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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만화방] <혼자를 기르는 법> 김정연 글·그림
오승욱(영화감독) 2018-02-22

너는 자라 고작 내가 되었지

<혼자를 기르는 법>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뒤 붓을 석유로 깨끗이 빨고, 팔레트에 남은 유화물감을 나이프로 모두 긁어모으면 만들어지는 색깔이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용했던 색들의 잔해가 한데 섞이면 검은색도 회색도 아닌 녹조류가 가득한 시궁창 물의 색깔과 비슷한 그린색의 흔적이 남은 거대한 어둠의 색깔이 만들어진다. 아깝지만 어디 쓸 곳이 없어 버려야 하는 칙칙한 색깔로 그린 만화가 있다.

이름과는 다른 현실

컴퓨터의 모니터 화면 위로 떠오르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어둠. 그 헤비한 어둠의 맨 아래에 눌러 꺼서 구부러진 담배꽁초가 그려져 있다. 꽁초 아래 ‘혼자를 기르는 법’이라는 글자. 그리고 그 아래에 ‘내가 바로 이시다 이시다’라는 소제목으로 <혼자를 기르는 법>의 출항이 시작된다. 서장(예고편)은 구약성경 첫장이 연상되는 “태초에 무한이 있었습니다”로 시작된다. 첫칸은 콧구멍처럼 생긴 무한대 기호를 손가락으로 ‘후비적’ 코를 파는 손가락. 다음 칸은 무한대 기호 속에서 나온 코딱지를 공중에 날려버리고, 코딱지를 들여다보면 그 속에 우주가 있고, 그 우주 속에 코딱지만 한 지구가 있고, 그 지구 속에 코딱지만 한 한반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20대 여성이 모로 누워 코딱지를 파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병균 덩어리 코딱지 속의 병균, 그 속의 병균인 20대 여성이 바로 만화 <혼자를 기르는 법>의 주인공이고 그의 이름은 ‘이시다’이시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사랑스런 딸의 이름을 함부로 짓겠느냐마는 남들 앞에서 “000 이시다”라고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지어준 “이시다”란 이름은 공교롭게도 힘든 일을 하는 육체노동의 현장에서 60여년이 지나도록 쓰이고 있는 일본말 “시다”와 발음이 똑같아서 애초의 의도와 달리 평생 당당하기는커녕 전문가의 수발이나 드는 비전문직의 힘겨운 생활을 전전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는 법. 이시다는 회사에 취직했지만 그는 막내이고, 회사 선배들의 심부름과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시다 신세인데 2016년에 시작된 그의 시다 생활은 2018년 초년병으로 회사를 휴직할 때까지 나아진 것이 없다. 그의 특기는 모든 종류의 접착제와 접착테이프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어 사무실에서 뭔가를 붙이거나 떼는 모든 일은 그가 전문가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가 일하는 회사는 인테리어 업체이고 그는 아직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는 창조적인 일을 맡지 못하고 있다. 회사에 취직하기 전 선배들에게 사무실에 침대가 있는 회사는 가급적 피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으나 시다가 입사하고 일년 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린 회사 간부의 사무실을 비우고 그 자리에 이층침대와 매트리스가 들어가 수면실이 생긴다. 드디어 시다는 수면실이 있는 회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가마우지처럼 죽도록 헤엄쳐 물고기를 잡아 모두 뱉어내어 주인께 바치고 그중 쥐꼬리만 한 물고기를 주인이 던져주면 그동안의 고통을 잊고 다시 목에 끈을 졸라매고 물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고단하고 씁쓸한 20대를 이시다는 보내고 있다.

그가 병으로 사무실에 결근한 에피소드가 있다. 첫칸에 이시다의 빈자리가 보인다. 두 번째 칸도 첫칸의 그림과 변함이 없지만 시다의 빈자리 앞을 오가던 사람들이 시다가 오늘 출근 안 했다며 잠시 걱정을 한다. 그가 휴직한다는 말을 듣고 “아 그런가?” 하며 자리로 돌아간다. 마지막 칸은 첫칸과 똑같은 그림의 이시다의 빈자리. 시다가 사무실에 출근을 안 했을 때, 시다가 회사에서 자리하는 위치만큼의 관심과 걱정을 하는 동료들. 시다는 사무실에서 딱 만화 네칸만큼의 존재다. “위대하고, 장엄하고, 대단하고, 심지어 고귀하기까지 하여 남들이 스스로를 낮추고 너를 높이게 될 것” 이어서 “아비처럼 무시당하고 살지 않을 것”이라 큰소리를 치며 지어준 이름 “이시다”를 가진 주인공은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고단하고 피곤한 신세다.

