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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만화방] <황야의 소년 이사무> 야마카와 소지 원작·가와사키 노부루 그림
오승욱(영화감독) 2018-01-18

소년, 총을 쥐다

<황야의 소년 이사무>

기구한 운명의 소년이 있다. 그는 일본인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나 젖도 떼기 전에 악당들이 일으킨 사고에 휘말려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황량한 미국 서부의 황야에 버려진다. 다행히도 젖먹이는 사금광산의 노동자들에게 구해져 ‘이사무’란 이름을 얻고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사금광산에 홍수가 밀어닥쳐 모두가 죽고 모든 것이 떠내려가버린다. 홍수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사무는 그와 평생의 악연을 맺게 될 만화 사상 최악의 캐릭터 윈 게이트 삼부자의 손에 거두어진다. 무법자라기보다는 살인마 집단에 가까운 윈 게이트 삼부자는 3살짜리 이사무를 온갖 학대를 하며 그를 살인도구로 키운다.

피할 수 없는 폭력의 굴레

정글에서 자라난 모글리에게는 따뜻한 모정을 지닌 늑대 어미가 있었고, 자신을 만든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지만 코주부 박사와 친구들의 보살핌이 있었던 아톰과 달리 이사무는 윈 게이트 삼부자의 학대와 폭력 그리고 리볼버밖에 없는 끔찍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사무는 살인마들에게서 사격술, 기마술, 생존술을 배운다. 드디어 10살이 되는 해. 타이거 마스크가 호랑이굴에서 배운 것을 테스트받고 레슬러로 태어나듯, 소림승이 십팔동인이 지키고 있는 소림동인진을 통과해 소림통천문을 열어야 하듯, 이사무 역시 7년간 배운 살인기술을 테스트받는 날이 온다. 이사무의 실력은 10살짜리 소년의 것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뛰어나 윈 게이트 삼부자와 맞먹을 정도였다. 윈 게이트 삼부자는 이사무의 실력 테스트의 마지막 관문으로 살인을 지시한다. 사람을 죽이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이사무는 윈 게이트 삼부자 갱단의 일원이 되는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10살 소년 이사무는 바위 뒤에 숨어 길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려 한다. 멀리서 말을 탄 사내가 다가온다. 총을 겨누는 이사무. 그러나 그는 사람을 쏠 수가 없다. 윈 게이트 삼부자가 총을 못 쏘는 이사무를 폭행하며 사람을 죽일 것을 강요하지만 소년 이사무는 끝내 사람을 쏘지 못한다. 이사무의 총구를 벗어나 사라지는 사내.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황야를 떠도는 이사무의 아버지였다. 살인마 갱단과 함께 살아가며 사람을 쏘는 것을 거부하는 이사무에게 더욱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악행을 저지르는 일행을 따라다니다 보니 결국 사람을 쏘아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사무는 사람을 안 죽이고 쓰러뜨리려 팔과 다리를 쏘지만 총 맞은 자는 이사무에게 결사적으로 반격을 시도하고 이사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공격하는 자에게 총구멍을 낸다. 온몸에 총을 맞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피해자. 일격에 죽이느니만 못한 참담하고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황야에서 이사무는 결국 살인을 할 수밖에 없다.

마카로니 웨스턴 소년만화는 어떻게 탄생했나

1970년대 초 일본의 <소년 점프>는 대단히 흥미로운 만화잡지였다. 소년 만화잡지의 후발주자였던 <소년 점프>는 살아남기 위해, <내일의 죠>와 <거인의 별>이 연재되던 당시 최고의 잡지 <소년 매거진>과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와 <표류교실> <사이보그 009>의 <소년 선데이>와는 다른 차별점을 만들어 그들이 목표로 한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까지의 소년 독자층을 사로잡을 만화를 연재해야만 했다. 그들은 그림이 좀 모자라더라도 에너지 넘치는 신인 만화가를 등용하여 소년 독자들을 공략했고 표현의 수위가 높은 만화까지 연재했다. 그 결과 70년대 초 <소년 점프>에는 무시무시한 폭력 야구만화 <아스트로 구단>부터 소년 독자들의 어머니들이 가장 증오했던 나가이 고의 <파렴치 학원>과 함께 반전 만화 <맨발의 겐>이 동시에 실리는 잡지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요리 만화의 효시라 할 <식칼의 명인 아지헤이>와 같은 기발한 만화까지 연재되었다. <소년 점프>의 편집장 나가이와 오랜 은원관계였던 <거인의 별>의 가와사키 노부루는 1950년대 소년 소설 <황야의 소년>을 원작으로 해 당시 <소년 점프>의 분위기에 걸맞은 각색을 하여 <황야의 소년 이사무>를 그리게 된다. 애초 서부극 영화의 애호가였던 가와사키 노부루는 이탈리아제 마카로니 웨스턴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서부극 만화를 그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황야의 소년 이사무>이다. 소년이 주인공인 만화와 마카로니 웨스턴의 결합이라니!

