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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뜨거운 분노와 희망을 품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돌아온 켄 로치
송경원 2016-12-07

켄 로치가 돌아왔다. 큰 규모의 장편영화 연출을 중단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시절은 이 존경받아 마땅한 노장을 가만히 두지 않는가 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부당한 복지제도와 관료주의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한 시민의 이야기를 다룬다. 50년 전 켄 로치로 하여금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게 했던 <캐시, 집에 오다>(1966)와 겹쳐 보이는 건 우연히 아닐 것이다. 반세기를 뛰어넘은 지금, 인간의 가치와 상식이 퇴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시점에 새삼 켄 로치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블루칼라의 시인의 카메라는 오늘도 우리를 일깨운다. 빈곤은 누구의 문제인가, 우리를 초라하게 만드는 자는 누구인가. 건설적인 분노가 필요한 지금, 켄 로치의 성실한 행보를 전한다. 내 이웃의 추위를 보듬는 따뜻한 당신, 그 뜨거움으로 마땅히 분노하라.

나는 긍정론자를 불신한다. 하면 된다며 무모해 보이는 일에 일단 뛰어들고 생채기에도 아랑곳없이 전진하는 그 에너지를 보노라면 불쑥 겁이 난다. 그들은 언제나 활기 넘치고 밝은 에너지로 주변을 끌어들이지만 그 해맑음이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불안해 보일 때가 있다. 나는 타고난 비관론자다. 사물의 어두운 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일을 시작할 땐 실패할 경우를 먼저 생각한다. 왜 그렇게 소극적이냐는 훈계와 매사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핀잔 속에서 웅크린 고슴도치처럼 버텨왔다. 어쩌면 단지 방향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긍정론자가 큰 그림과 언젠가 도달할 목표를 향해 고개를 치켜든다면 비관론자는 지금 디디고 선 계단이 무너지지 않을까 바닥을 먼저 살핀다. 다만 비관론자로 살아온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비관론자의 긍정은 꽤 단단하다는 거다. 그들은 웬만한 실패는 실패로 여기지 않는다. 애초에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기에 불현듯 바닥에 떨어질 때도 산산조각 나는 일은 거의 없다. 성공에 대한 기대치도 상대적으로 낮다. 범사에도 감사할 줄 알고 소소한 즐거움에서 위안을 얻는 법을 익힌다. 긍정론자의 낙담은 주변을 두렵게 하지만 비관론자의 낙관은 최악의 상황에서 한줌이 버팀목이 되어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관론의 가치에 대해 이런 자기위안을 해본다.

<지미스 홀>(2014)이 유독 마음에 얼룩을 남겼던 건 켄 로치의 마지막 극영화가 될 것이라는 선언(다행히 풍문으로 끝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켄 로치의 영화는 보고 난 후 문제에 대해 숙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지미스 홀>은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드는 영화였다. 그간 켄 로치를 마냥 신뢰할 수 없었던 건 그의 영화운동(미학이라기보단 차라리 운동이란 표현이 어울리리라)이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50년 세월을 줄기차게 영화를 통한 선언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1966년 자신의 첫 작품 <캐시, 집에 오다>에서 관료주의 복지제도의 문제를 지적했던 그가 50년 뒤 다시 같은 문제를 화두에 올린다. 그토록 치열하게 부르짖고 일깨우고 조직했건만 정녕 세상은 한치도 나아지지 않는 것인가. 철벽같은 현실의 벽 앞에 절망하지 않고 여전히 문을 두들길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불굴의 의지로? 강철 같은 신념으로?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 미치지 않고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는 건 긍정의 힘이 아니고도 가능한가.

켄 로치의 몇몇 영화들은 이런 의문에 반론을 제기한다. 나는 켄 로치의 작품들 중 날카로운 메스를 들어 현실을 헤집는 영화보다 작정하고 드라마를 녹여낸 영화들, 이를테면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2012)와 같은 드라마에 더 끌린다. 간혹 지나치게 멜로드라마적인 결말을 설정한다는 지적을 듣긴 하지만 그 점이 특히 사랑스럽다. 그의 영화적 동력이 신념의 성취나 미학의 완성이 아니라 웃음, 눈물, 애정, 연민 등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기인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막막한 상황에서 한줌의 낙관,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건 켄 로치가 영화와 현실에 대해 취하고 있는 일관된 태도가 아닌가 싶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훨씬 엄혹한 시절을 버티고 있는 우리가 보기엔 상대적으로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는 문제까지 촉수를 드리우는 예민함이 있다. 켄 로치의 후각은 어둠을 추적하는 파수꾼과 같다. 그리고 이를 풀어낼 때는 사회주의자로서의 강고함보다는 보편타당한 상식과 인간애로부터 걸음을 뗀다. 문제를 송두리째 뒤엎고 바꾸자고 선동하는 대신 각박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지키는 이들을 따스하게 바라본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은 아직 멀고, 언젠가 그곳에 도달할 것인지도 기약이 없지만 그럼에도 오늘 나의 가치를 지키는 것들을 소중히 하는 태도. 요컨대 비관주의자의 실낱같은 낙관이 영화 전반에 깃들어 있다.

