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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원의 영화와 건축] SF영화 <이퀄스>에 안도 다다오와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건축이 어울리는 이유
윤웅원(건축가) 2017-03-02

드레이크 도레무스의 영화 <이퀄스>(2015)는 ‘기쁨, 증오, 슬픔, 욕망’ 같은 인간의 감정을 통제해서 공동체의 절대적인 안정을 유지하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감정의 기복 없는 평온한 정신 상태를 이상적인 사회로 그리고 있다.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지향은 동일한 유니폼과 집같이 개인의 다름을 제거하는 방식을 통해서 달성된다. ‘더러움’과 ‘비정상’이 없는 <이퀄스>의 미래 도시는 일본 생활용품 브랜드 ‘무지’의 인장 없는 제품들처럼 단순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무지나 유니클로 광고를 보고 있는 착각을 갖게 하는 영화 <이퀄스>는 대부분의 장면을 일본과 싱가포르에서 촬영했는데, 특이하게도 실존하는 건축가의 건물을 사용해서 미래 도시를 만든다. 나는 자기의 건축 언어가 완성된 ‘건축가’의 건물이 영화에 나오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건축가의 미적 자의식이 발현된 건축 형태는 자기 완결성이 있어서, 현실에 기반을 둔 이야기 안에서 ‘건축가’의 건물은 무언가 동떨어진 느낌이다. 그런 건축가 건물이 어울리는 영화가 있다면 SF장르일 것이다. 건축가 건물의 특별한 미의식이 현재와 다른 조건을 상정하는 미래 사회에 조응하는 경우가 있다.

안도 다다오와 다니엘 리베스킨트

<이퀄스>에 나오는 건물 중 일부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작품이다. 이들의 작품이 ‘감정 없는 세상’의 배경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안도 다다오의 경우 아와지 섬의 유메부타이 컨퍼런스 센터와 오사카의 사야마이케 박물관이,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경우 싱가포르의 리플렉션 타워가 영화 속 배경으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부분적인 전경만이 사용되어 건물의 온전한 전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유명해진 것은 오사카의 ‘스미요시 주택’이 계기가 됐다. “예술가는 평생 한 작품을 하는 것이고, 결국 그 이외의 것들은 끝없는 변주다”라는 말처럼 안도 다다오의 건물은 초기작 스미요시 주택에서 완성되었다.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내부 공간과 그 안의 완전한 질서, 단독자의 삶으로서의 안도 다다오의 세계다. 오래된 중정주택 유형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오사카 주택지의 이 2층 주택은 폭 3.6m의 직사각형 박스 형태이고, 3등분한 중앙에 중정이 자리하고 있다. 2층에서 다리 통로가 중정을 가로지르며 분리된 방들을 연결한다. 안도 다다오는 이 중정에 대해 “매일 자연이 다른 모습을 드리우는 이 중정은 이 주택에서 전개되는 생활의 중심이고, 도시에서 상실하고 있는 빛, 바람, 비와 같은 자연의 감각을 주거에 끌어넣은 장치다”라고 표현했다. 말레비치의 사각형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콘크리트 박스는 세속적인 것이 정신세계로 올라간 기하학적 엄밀함이고,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이 놓친 것 혹은 거부한 것, 장소의 정신이다.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도 인상적인 데뷔작을 갖고 있다. 유대인이며, 부모가 홀로코스트를 겪은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으로 자신의 건축을 보여주었다. 지그재그로 연결된 긴 건물 형태와 사선으로 관통하는 구조들과 찢어진 입면은 홀로코스트 앞에 인류의 절망을 드러낸다.

1988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필립 존슨과 마크 위글리는 ‘박스 형태를 벗어나려는 당시의 시도’들을 한데 모아, 이제는 이름도 낯선, 지나치게 야심찬, ‘해체주의’란 제목의 전시를 한다. 어쩌면 건축의 현상을 ‘이즘’으로 이름 붙인 마지막 사건에 해당 될 수도 있는 이 해체주의 건축은 “건축의 보수적인 특성, 조화와 통일성과 안정성에 대한 추구를 결여를 통해 위협하는 것으로 정의된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체주의’ 건축 전시에 참가한 7명의 건축가인 피터 아이젠만, 프랭크 게리, 자하 하디드, 렘 쿨하스, 베르나르 추미, 코오프 히멜블라우, 다니엘 리베스킨트 모두 2000년대 신자본주의 시대의 ‘스타 건축가’가 되었다.

영화에는 다니엘 리베스킨트 건축의 인장으로 여겨지는 사선 형태가 나오지 않는다. 직각으로 구성된 리플렉션 타워의 저층부만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영화 속 건물에서 ‘리베스킨트’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사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에 정확하게 어울리는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건축은, 이후 몇개의 미술관 프로젝트를 거친 후 2000년대 건물들에서 순화되었다. 다니엘 리베스킨드에게 순화된 것이 사선이라면, 안도 다다오에겐 공간적 밀도이다.

오늘날 정보의 비대칭이 점점 사라지고, 시장경제가 주도하는 세계화의 현상 속에서 발견되는 건축의 특징은, 뛰어난 건물의 완성도가 세계 어디서나 쉽게 발견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차이가 작아지고, 서로 비슷해지고, 연성화되고 있다. 우리는 ‘깨끗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을 통제하는 사회에서 피어난 사랑

<이퀄스>는 사랑영화다. <이퀄스>의 이야기 구조는 변형된 형태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고, 이 제약이 감정을 더욱 고양시키며, 이 방해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은 오해에 의해 어긋난다. <이퀄스>에서 두 집안의 반목을 대체하는 것은 사랑을 병으로 간주하는 사회체제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퀄스>의 주인공 사일러스(니콜라스 홀트)와 니아(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첫 번째 감정, 사랑은 격렬하다.

영화 속 미래 사회 ‘콜렉티브’에서 사일러스와 니아는 공동체의 역사를 미술과 글로 표현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감정의 변화 없이 언제나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던 사일러스는, 동료의 투신자살 현장에서 니아의 동요를 알아차린 후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니아의 흔들림은 사일러스의 마음속에 작은 파동을 만들어내고, 사일러스는 니아를 향한 이끌림이 통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둘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만나는 첫 번째 장소는 화장실이다. 콜렉티브에서 화장실은 남녀 구분이 없는 장소이다. 이것은 공간에 있어서 성의 평등이 아닌, 콜렉티브가 성의 차이조차 존재하지 않은 사회이고 화장실조차 더러움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들의 사랑은 새롭게 개발된 ‘감정 통제 장애’ 치료약의 전면적인 사용 앞에서 위험을 맞게 된다. 영화에서 제일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의 마지막, 치료를 받은 사일러스와 받지 않은 니아가 콜렉티브를 탈출해서 ‘결함인’들이 사는 ‘반도국’으로 떠나는 장면이다. 이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서로가 완벽하게 사랑하는 순간을 지난 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이 사라진 사람이 갖게 되는 미래. 그들은 미래에서 현재로 돌아간다.

사랑의 격렬한 감정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감정 없는 사회’라는 설정과 배경으로 미니멀한 도시를 보여주는 감독의 의도를, 이해를 하더라도 감정으로 느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게다가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감정 없는 삶이 그렇게까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잠시나마, 리조트처럼 깨끗하고 쾌적해 보이는 콜렉티브의 감정 없는 삶이 반도국의 사랑보다 더 편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이 때문인지 영화 때문인지 나에게 <이퀄스>는 최소한의 감정으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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