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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만화방] 모로호시 다이지로 <시오리와 시미코의 밤의 물고기>
오승욱(영화감독) 2017-08-24

책의 지옥 속으로 기꺼이

<시오리와 시미코의 밤의 물고기>

오늘은 20여년 전부터 헌책방 순례자들이 술에 취하면 아련한 눈빛으로 파리똥이 달라붙어 있는 천장을 응시하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만화 속의 동네 이노아타마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이노아타마 마을에는 서점이 두개 있다. 이노아타마역에서 남쪽을 향해 쭉 뻗은 시내 중심 상점가를 걸어가다보면 오른쪽에 서점이 하나 나온다. 신간 서적을 파는 서점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신간 잡지들과 베스트셀러 서적, 참고서들이 있는, 동네마다 하나씩 있을 법한 서점과 다를 바 없는 곳. 안경을 쓴 소설가 타입의 아저씨가 항상 카운터를 지키지만 간혹 에도 시대의 미인화에 등장하는 여자처럼 생긴 여고생이 카운터에 앉아 있을 때도 있다. 잡지 진열대에 가서 <소년 점프>를 꺼내 이번주 <은혼>을 대충 훑어보다가 도로 꽂아넣고 서점을 나와 남쪽으로 뻗은 상점가를 향해 가다가 사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든다. 30여 미터를 가면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이 나오는데 그 골목으로 들어서 좀 걷다보면 1960년대에 지어진 듯한 오래된 목조건물이 나온다. 그 집의 간판에는 큼지막하게 ‘고서’라 쓰여 있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우론당’이라는 상점 이름과 전화번호가, 그 아래에는 ‘고가 매입’이 적혀 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면 관록 있는 헌책방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는 책장과 그 안에 꽂혀 있는 책들이 방문객을 압도한다. 연륜이 있는 헌책방 순례자들은 헌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의 상태를 보고 그 헌책방 주인의 됨됨이와 책에 대한 존경심을 판단할 수 있다. 우론당은 서점 안에 발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책의 마력에 꼼짝없이 걸려버리게 되는 곳이다. 전세계의 양말을 수집하여 사진으로 찍어놓은 전 35권 컬러 도판의 위엄, <세계 양말 대도감>이 몇권의 결권이 있기는 하지만 가지런히 꽂혀 있고, 중국 명나라 관리이며 미식가였던 저자가 채집하고 연구 고안한 미식 레시피의 보고 <진씨채경>의 인육요리 항목을 삭제한 전후 복간판, 소설을 완성하기는 했으나 내용이 불만스러워 출판사에 출판 중지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출판사 사장을 죽여버리고 제본소를 방화하는 폭거에 나섰던 비운의 작가 요루카와 소라오의 <지옥에서 3시 차>가 헌책방 입구에 나란히 꽂혀 있다면 웬만한 헌책방 순례자라면 뒤로 자빠져 머리가 깨질 것이다. 꿈의 헌책방, 우론당이 바로 그런 곳이다.

책에는 원념이 스며들기 마련이니

만약 누군가가 저녁에 산책하다가 불법으로 버린 쓰레기 더미에서 잘린 남자의 목이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해 집으로 가져와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전전긍긍한다면 고민하지 말고 우론당으로 가서 잘린 목을 사육하는 방법에 관한 책을 사면 고민이 해결될 것이다. 실제 우론당에는 저자 불명의 <살아 있는 목의 ‘바른’ 사육법>이란 책이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도 있다. 종이로 만들어진 책이란 그것을 읽은 사람의 원념이 스며들기 딱 좋은 물건이다. 책을 읽으며 감탄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했다면 그런 감정들이 고스란히 종이 속에 스며들기 마련이다. 그뿐 아니라 혁명을 준비하던 혁명가가 읽던 책, 연쇄살인마가 읽던 책, 말기암 환자가 읽던 책 등등 온갖 사람들의 손을 거쳐간 책들에는 각기 고유한 원념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지나치면 책 속에 스며든 원념이 책의 내용을 먹고 자라나 흉악한 마물이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책이라 뽑아들었다가 마물이 된 책이 삼켜버려 행방불명된 사람들도 꽤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우론당에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서점에는 정기적으로 요괴 사서란 소년이 와서 귀신 들린 요주의 마물 서적을 수거해간다. 요괴 사서가 우론당에서 수거해간 책 중 유명한 것이 <이문마두교>인데 죽은 사교 교주의 원념이 담겨 있어 책을 소유한 사람은 밤마다 피투성이 말머리의 환각을 본다는 무시무시한 책이다.

