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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영화계 내 성폭력 피해자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이예지 2016-10-31

성희롱 예방지침이 수록된 <걷기왕>의 콘티북.

<씨네21>은 영화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하고 본지 지면에서 활동한 김수 평론가가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에게 접근해 관계를 갖고 사진을 찍어 불법 성인 사이트에 공유한 사실을 확인했다. <씨네21>은 사실관계를 파악한 즉시 그와의 모든 관계를 끊었고 사이트 DB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와 작성한 글들을 순차적으로 삭제 처리 중이다. 그간 피해자들이 소송 중에 있어 공론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으나 또 다른 피해자들이 추가로 등장함에 따라 그에게 평론가라는 직위를 부여한 매체로서 깊은 책임감을 통감하는 글을 SNS에 게재했다. 현재 <씨네21>은 더 있을지 모르는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추가 피해 사례를 제보받고 있다. 아울러, <씨네21>은 이후에도 해당 사건과 관련한 제보는 물론 영화계 내에서 벌어진 다양한 성폭력 사례들을 후속 취재할 예정이다. 피해 사례가 있다면 이메일(es@cine21.com)로 제보를 부탁드린다.

“등단하고 싶지? 그럼 우리 집에 가자.” 지금, 여기. 이토록 생생한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며칠간, 트위터상에서는 문화예술계 내에서의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범람 중이다. 문화예술계 내에서 작가, 감독, 큐레이터 등 일군의 ‘갑’의 직위와 위계를 지닌 남성이 권력을 이용해 작가 지망생, 편집자, 스탭 등 상대적 ‘을’의 위치인 여성들에게 일상적으로 자행한 성폭행 및 성추행들을 낱낱이 고발하는 목소리들이다. 폭풍의 시작은 서브컬처 내 성폭행을 폭로하던 ‘오타쿠 내 성폭력’ 해시태그로, 만화가 이자혜가 가해자 이익이 자행한 미성년자 성폭행을 방조하고, 작품 소재로 해당 사건을 차용했다는 고발이 공론화된 것이 계기였다.

그러나 이는 도화선에 불과했다. 해시태그 운동은 ‘문단 내 성폭력’과 ‘미술계 내 성폭력’에 대한 고발로 이어졌다. 소설 <은교>의 작가인 박범신 작가의 성추행에 대한 제보도 뒤따랐다. 한 전직 편집자는 “그는 편집팀 여성들을 ‘은교’라 부르며 신체 접촉을 했고, 여성 편집자 중 자신과 모종의 관계가 없었던 이는 없었다며 원래 남자 작가와 여자 편집자는 그런 관계라고 했다”고 밝혔다. 박범신 작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진지하지 않은 사과문을 게재했다가 더 큰 비판에 직면했고, 이내 사과문을 삭제했다. 미술계에서도 일민미술관의 책임 큐레이터 함영준을 비롯한 인사들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예술대학교 학생이라고 밝힌 한 트위터리안은 “함영준이 만나자고 요청했고, 어린 학부생이 유명 큐레이터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란 생각에 응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부적절한 신체적 접촉뿐이었다”고 밝힌 것을 시작으로, 그가 여성 작가와 지망생들에게 가한 성폭행이 드러났다. 함영준 큐레이터는 트위터에 사과문을 게재했고 일민미술관에서 사직했다. 그외에도 최모 큐레이터, 박모 시인을 비롯한 남성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고발이 뒤따르고 있다. ‘갑질’에 기반한 성 착취는 문화계 전반에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성폭력을 고발하는 해시태그는 곧 영화계로도 확장됐다. <씨네21> 역시 김수 평론가가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유인하여 관계를 갖고, 사진을 불법 성인 사이트에 배포한 사건을 마주해야만 했다.

