라고 부탁드려도 언제나 이러신다. 요즘같이 휴대폰이 판을 치는 세상인데도 집 전화번호만 달랑 갖고 계신 할머니께 전화드릴 땐 그 어떤 전화보다도 마음이 놓인다. 분명히 할머니가 내 전화를 받으실 거라는 것, 좀 오래 울리면 혹시 할머니가 방 밖에서 벨 소리를 듣고 급히 오시느라 넘어지시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지만 바로 이때 할머니는 그 정다운 목소리로 나를 반기신다. 어떨 땐 아침에도, 오후에도 안 받으실 때가 있다. 점점 걱정이 된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선 계속 안심하라고 무언가가 나를 다독인다. 저녁 나절, 통화가 되고 나면 난 괜히 투정을 부린다. 그럼 할머니는 당신의 잘못도 아닌데 막 미안해하신다. 하루종일 밭에 나가랴, 빨래터에 가랴, 또 마실도 다니랴 얼마나 바쁘셨을까만 난 내가 보고 싶을 때 할머니가 집에 안 계셨단 이유만으로 섭섭해하고, 할머니는 그런 일방적인 요구를 떠맡으시며 전화 걸어 준 나한테 항상 고마워하신다.

전화 용건은 언제나 비슷하다. 그래도 지겹지 않다. 내용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전화한다. 어떨 땐 할머니도 내가 보고 싶다며 전화하신다. 할머니의 첫인사는 한결같다. 지금 바쁘지…. 언제나 상대를 배려하는 할머니의 마음에 울컥 하다가도, 안 바쁜데도 찾아뵙지 않는 내 자신이 싫어져서 목소리가 기어든다. 할머니는 내 전화가 반갑다고 하면서도 끊을 궁리만 하신다. 바쁜 사람한테 폐 될까봐서란다.

할머니, 오늘이 우리가 만난 지 일년이 되는 날이예요. 어제, 극장에서 할머니께 전화드렸죠?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영화를 좋아하고 기뻐해 주니까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서 전화했어요. 할머니는 지금 뭐하고 계실까?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는데 몸은 괜찮으신지 걱정돼요. 할머니, 저한테 섭섭한 것 많죠? 할머니가 서울에 계실 때도 몇번 안 찾아뵙고…. 하지만 할머니, 정말이야. 할머니 생각 안 하는 날 단 하루도 없어요. 그냥 내 옆방에 할머니가 계시는 것 같아서, 항상 내가 보고 싶어할 땐 바로 옆에 와 주실 것 같아서 오히려 할머니한테 소홀했던 것 같아. 지난 번, 첫 시사회 때 할머니가 마을 주민들이랑 시골로 내려가신다고 해서 내가 막 화내고 울었잖아. 난 그날 할머니가 내려가시는 줄 몰랐거든. 서울에 계실 때도 거의 안 찾아뵌 내가 할머니 시골 가신다고 끌어안고 울 자격이 없는 건 알지만 그때는 눈물이 솟구쳤어. 왜 진작 더 잘해드리지 않았나 하는 후회감에, 또 할머니가 이제 멀리 계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싫은 거야. 할머니가 우리에게 원하시는 건 단 하나인데, 가끔이라도 얼굴 보는 건데, 그걸 너무도 잘 알면서 해 드리지 않았다는 게 너무 죄송스러웠어.

할머니랑 만나면 너무 좋은데 헤어질 때가 너무 힘들어. 촬영 때 매일매일 보면서도 헤어질 땐 왜 그리 아쉽던지…. 할머닌 우리가 길 어귀로 사라져 한참을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시죠? 그 힘든 허리를 펴시고…. 내가 항상 먼저 들어가시라고 보채는 이유는 깜깜한 밤에 작은 전등불을 등 뒤로 받으며 힘들게 서 계시는 할머니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파서였어. 촬영을 끝내고 서울로 오는 날, 할머니랑 먹던 점심… 지금도 안 잊혀. 난 한 가지 생각뿐이었어. 어떻게 울지 않고 헤어질 수 있을까…. 울면 너무 많이 울 것 같은데…. 할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다 말고 내가 뒷간에 갔던 것 기억해? 눈물이 쏟아져서 도망갔어. 혼자 실컷 울고 왔는데, 남은 눈물 없게 다 울었는데 할머니 얼굴 보니까 다 소용없더라. 할머닌 내가 울면 할머니도 괴롭다고, 힘들다고 그러면서 끌어안은 내 등을 토닥이며 결국 할머니도 울었지…. 할머니, 작년에 이 영화 찍으면서 나 무척 힘들었어. 그런데 그때마다 무슨 생각하면서 다시 힘냈는 줄 알아? 할머니가 했던 말. 내 평생 올해처럼 행복했던 때가 없어…. 할머니, 난 할머니한테 소망이 딱 하나 있어. 그냥 오래 살아.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오래 살아만 있어, 응? 앞으로도 난 할머니 보고 싶다고만 하고 역시 잘 안 찾아뵙고, 할머니 섭섭하게 많이 할 거야. 그래도, 할머니, 믿어줘. 할머니가 계시다는 이유만으로, 안 돌아가시고 우리 곁에 살아 계시다는 이유만으로도 얼마나 우리가 큰 위안과 힘을 얻는지…. 할머니 생각만 하면 항상 눈물이 나.▶ 이정향 감독, <집으로...>가기까지 (1)

▶ 이정향 감독, <집으로...>가기까지 (2)▶ 이정향 감독이 김을분 할머니께

▶ <집으로…>에서 배우 된 지통마 마을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