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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만화방] 하야시다 규 <도로헤도로>
오승욱(영화감독) 2017-11-23

점액질의 만화

만화의 첫 페이지를 열면 도마뱀 머리의 사내가 입을 쩍 벌리고 사람의 머리를 반 이상 삼키고 있다. 침과 피가 낭자하다. 도마뱀 머리에 삼켜진 사람이 소리친다. “누가 있어! 입속에 사람이 있어!” 도마뱀의 목구멍 속 깊은 곳에서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와 삼켜진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너는 아니야”라 말하고는 사라진다. 박력이 넘치는 만화 <도로헤도로>의 첫칸이다.

만화 <도로헤도로>를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 홍대 앞 만화서점 북새통 진열대 앞에서였다. 나는 이 만화책 앞에 서서 이 만화가 재미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도마뱀 머리를 한 건장한 사내가 전투복을 입고 서 있는 시뻘건 전신상이 표지에 그려져 있었고 만화의 내용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비닐에 싸인 만화책의 표지 질감은 우둘투둘 뱀가죽을 흉내낸 것이었는데 나는 망설임 끝에 책을 내려놓고 다른 만화를 고르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 이후로도 몇번이나 발음하기 어려운 제목의 이 만화책 앞에서 꽤나 망설였다. 한번은 나에게 만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주고 곧잘 추천까지 하는 친구에게 이 만화가 어떤 만화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역시 이 만화의 정체를 잘 몰랐고 선뜻 손이 안 가기로는 나와 마찬가지라며 뭔가 굉장히 복잡해서 읽으면 머리가 아플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후, 이 만화의 후속편이 나오고 책의 권수가 점점 많아져도 망설이기를 계속했었다. 그 망설임은 이 만화의 표지에 그려져 있는 그림체 때문이었다. 어둡고 마이너 취향인 건 그렇다고 해도 이 만화의 그림체는 회화적이었다. 나는 경험을 통해 이런 회화적인 그림체의 만화들이 그림은 대단히 훌륭하지만 너무 산만하고 복잡해서 친구의 말처럼 머리가 아플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화적인 그림체의 만화들은 대개 표지 그림은 그럴듯하지만 정작 속을 보면 너무 많은 선들이 난무하여 이야기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림에 치중하는 만화들 중에는 정확하게 나뉘어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할 칸들이 그림 때문에 소홀하게 취급되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화는 회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집중해서 읽기 좋게 선과 칸이 단순화되고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니헤이 쓰토무의 예전 만화가 그 예인데, <브레임>과 <바이오 메가>는 흥미로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림체와 칸 나누기 때문에 읽기가 어려웠다. 근래의 니헤이 쓰토무는 <시도나이의 기사>에서 칸과 그림체를 간결하게 정리해서 성공했다. 그림을 공들여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체는 회화적이지만 인물을 그리는 표현은 매우 간결하다.

<도로헤도로> (사진 DOROHEDORO ⓒ 2002 Q-HAYASHIDA / SHOGAKUKAN)

진흙과 구정물

이 만화는 구입했다가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6년간 서너 차례 망설이기만 하고는 결국 연을 못 맺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지난여름 알라딘 직배송 중고책 판매에 이 만화가 1권부터 5권까지 결권 없이 매물로 올라왔다. 책값이 반값이었다. 반값의 유혹에 굴복한 나는 주문을 했고, 만화의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예상대로 많은 선들이 난무하는 회화적인 만화라는 것에 ‘이거 또 실수를 했군’ 하며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보통의 만화를 보는 시간의 배를 투자하여 꼼꼼하게 읽어야 했는데 그림을 보기 힘들 것이라는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회화적인 하야시다의 그림체는 집중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개의 선들로 인물을 그리고 심지어는 밑그림을 그린 연필 선을 그대로 남겨놓기도 한다. 게다가 만화의 대부분 장면에서 피와 침, 분비물이 난무하여 매우 복잡하고 산만해질 위험이 있는데 그는 그것을 극복해낸다. 하야시다는 차원이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인물 위에 피와 타액을 덧씌우고도 그림이 지저분해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인체의 데생은 물론이고 만화의 한칸 안에서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알고 있다. 게다가 박력 있는 펜선을 가지고 있다. 그림을 그렸던 나의 경험상, 남성보다 더 박력 있는 그림을 그리는 여성을 많이 봤는데, 하야시다 역시 힘차고 박력 넘치는 그림을 그리는 여성이었다.

하야시다의 <도로헤도로>는 점액질의 만화다. ‘도로’는 ‘진흙’이고 ‘헤도로’는 ‘구정물’이다. ‘진흙과 구정물.’ 살과 뼈를 녹이는 구정물 연못이 이 만화의 인물들이 기이한 연을 맺게 되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어둡고 축축한 지하 복도와 쓰레기가 즐비한 세상이 이 만화의 배경이다. 주인공 중 하나인 마법사의 무기가 모든 것을 버섯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이니 축축하고 어두운 것으로는 끝까지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타액과 흥건한 피가 만화의 칸에 흘러넘치고, 처참하게 절단된 시체 앞에서 등장인물들은 시도 때도 없이 구토를 한다. 등장하는 그 어떤 주인공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어 손발이 버섯이 되거나 머리가 잘리고 녹아내리지만 절대 하드고어 만화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만화는 마법사의 세상이고, 치유의 마법사와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 있고, 죽은 자를 되살리는 마법과 주인공들의 원념이 끓어넘치는, 활력이 가득한 유쾌한 만화이기 때문이다.

<도로헤도로> (사진 DOROHEDORO ⓒ 2002 Q-HAYASHIDA / SHOGAKUKAN)

올해의 발견

<도로헤도로>는 마법사들이 사는 세상과 그들이 마법으로 만든 문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마법을 못하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 둘로 나뉘어 있다. 마법사들은 평범한 인간들을 마법 수련의 실험용 쥐 정도로만 생각한다. 마법사들은 마법으로 만든 문을 통해 인간들이 사는 지옥 같은 도시로 들어와 인간들을 벌레로 만들거나 버섯으로 만들어버리는 수련을 하고는 문을 통해 자신들의 마법사 도시로 떠나버린다. 마법사들에 대한 증오가 넘치는 인간들은 마법 수련을 하러 자신들의 세상으로 넘어온 마법사들을 사냥하고 살해하고, 또 어떤 자들은 마법사들을 동경하여 자신의 사지가 녹아내리고 찢어지기도 하며, 부모 형제 모두를 배신하고 제물로 삼을지라도 마법의 힘을 얻어 마법사가 되려는 자들도 있다.

이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예외없이 과거에 얽매이거나 사로잡혀 있다. 이 만화의 주인공 중 하나인 도마뱀 머리를 한 사내 카이만은 자신이 왜 도마뱀 머리가 되었는지, 기억을 잃어버리기 이전의 나는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매력적인 여주인공 니카이도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숨기고 마법사들을 증오하는 인간들과 친구로 지낸다.

1999년에 연재를 시작한 이 만화는 주인공들의 과거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잡지 폐간으로 잠시 중단한 시기를 포함해 18년을 연재해왔다. 이제 마지막에 가까워진 이 만화의 결말도 흥미진진 하지만 하야시다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주인공들이 가차 없이 죽어나가고 만화책에서 걸쭉한 액체가 흘러내릴 것 같으며, 알아내봤자 죄악에 얼룩진 아느니 못한 과거를 알아내려는 주인공들의 고군분투 하나뿐인 이 매력적인 만화를 6년간 망설이다 연을 맺게 된 것은 나에게 올해 최고의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