영화 현장의 성폭력

영화 현장에서도 유사한 일들은 벌어지고 있다. 트위터의 한 영화과 학생의 글은 현장의 풍속도를 관통한다. “교수님께 영화 현장에서 당했던 성희롱 경험을 토로한 적이 있지만, 돌아온 답은 여자가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못생긴 여자가 되거나 남자들의 성적인 관심을 이용하라는 것뿐이었다.” <형광인종> 등의 단편을 연출한 신희주 감독은 연출팀 시절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용기 있게 밝혔다. “회식 후 미술감독이 ‘꿀벅지네’ 하며 내 허벅지를 만졌다. 그러자 감독이 ‘부럽다. 나도 만지고 싶다’고 했다. 나는 20대 초반의 스크립터였고 다른 스탭들은 30대 후반~40대 후반이었다.” 한편 그는 다른 현장에서 “촬영감독이 여배우의 신체를 줌인아웃하고, 촬영팀과 조명팀 모두 낄낄대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지방 촬영이 잦은 영화의 스탭으로 참여했다는 트위터리안(@27022mo)은 “기혼자였던 사수는 밤마다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 어깨를 주물러달라 했고,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다며 나와 자고 싶다고 했다”고 밝히며 “스탭들은 알면서도 공공연히 묵인했고,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말로 날 위로했다. 소름끼쳤다”고 토로한다.

영화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사례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현장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모두가 그를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문제를 제기하는 이를 유난하고 예민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2차 가해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한국영화계 내, 특히 현장에서 대부분의 의사결정권자가 남성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해 여성들의 제보에서처럼 명백히 불쾌한 말과 행동들은 현장에서 권력이 개입하는 순간, 능청스러운 제스처로 웃어넘기는 주변인들과 함께 얼버무려져 ‘성폭력’이나 ‘여성혐오’라는 문제의식조차 소거된다. 죄가 발생하지 않으니, 죄의식이 생길 리 없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사후에 ‘기억은 나질 않지만’,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등의 유체이탈 화법의 괴이한 사죄만 늘어놓게 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의 성폭행 및 여성혐오 아카이빙 계정에 제보된 사례들은 위계질서 내에서 성 착취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위계질서가 어떤 차별적 기제 위에 안착해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남자 동기들이 ‘너처럼 젊은 여자애들은 영화 찍기 어려우니 남자 선배를 꼬셔 영화를 찍으라’고 했다”는 제보가 대표적이다. 이런 제보도 있다. “평론가의 소개로 모 감독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 소식을 남자 동기에게 전했더니 ‘아저씨들이 젊은 여자 앉혀놓고 술이나 먹자는 거니 조심하라’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이 만남 이후 좋은 커리어를 쌓고 있다. 남자 동기는 과연 날 걱정한 것일까. 성 착취가 만연한 나머지 ‘여성이 업무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성을 이용한 것’이란 전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주저앉게 만든다.” 여성을 영화판 밖으로 배제시키는 것은 직접적인 폭력과 더불어 시스템 안에 고착된 폭력에서 비롯된 편견이기도 하다.

<걷기왕>의 성희롱 예방교육과 ‘찍는 페미’ 페이지 개설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이지만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개봉한 <걷기왕>은 스탭들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했고, 콘티북에 성희롱 예방 지침을 수록했다.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자고 권한 <걷기왕>의 남순아 작가는 “현장에서 성희롱 사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방책은 있어야 했다”고 말한다. 고용노동부는 법정의무교육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모든 영화 현장에서는 영화 규모와 상관없이 크랭크인 전에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실시하지 않을 시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문다. (상시 10인 미만이거나 한쪽 성만 있을 경우에만 교육교재 및 홍보물로 대체가능하다.) 영화노조위원회 홍태화 사무국장은 “영화산업노사업체 임금 및 단체협약안에 성희롱 예방교육도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다. 앞으로 교육이 잘 이행되는지 주시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 “영화인 신문고에서는 변호사 선임부터 정신과 심리상담까지 적극 지원하니 피해 사례가 있다면 접수해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사태가 점화되면서 배우 김꽃비와 신희주 감독, 박효선 감독은 “지금 한국 사회의 영화·영상 콘텐츠계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라는 선언과 함께 ‘찍는 페미’라는 여성영화인 페이스북 그룹을 개설했다. 김꽃비는 “이 부조리한 쳇바퀴 속에서 ‘이건 잘못됐어’라고 말하며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면 차별과 폭력의 공기는 바뀔 것이다. 함께 연대하자”고 제안한다. ‘찍는 페미’는 개설 4일 만에 334명이 가입했다. 변화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