분노를 매개로 한 공유와 연대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한통의 편지를 남기고 갔다. 심장질환으로 일을 쉬어야 했던 목수는 정부로부터 정당한 의료수당을 받지 못했고, 당장의 생계를 위해 실업급여를 구걸해야 했으며, 끝내 잘못된 행정을 바로잡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소개하는 데 이 이상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이 한 장면을 제대로 공명시키기 위해 90분을 바친다. 강조하건대 설명이나 이해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감정의 전파를 통해 관객을 목격자로 참여시키는 설득이다. 아는 것을 넘어 당위를 전염시키는 멜로드라마, 또는 마음에 부채를 남기는 얼룩이라 해도 좋겠다.

사실 켄 로치는 독창적인 문법으로 이야기를 치장하는 감독이 아니다. 반론도 있지만 메시지보다 형식을 앞세우진 않는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분명한 건 그가 전달하는 상황은 언제나 간명하며 별다른 독해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켄 로치의 영화는 보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고 화면 저편에서 일어나는 부당함에 대한 즉각적인 분노를 유도한다. 50여년의 세월에 걸쳐 켄 로치의 과녁은 시스템의 부조리에 맞춰져왔다. 시대가 변하고, 비록 착시일망정 세상이 조금 더 나아져 보일지라도 그의 활시위는 여전히 팽팽히 당겨진 채 시스템을 향한다. 이 일관된 방향성은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지적하는 답습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50년 전 <캐시, 집에 오다>에서 관료적 복지제도의 허점을 고발했던 그가 지금도 여전히 고압적인 관료주의의 폐해를 카메라에 담는 건 사회가 그동안 한치도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어떤 형태로 변하건 어떤 해택이 주어졌건 사회적 배려에서 배제된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켄 로치의 관심사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늘에 맺혀 있다. 다시 말해 켄 로치는 개별 현상을 통해 시스템의 균열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스템에서라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림자로부터 첫 걸음을 내딛는다. 거시적인 문제인식에서 출발해 미시적인 사연을 재구성한다고 해도 좋다. 인간 사회에서 부조리는 항상 존재한다. 그러니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을 멈춰서도 안 되고, 비단 고발하는 것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켄 로치의 영화가 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항상 부조리에 대한 자각 그다음 단계, 그러니까 분노를 매개로 한 공유와 연대다. 당신은 이 상황을 용인할 수 있는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니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화답하지 않을 수 없다.

다니엘 블레이크와 의료심사관의 대화로 시작하는 오프닝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의료심사관은 다니엘에게 기계적이고 의미 없는 질문들을 반복한다.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리 외쳐봐도 자동응답기처럼 매뉴얼을 따를 것을 지시한다. 이 어둠 속의 대화가 모든 문제의 출발이자 본질이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마주 앉은 자리에 사람은 없다. 의료심사관의 말투가 기계음에 가까운 건 아마도 그가 그렇게 응대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장벽, 장애로 설정된 심사관과 공무원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준다는 거다. 그들은 복지를 바라는 이들을 기계적으로 응대하고 스스로 포기한 채 발걸음을 돌릴 수 있도록 설정된 유리 장벽들이다. 숫자와 효율을 최우선에 둔 시스템은 공무원들에게도 인간성을 포기하길 강요한다. 밥줄을 담보로 잡힌 공무원들은 기계로 학습되어 눈앞에 있는 대상을 인간이 아니라 제거해서 돌려보내야 할 귀찮은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효율을 먼저 생각한 제도는 응당 필요한 복지를 받아야 할 자와 이를 수행하는 자 양쪽을 동시에 멸시한다. 다니엘은 그들을 미워해야 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당장 눈앞에 대고 고함을 치는 편이 후련할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대신 곁에서 또 다른 모욕을 받고 있던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도와준다. 함께 괴물이 되는 대신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는 우리를 부품 취급하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한 사람의 시민임을 선언한다. 케이티의 말을 빌리자면 다니엘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일깨워준” 영웅이다.

