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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정홍수의 <노스텔지아> 어떤 영화는 반드시 돌아온다

부산을 다녀왔다. 나고 자란 곳이다. 비릿한 바다 냄새는 언제나 가슴 한쪽을 아리게 한다. 운 좋게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30주기 특별전을 볼 기회를 얻었다. <희생> 상영 후 강연이 예정되어 있는 황현산 선생님을 모시고 해운대 미포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고 정신없이 취했다. 나는 장산 밑자락에 신설된 해운대중학교를 다녔다. 담장도 없는 허허벌판 운동장에 서면 바다가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맑을 때는 쓰시마도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취했던가.

<희생>은 첫 관람이었다. 너무 좋았다. 숙취가 불러온 각성 상태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더디게 흘러갔지만, 화면은 이상한 생기와 활력으로 나를 일깨웠다. 서로 조금씩 비껴서 있는 인물들의 진지함은 발밑을 잃은 허둥댐의 표현 같았고, 그 불안과 공포는 그래서 더 슬프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꿈, 기억 혹은 무의식의 자리는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설명되지 않는 상태로 거기 있었다. 황현산 선생님의 강연은 내가 느낀 감흥이 숙취의 영향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타르코프스키에게 따라붙는 ‘영상시인’이라는 수식어는 그 적절함만큼이나 많은 오해와 편견의 진원지이기도 할 텐데, 관념성이며 미학적 상징이며 난해성 같은 단어들이 쉽게 떠오른다. 그러나 선생님이 영화 도입부 삽화를 통해 들려주었듯(두 어른이 짐짓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아이는 자전거 꽁무니를 나무에 묶는 장난을 친다. 선생 자신도 그랬지만 많은 관객이 아이의 움직임을 놓친다) 그의 영화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희망의 시간을 찾고 있었으니, 오래 자세히 지켜봐주기를 원하는 그의 길고 깊은 화면들은 그 잠재된 것들,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다시 한번 일깨우려는 절실함이었을 테다. 무지를 수긍하고 우연에 개방되어 있으며, 종종 고립되고 끊어져 있을지언정 있는 그대로의 시간에 대한 개별적이고 충실한 묘사를 통해 제시되는 그 ‘알레고리’의 세계는 일직선의 수렴이 아니라 영화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무지의 확신, 그 희망과 기적의 별들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타르코프스키와의 인연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여름이었을 테다. 황인숙 시인, 신경숙 소설가,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광화문에서 만나 어떤 이로부터(장차의 유하 시인이었는데 그때는 물론 몰랐다) 비디오테이프를 건네받았다. 우리는 주인도 없는 삼청동 이문재 시인의 신혼집에 앉아(VCR이 귀할 때였다) <노스텔지아>라는 영화를 꾸벅꾸벅 졸면서 보았다. 빗소리, 물소리와 함께 촛불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힘겹게 노천의 온천을 걷는 한 인물의 간절함이 가슴에 남았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온통 가짓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90년대 중반 ‘예술영화’라는 이름으로 타르코프스키 붐이 일 때 나는 생업에 쫓기기도 했지만 그런 일이 이상하게 불편했고, 그 대열에 끼지 못했다. 지난해 서울아트시네마의 큰 화면으로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보며 너무 행복했다. 극장에서 본 최초의 타르코프스키 영화였다. 26년 만이었다.

올여름 이탈리아 여행 중 토스카나의 피엔차에 머물 때였다. 내 영화 허영을 아는 친구가 근처에 <노스텔지아>를 찍은 곳이 있다고 했다. 가까웠다. 바뇨 비뇨니. 그 촛불의 온천이 거기 있었다. 어떤 영화는 이렇게 돌아온다. 18세기 음악가도, 20세기의 시인도, 감독 자신도 깊이 향수를 앓고 있다. 주인공 안드레이가 이방의 땅 토스카나와 러시아의 고향집 앞에 동시에 앉아 있는 <노스텔지아>의 마지막 장면. 그것은 말 그대로 기적의 순간이며 이미 도래해 있는 구원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렇게 상실의 형식 안에서 희망을 버티고 있었다. 어떤 영화는 반드시 돌아온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강 출판사 대표. 평론집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으로 올해 대산문학상 평론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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