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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파괴를 그리는 <더 바>

낙원은 왜 사라지는가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렉스 데 라 이글레시아는 1991년에 단편영화 <칵테일 살인마>를 만든 뒤 <액션 무탕트>(1993)의 각본을 들고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찾았다. 각본에 흥미를 느낀 알모도바르는 장편으로 확장하라고 조언했고 ‘엘 데세오’사를 세워 제작을 지원했다. 성공을 거둔 데 라 이글레시아는 <야수의 날>(1995)의 각본을 써 다시 알모도바르에게 갔다. 알모도바르는 ‘악마’가 등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지원을 거절했다. 한때 나란히 악동으로 취급받았으나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른 취향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990년대 스페인은 거칠게 말해 1990년대 한국과 유사하다. 스페인 역사학자들은 스페인이 1990년대를 지나면서 프랑코 독재정권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한다. 스페인의 20세기 중반을 지배했던 프랑코 정권은 1970년대 중반에 막을 내렸지만, 수십년에 걸친 암흑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10여년이 더 필요했던 거다.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대중은 새로운 스페인에 어울리는 새로운 영화를 갈망했다. 그런 시기에 등장한 데 라 이글레시아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와 사회와 시대의 요구였다. 일군의 진보적인 스페인 평단이 보수적인 가치로 돌아선 알모도바르보다 데 라 이글레시아의 영화를 높이 평가하는 건 정당하다. 게다가 고야와 벨라스케스에서 브뉘엘과 가르시아 로르카로 이어지는 스페인 특유의 그로테스크하며 실험적인 문화의 적자로서도 데 라 이글레시아가 더 어울린다.

데 라 이글레시아의 신작 <더 바>(2017)는, 종종 인물을 폐쇄적 공간 속으로 몰아넣은 뒤 관찰해온 전작들의 영향 아래 놓인 영화다. 공동체를 직접 다룬 <커먼 웰스>(2000)는 물론, <액션 무탕트>에서 근작 <마이 빅 나이트>(2015)에 이르기까지, 그는 틈만나면 인물을 가두는 걸 즐겨왔다. 그에게는 감금된 이들의 몰락을 바라보는 악취미가 있어, 군집된 인물들에게 선을 찾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힘을 합쳐 위기에서 벗어나는 일 따위는 없다. 일종의 재난영화인 <더 바>는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나 <타워링>(1974) 같은 할리우드식 재난영화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영웅이 나타나 대다수의 인물을 구하는 일 따위는 기대하면 안 된다. 혹자는 설정이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2007)와 비슷하다고 말하는데, <더 바>는 지구 종말의 날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선이 그어지고, 그 선 안에 놓인 인간들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난다. 이건 이상한 이야기다.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극중 사람들은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인다. 작은 집단은 곧바로 허약함을 드러낸다. 선과 도덕은 생존의 절박함 앞에서 시험당한다.

<더 바>가 그리는 풍경과 용산참사

한때는 데 라 이글레시아가 인간, 특히 모여 있는 인간을 회의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더 바>는, 그렇게 여겨졌던 데 라 이글레시아가 내놓은 대답이다. <더 바>의 주제는 단순하다. ‘누가 우리를 분열시키는가?’이다. <더 바>는 지금껏 그가 그려왔던 풍경 뒤로 숨겨둔 정치적 메커니즘을 전면에 드러낸 작품이며, 그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방식도 정교하다. <프레디타>(1997), <퍼펙트 크라임>(2004)처럼 인물을 가두고 공권력이 침투하도록 하는 설정에서 좀더 나아가, 인물 내부의 관계를 나누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정치, 종교, 경제적으로 각기 다른 여덟 인물을 좁은 카페에 모은 다음, 흡사 계급적 관계를 형성하듯 지상과 지하로 나뉜 공간으로 그들을 분리시킨다(이어 지하의 공간은 그 아래의 하수구로 확장된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살겠다는 욕망은 다름없는 인물 가운데 지상에 있던 인물들이 고의성 방화로 먼저 제거당하고, 지하의 인물들도 서로에 대한 불신 속에서 한명씩 죽음을 맞는다. ‘도시 한복판의 카페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든다. 불이 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도 바깥사람들은 밀폐된 카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갑자기 등장한 특공대는 위기에 처한 인물들을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죽음으로 내몬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세상은 멀쩡하게 돌아가고, TV에서는 보도조차 되지 않는다.

데 라 이글레시아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웃었다. 그는 블랙코미디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블랙코미디인 <더 바>를 보면서 나는 웃지 못했다. 이건 분명 어디선가 보았던 풍경이기 때문이다. 원고를 쓰던 중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 중인 <공동정범>(감독 김일란·이혁상, 2016)을 보러 갔다. 놀랍게도 두 영화는 같은 주제를 전하고 있었다. <공동정범>은 2009년 1월 20일 7시18분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용산4구역 철거현장의 망루에서 화재가 발생하기 2분 전이다. 만약 여기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라는 낭만적인 상상을 한다면 당신은 두 감독의 전작을 보지 않은 것이다. 용산의 비극은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악당의 정체를 아는 데는 단 2분의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영하의 겨울 아침, 물대포는 허름한 망루의 철판을 미친 듯이 두드려대고, 컨테이너에 올라탄 특공대는 쇠파이프로 망루의 벽을 내려치고, 건물 아래에서 경찰이 피운 불과 연기가 목숨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어 화마가 치솟았다. 살아남은 자조차 곁에 누가 있었는지, 자신이 어떻게 떨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그곳은 처참한 지옥이었다. 경찰 한명을 포함해 여섯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 공권력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채,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만 ‘공동정범’으로 모든 죄를 떠안았다. <공동정범>은 그다음에 벌어진 진짜 비극을 읽는다. 첫 비극은 형을 마치고 세상에 나온 동지들 사이의 문제다. 죄책감과 죽음의 공포를 떨치지 못하는 그들은 하나가 되지 못했다. 서로를 불신했고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누군가가 함께 살기를 원했던 동지들을 갈라놓았다. 두 번째 비극은 망각이다. 쓰라린 기억을 지우고 싶은 자들이 여전히 잠 못 이루는 것과 반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용산의 비극은 잊혔다. 그사이에 현장의 총책임자는 공기업 사장을 거쳐 국회의원이 되었고, 비극의 땅 위로 거대한 건물을 세운 자들은 투자 수익을 계산하기에 바쁘다. 사람이 죽어나간 땅에서 넋이 위로받을 시간도 없이, 용산의 기억은 깨끗이 지워지는 중이다.

데 라 이글레시아는 <더 바>에서, 공동체에 공포를 심고 분열시킨 끝에 공동체를 파괴하는 궁극적인 주체가 무엇인지 제시한다. 보통 예상하듯이 그것은 개인의 욕망이 낳은 결과가 아니다. 권력을 지닌 것들은 민중으로 뭉치는 대신 개인으로 떨어져 살기를 갈망한다. <더 바>의 사건을 시시하다고 말하는 관객을 보았다. 그럴 수도 있다. 공권력이 소수의 인물들을 제거하는 건 여타 영화나 현실에서 보았음직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더 바>가 평범해 보인다면,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영화의 엔딩. 유일한 생존자가 거리를 걷는다. 그녀는 이제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며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포함해 죽은 자들은, 끔찍한 사건은 곧 잊힐 것이다. 권력자들의 비밀스러운 작전대로 사건이 귀결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낙원을 원하지 않는다. <더 바>의 진짜 슬픔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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