지독한 비관론자가 발견한 희망

켄 로치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은 언제나 효과적이다. 사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모든 장면은 마지막과 다름이 없다. 눈꺼풀의 깜박거림처럼 검은 암전을 통해 시퀀스를 넘어가는 방식은 모든 장면의 서사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대신 일련의 추억을 훑는 사진처럼 구성한다. 어떤 사진들은 누락되고 어떤 사진들은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데, 켄 로치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부조리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정리하여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실업급여 관리자가 당신에겐 질병수당과 실업급여를 받는 선택지가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지금의 이 결과가 당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이라는 정부쪽의 변명을 대변한다. 조금 더 확장해보면 개인의 가난은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행동, 즉 게으름에 따른 책임이라는 말도 될 수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시스템은, 그리고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늘 당신의 책임을 묻는다. 너는 제대로 한 거냐고. 이들이 알리바이를 확보하는 방식은 교묘하다. 몇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꾸미고 실질적으로는 한 가지 길로 갈 수밖에 없도록 갖가지 유리 장벽을 설치해 방향을 유도한다. 그러고는 단언한다. 시스템은 최선을 다했다고. 정말 그런가. 다니엘의 말처럼 우리에겐 사실 선택지가 없다. 유리 장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구걸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다니엘처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굴욕을 감수하고 개가 되느냐, 인간으로서 굶느냐 둘 중 하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러한 시스템의 자기변명과 복지라는 환상을 하나씩 깨부숴나간다. 대단한 호소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고집스럽고 자기 삶에 떳떳한 노인 한명을 그 상황에 가져다놓았을 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결말은 다소 작위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보일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래서 효과적이다. 켄 로치의 영화가 현실참여적인 힘을 발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미학적인 완성보다 관객을 일깨우는 신파를 선택한다. 시스템을 예리하게 해부하는 이성보다 그 앞에 선 인간의 표정에 좀더 주목한다.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하는 힘이다. 켄 로치의 비극이 서사로서 소모되지 않는 까닭은 눈물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웃음은 인간을 바라보는 근간이고 눈물은 설득의 도구다. 그는 미학보다 인간을 우선한다. 이 지독한 비관론자는 끝끝내 인간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희망을 품는다. 지쳐버린 다니엘이 더이상 케이티의 집을 찾지 않을 때 케이티의 딸 데이지는 다니엘의 집을 찾아와 말한다.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 이보다 강력한 설득의 언어는 찾기 어렵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연민과 연대가 당위의 영역에 있는 감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로를 위로하고 돕는 연대의 증명. 그리하여 영화는 한줌의 낙관에 기대 시스템의 불합리, 제도의 자기변명,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지배층의 변명에 일갈을 날린다. 이것이야말로 켄 로치가 설득의 거리를 줄이고 관객을 영화에 참여시키는 주요하고 유효한 방식이다. 켄 로치 영화에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우선순위의 문제에 있어 켄 로치는 설득보다 공감을 우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항상 직접적이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인가. 당연히 그렇다. 당신은 다니엘의 죽음에 슬퍼할 수 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시스템에 분노할 수도 있다. 함께 눈물짓는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영화를 통한 세계의 해방은 그렇게 전파되어간다. 영국이든 한국이든 50년 전이든 50년 후든 사회 시스템에는 불합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끊임없이 감시하며 하나씩 뜯어고쳐 나가는 것뿐이다.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는 원래 그렇게 지루하고 번거롭고 지난한 수고 위에 성립하는 제도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켄 로치의 최고의 작품은 아닐 수도 있다. 아쉬운 점에 대한 지적이나 반대 의견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눈물, 분노, 안타까움, 위안 그것이 무엇이든 올해 이만큼 당신을 뒤흔드는 영화를 만나긴 어려울 것이라 확신한다. 시대의 암흑 속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이런 영화는 반드시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다.

폴 래버티, 켄 로치, 레베카 오브라이언(왼쪽부터).

'블루칼라의 시인'이 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을 것

켄 로치의 복귀 설득한 각본가 폴 래버티, 프로듀서 레베카 오브라이언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2016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는 여전히 연대와 희망에 대해 말했다. 2014년 <지미스 홀> 이후 장편영화로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 말했지만 오랜 동료인 프로듀서 레베카 오브라이언의 설득으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각본가 폴 래버티와 프로듀서 레베카 오브라이언은 그의 오랜 동지이자 든든한 조력자들이다. 레베카 오브라이언이 이야기를 꺼내자 두번 고민 없이 참여했다고 하니, 세계가 신자유주의를 향한 브레이크를 멈추지 않는 현 상황에서 1990년 이후 1년에 1편씩 영화를 만들어온 이 블루칼라의 시인이 한동안 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켄 로치의 힘 있는 말은 여전히 유효, 아니 점점 힘을 얻는다. “시장경제는 우리를 재앙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노동계급을 취약하게 해 착취하기 쉽도록 만든다. 그 결과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노력해도 빈곤을 마주하게 된다. 이건 시스템의 결함이거나 사람들의 잘못이거나 둘 중 하나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스템을 바꾸길 원치 않기 때문에 개인의 잘못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놀라서는 안 된다. 중요한 질문은 이거다. 우리는 그래서 무엇을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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