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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용기를 기억하기
윤가은(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8-03-08

최근 한달은 어쩌면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많은 고백들과 마주한 시간이었다. 하루하루가 참담하고 비통한 시간이었다. 오늘은 또 어떤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믿고 싶지 않은 진실들이 터져나올까, 또 얼마나 깊이 분노하고 절망하게 될까, 매일 아침 심장이 쿵쾅거렸다. 서지현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검사는 TV에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8년 전 동석자까지 있는 자리에서 겪은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 사건을 진술했고, 최영미 시인은 한 계간지에 <괴물>이란 시를 발표하며 수십년간 문단 권력을 휘두르면서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일삼아온 고은 시인을 고발했다. 그리고 극단 미인의 김수희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10여년 전 지방 공연 도중 겪은 이윤택 연출가에 의한 성추행 사건을 털어놓았다. 영화계에서 쏟아진 고백들은 또 어떠한가. 관계자도 아닌 내가 깊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매일 악몽을 꿨을 정도니 그간 고통 속에 살아온 피해자들의 심경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아주 오래전 어린 내게 진심어린 고백을 전한 다정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아이들이 친구가 되고 싶어 했던 그 친구는 예쁘고 똑똑하고 정의로운 데다 늘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세심히 챙기는 따뜻한 친구였다. 그런 그녀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을 때, 11살의 나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즐거운 수다 끝에 그 친구는 내게 불현듯 자신이 당한 성추행 경험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방과 후 모르는 아저씨가 아파트 계단을 따라 올라와 치마 속에 손을 넣었는데 어른이 나오자 바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집에 다 와서도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모르는 사람이 쫓아오면 무조건 도망가고, 그런 일이 생기면 무조건 소리쳐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건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내게도 일어났던 바로 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가 같은 종류의 일을 겪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더이상 감출 길 없어 생애 처음으로 그 일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렇게 우리는 상처를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며 조금 울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말해도 괜찮다는 것을, 아니 반드시 말해야만 정말로 괜찮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기는 전염이 강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삶에 피할 길 없이 벌어지는 여러 종류의 부당하고 가혹한 처사에 대해 조금씩 소리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숨기고 자책하느라 더 곪았던 상처들은 그제야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나가야 하는지도 점차 배우기 시작했다. 내 삶은, 우리의 삶은 그렇게 정말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 친구와는 더이상 연락이 닿지 않지만, 최근 한달 동안 매일 TV에서, 지면에서, 또 SNS에서 어른이 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소심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던 내가 어떻게 그런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하지만 내 삶에 최초로 용기를 가르쳐준 그녀와의 놀라운 하루는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들의 진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강력한 위로와 힘이 되고 있는지, 또 이 세상을 얼마나 멋지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최근 한달은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많은 용기를 발견한 시간이었다. 내 인생은, 이 세계는 당신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우리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