가와사키 특유의 정밀한 데생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이마 한가운데 총구멍이 난 채 쓰러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황량한 사막에서 뒹군다. <아톰> <타이거 마스크> <신조인간 기카이다> <사이보그 009> <가면 라이더>의 주인공들처럼 참혹한 악의 소굴에서 악인의 피를 받아 태어났지만 정의의 편에 서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맥을 이어받은 이사무는 아톰과 비슷한 10살의 어린 소년이다. 다만 다른 것은, 한쪽은 미래의 세계이고 다른 한쪽은 인종차별과 살인, 폭력이 난무하는 1800년대 초 미국 서부라는 것이다. 10살짜리 소년에게 미국 서부는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다. 이사무는 참담한 전쟁에 내몰린 아프리카의 소년병이고, 한국전쟁의 소년병이고, 말레이 전선으로 출정하고 가미카제에 지원한 소년병이다. 이렇게 잔혹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만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연령이 높은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이 주인공이었지만 <황야의 소년 이사무>는 그것을 깨버렸다. 10대 소년이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에 휘말리는 것을 보는 것은 어쩐지 불편하다. 그래서 당시 <소년 점프>의 편집자였던 니시무라 시게오는 <황야의 소년 이사무>(한국에서는 1975년 MBC에서 <서부소년 차돌이>로 방영되었다)가 인기 1위의 만화였고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졌지만 잡지 판매고에 영향을 줄 만큼의 히트는 아니었다고 한다. 소년 잡지의 독자층과 주인공의 나이를 비슷하게 하여 감정이입을 하려는 욕구는 10살 소년을 황야로 내몰아 총을 들게 하였고, 나이 드는 독자들의 수요를 맞추면 만화는 점점 잔인해지고 선정적이 되어간다. 몇년 후 이 부담을 지우고자 일본 만화는 소년의 인격을 분리시켜버린다. 악이 될 수도 선이 될 수도 있는 마왕 로봇에 10대 소년이 탑승하여 조종간을 잡게 하는 만화 <마징가Z>가 탄생한 것이다.

<황야의 소년 이사무>

최고의 시퀀스

그 모든 불편을 날려버리는 <황야의 소년 이사무> 최고의 시퀀스는 폐광촌에서 벌어진 이사무와 빅스톤의 대결이다. 이사무는 윈 게이트 부자의 아버지를 홀로 남아 지키고 있다. 아버지가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것이다, 두 아들은 의사를 찾으러 떠났다. 이사무에게는 이들 악당들에게서 벗어나기 너무나 좋은 기회다. 이때 윈 게이트 삼부자에게 어머니를 잃은 복수의 화신, 흑인 무법자 빅스톤이 폐광촌으로 들어온다. 이사무는 살인마이며 자신을 학대한 주범인 가짜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치지 못하고, 자신을 구해주었던 멋진 사나이 빅스톤에 맞서 총을 든다. 빅스톤은 자신의 어머니를 잔혹하게 죽인 윈 게이트 삼부자에게 복수하려는데 뜻밖에 자신이 구해주었던 착한 소년 이사무가 악당 윈 게이트를 지키려 하는 것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그 모든 생각은 접어두고 말 대신 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두 건맨의 머리 위에선 태양이 작열하고 그들의 시체를 뜯어먹으려는 콘도르가 맴돈다. 우물을 가운데 놓고 갈증이냐 총알이냐를 두고 대치하는 명장면은 <거인의 성>으로 최고의 만화가가 된 가와사키 노부루의 역량이 빛을 낸 최고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