서점을 지키는 여고생 콤비

우론당의 카운터에는 입을 꾹 다물고 책을 읽고 있는 안경 쓴 여고생이 등교시간을 제외한 시간에 항상 앉아 있다. 여간 야무지게 생긴 게 아닌데, 바늘 한땀 들어갈 자리가 없으니 얼렁뚱땅 책값을 깎으려거나,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되는 슈퍼 울트라 희귀본을 발견하여 모두가 아는 희귀본의 싸구려 복각본과 마니아만 아는 희귀본 바로 아래에 은근슬쩍 끼워넣어 싸게 계산하려는 농간을 부려도 이 여고생에게는 어림도 없다. 얄팍한 수작을 간파한 여고생의 싸늘한 비웃음만 사고 책값은 책값대로 괘씸죄를 더해 높여 부를 것이다. 여고생은 그 따위 농간을 부리는 헌책방 순례자일수록 이 책을 꼭 사고야 말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책방 카운터에는 또 한명의 여고생이 자기 집처럼 책을 꺼내서 읽고 있는데 어디선가 본 듯하다. 아! 저 여고생은 아까 들렀던 신간 서점에서 카운터를 보던 그 여고생이다. 그러고 보니 두 여고생은 단짝이다. 신간 서점집 딸인 여고생의 이름은 시오리. 그리고 헌책방 우론당집의 딸은 시미코다. 이 헌책방의 단골로는 괴기소설을 쓰는 작가 단 선생이 있다. 밤에 이노아타마 마을길을 걷다가 하늘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얼굴을 보더라도 너무 무서워하거나 놀라지 마라. 그 얼굴의 주인공이 바로 마음씨 좋고 상냥한 단 선생의 아내다. 그들의 딸인 쿠트르는 첫눈에 매우 난폭하고 괴기스럽다고 느껴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 잡아먹힐 수 있으니 알아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 단 선생을 스토킹하는 키토리씨 역시 우론당을 가끔 들르는데 그는 애인을 살해하고 심신 상실 상태에서 쓴 <살육시집>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자비로 500부만 판매한 것이 희귀본이 되어 속물 덩어리인 희귀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이 책 역시 우론당의 한 귀퉁이에 원념을 품고 꽂혀 있다.

<시오리와 시미코의 밤의 물고기>

불귀의 객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

이노아타마 마을에는 시미코의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전설의 헌책방이 있다. 그곳은 이노아타마 마을의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헌책방 순례자들을 잡아먹으려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으니 자신의 서재에 꼭 채워넣고 싶은 결본이 있다면 마을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저절로 그 헌책방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집 지붕 위에 또 집을 이어 짓고, 집 옆에 또 집을 지은 마치 암세포가 증식을 한 듯한 괴상한 모양의 집이 바로 책 수집가들 사이에 “지옥의 헌책방”이라 불리는 곳이다.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아 이 집을 방문한 시미코는 이 집 입구의 책장을 보자마자 “낡고 더러운 책들뿐이야. 그것도 문고판이나 싸구려 소설책, 만화책 같은, 100엔 균일 판매대에나 놓일 책들뿐이군”이라며 한심해했지만 점점 책방의 내장 속을 따라 들어가다가 온갖 종류의 책에 미친 자들을 만나고 시미코 자신도 루 콘토스의 <직립어류> 하권을 발견하고는 눈이 돌아 상권을 찾기 전에는 안 나간다며 책의 지옥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시오리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던 곳이다. 그곳은 시미코의 아버지가 자신이 실종신고가 된 줄도 모르고 소장 중인 전 9권 <무로이 교란 전집>의 결권인 4권을 찾아 헤맨 곳이며 온갖 전설의 책들이 있다는 곳이다. 그러나 조심하라. 그곳은 책의 개미지옥이 있고 책에만 정신이 팔렸다간 불귀의 객이 된다.

너무나 많은 책과 DVD 때문에 이사하기가 두려워 못된 주인이 전세금을 터무니없이 올려도 아무 말 못하고 해마다 꼬박꼬박 돈을 지불하는 공포영화 DVD 수집광인 가난한 A선생. 지진이나면 책이 무너져 압사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책의 무게 때문에 방바닥이 아래층까지 무너져내릴까봐 발을 들고 살살 걷는 책 수집광 B씨. 여름이 가기 전 이노아타마 마을의 방문을 권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