부모의 반대를 설득하여 서울로 입성한 시다는 고시원의 관 같은 방에 몸을 누이고 이 코딱지 같은 지상에서 방 한칸을 소유하기 위해 사무실에 여기저기서 막 이름이 불리는 신세가 되어도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리며 “죽지 않으면 다 괜찮은 건가?” 두려워하며 고단한 노동을 견뎌내고, 점심시간에는 제일 빨리 나오고 빨리 먹을 수 있는 제육덮밥을 시켜 후루룩 마시고, 남자 선배들 사이에 끼어 담배를 피우고, 집에서는 아버지가 저지른 작명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자 심사숙고하지만 결국 햄스터에게 윤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견뎌낸다. 매회 대단하다고 탄성이 절로 나오는 칸들은 회화와도 닮지 않았고, 그렇다고 전통적인 만화의 선과 그림과도 닮지 않았다. 디자이너 출신 만화가가 그린 새로운 그림의 만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중 대단했던 것이 시다가 밤에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이다. 첫칸에서 회식 자리에서 빠져나와 으슥한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시다에게 한 무리의 젊은 남자들이 다가온다. 적당히 술에 취한, 밤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젊은 남자들이다. 그들은 시다를 보자 낄낄거리며 야비하고 비루한 말을 쏟아내면서 악마로 돌변한다. 그다음 칸은 시궁창 색깔의 거대한 어둠. 그다음 칸은 그 어둠 속에서 시다가 울면서 뛰쳐나온다. 끔찍한 폭력을 단 세칸으로 묘사한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그뿐이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뒤로하고 집을 나온 시다의 에피소드 마지막 칸의 첫머리에는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왜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까요?”라는 시다의 마음속 대사가 있고, 스크롤을 내리면 점점 화면은 어두운 바닥으로 내려간다.

<혼자를 기르는 법>

드디어 주인공이 된 20대 여성

이시다의 여동생 이시리가 언니처럼 집에서 나와 살다가 지하방에 물난리가 나서 언니 시다와 함께 잠시 동거를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동생을 통해서 객관화되어 보이는 이시다의 모습. 지금까지 해수 언니, 윤발이, 회사 사람들과 마주 하면서 시다의 모습이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객관화되었다면 여동생의 등장으로 못되고, 이기적인 이시다의 또 다른 면모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혼자를 기르는 법>의 가장 좋은 점은 고통스러운 처지의 이시다의 모습을 줄타기하듯 객관화시키는 만화가의 능력인데,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객관화로 인해 여성 이시다는 독자들을 설득하고, 감동에까지 이르게 한다.

여기까지 보면 이 만화는 무척이나 어두운 내용의 만화라 생각되지만, 이 만화는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한국 명랑만화의 장엄하고 위대한 부활이자 심지어 고귀하기까지 하여 이제까지 남자주인공들이 판치던 그 모든 명랑만화를 넘어서는 걸작이다. 임창의 ‘땡이 시리즈’ , 김민의 ‘허떨이 삼촌 시리즈’ , 길창덕의 <꺼벙이>, 윤승원의 <맹꽁이 서당>, 김수정의 <아기 공룡 둘리>, 이진주의 <달려라 하니> 같은 한국 명랑만화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명랑만화에서 한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던 성인 여성이 주인공인, 전혀 새로운 만화다.

명랑만화란 무엇인가? 70년대 ‘밝고 유쾌한’ 내용의 어린이를 위한 희극 만화를 부르던 말이다. 억지로 성인을 위한 명랑만화를 찾자면 70년대 강철수가 그린 <발바리의 추억> <사랑의 낙서> 정도겠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명랑만화에 비하면 거의 없었고, <데카메론>의 한희작과 <누들누드>의 양영순에 의해 코미디 성인 만화로 길을 달리해버린다. 2000년대 웹툰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만화가 생겨났다. 컴퓨터 모니터로 마우스를 클릭해 스크롤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리면서 보는 만화다. 이 새로운 형식은 이제까지의 만화와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만화를 탄생시켰다. 그 중 “일상 툰”이라는 꼬리표를 단 만화들이 등장했는데, 일상 툰에서 그동안 표현의 기회를 얻지 못하던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용틀임을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김미숙의 <배추걸 다이어리> 이후로 20대 여성이 부모 집에서 독립하여 “혼자를 기르는” 만화들은 <혼자를 기르는 법>에 이르러 활짝 꽃핀 것이다. 2010년대는 20대 여성 ‘이시다’가 당당하게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