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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쓰리 빌보드>, 스스로를 구제하려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허지웅(작가) 2018-03-19

<쓰리 빌보드>(2017)에는 <디어 헌터>(1978)와 <쳐다보지 마라>(1973)에 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에 관해서는 과거 이 지면에서 한회차를 통째로 할애해 소개한 적이 있다.

영화 속에서 다른 오래된 영화들의 흔적을 찾는 건 즐거운 작업이다.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경우라면 영화사라는 거대한 흐름이 개별의 영화들에 어떤 방식으로 스며들어 영향을 주고 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어 즐겁다. 정말 재미있는 건 감독이 의도했을 경우다. 노련한 이야기꾼은 이야기가 도달하고자 하는 결승점 혹은 고취시키고자 하는 바에 관해 작품 안에서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굳이 작품 안에서 창작자의 주제의식 따위를 설명하고 싶다면 영화를 만들 것이 아니라 거리에 나가 웅변을 하거나 사설을 쓰는 게 낫다. 다만 어떤 감독들은 이야기에 질감을 더하고 해석에 일종의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오래된 영화들의 특정한 장면이나 대사를 활용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영화 속 장면에서 어느 낡은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면, 거기에는 의도가 있다.

<쓰리 빌보드>로 돌아와보자. <쓰리 빌보드>는 범죄로 딸을 잃은 어머니가 수사 당국을 책망하는 메시지를 마을 외곽 대형 광고판에 실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누군가는 여기서 프랜시스 맥도먼드우디 해럴슨 그리고 샘 록웰의 빼어난 연기를 볼 것이다. 누군가는 매우 효과적인 유머들을 통해 무능한 경찰 권력이 조롱당하는 걸 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장 잘못된 순간에 가장 잘못된 말을 내뱉어버린 어머니의 후회를 읽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차원은 보다 보편적인 데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 말이다.

<쓰리 빌보드>는 신도 희망도 없는 세상에 자력구제를 위해 나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영화다. 힌트처럼 심어둔 두편의 영화 그리고 그것을 언급하는 행위를 통해 감독이 극복하고자 하는 것들에 관해 함께 생각해보자.

우선 영화의 도입부를 떠올려보자. 타이틀 이후 첫 번째 시퀀스. 주인공이 빈 빌보드를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두 번째 시퀀스. 광고업자를 찾아가서 계약을 한다. 세 번째 시퀀스. 샘 록웰이 경찰차 안에서 ‘스트리트 오브 러레이도’를 부르다 말고 “마우!”라고 여러 번 소리친다. 그리고 주인공의 광고판을 발견한다. 여러분이 <디어 헌터>의 팬이라면 눈치챘겠지만, 샘 록웰이 “마우”를 외치는 대목은 <디어 헌터>의 전설적인 러시안룰렛 장면에서 가져온 것이다. 베트남전쟁 중 포로로 잡힌 크리스토퍼 워컨과 로버트 드니로에게 러시안룰렛을 강요하며 위협하는 적군이 반복해서 소리치는 대사다.

영화의 중반. 샘 록웰의 어머니가 주인공을 괴롭히고 싶으면 그 주변 사람을 먼저 괴롭히라고 조언한다. 샘 록웰은 주인공의 친구를 마리화나 소지 혐의로 체포한다. 이에 화가 난 주인공이 항의를 하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한다. 주인공이 머리에 밴디지를 두르고 등장한다. 그녀가 늘 군복처럼 보이는 점프 슈트 스타일의 작업복을 입고 다닌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장면은 머리에 밴디지를 두른 <디어 헌터> 속 크리스토퍼 워컨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앞선 두 장면을 통해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하는 주인공과 샘 록웰이 연기하는 경찰은 각각 <디어 헌터> 속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겹친다. 사실 <쓰리 빌보드>의 마틴 맥도나 감독과 샘 록웰은 전작 <세븐 싸이코 패스>(2012)에서 크리스토퍼 워컨과 작업하면서, 인터뷰를 통해 <디어 헌터>의 광적인 팬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디어 헌터>에서 크리스토퍼 워컨이 어떻게 되는지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베트남전쟁에서 살아남지만 러시안룰렛을 동원한 폭력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싸웠지만 그에 잠식되어버린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로버트 드니로는 러시안룰렛만 반복하며 유령처럼 살고 있는 워컨을 발견한다.

<쳐다보지 마라>의 인용은 좀더 직접적이다. 장면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대사를 통해 영화 자체가 언급된다. 샘 록웰의 어머니가 주인공을 괴롭히고 싶으면 주변 사람을 먼저 괴롭히라고 조언하는, 앞서 설명한 시퀀스다. 어머니가 계속해서 도널드 서덜런드가 나오는 영화만 보고 있으니 샘 록웰이 핀잔을 준다. “또 도널드 서덜런드 영화예요?” “마음에 들어. 머리 스타일이.” “머리 스타일이요? 풋.” “여기서 도널드 서덜런드 딸이 죽잖아.” “언제나 그렇죠.” “그래서, 그 광고판 여자는 어떻게 됐니?” 여기서 언급되는 “도널드 서덜런드 딸이 죽는 영화”가 바로 <쳐다보지 마라>다. <쓰리 빌보드>의 엄마처럼 <쳐다보지 마라>의 부모도 딸을 잃었다. <쓰리 빌보드>처럼 무능한 경찰과 무책임한 성직자가 등장한다. 즉 체계도 신도 부재하니 당사자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도널드 서덜런드가 연기하는 아버지는 딸이 왜 죽었는지에 관한 해답에 이르기 위해 이국에서의 여정을 거친다. 신비주의와 공포로 얼룩진 여정 속에서 그 모든 경고와 암시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문제에 몰입한 나머지 문제 자체에 먹혀버리고 만다. 그리고 마침내 소름끼치는 파국을 맞는다.

<디어 헌터>와 <쳐다보지 마라>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어섰다. 아군의 도움 없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살아남아야 했고, 경찰이나 사제의 도움 없이 딸의 죽음에 관련된 미스터리를 풀어야 한다. 이들은 모두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면하고 맞서 싸워야 했던 폭력의 체계 안에 갇혀버리고 끝내 파멸한다.

<쓰리 빌보드>의 주인공도 같은 수순을 밟는다. <디어 헌터>의 프레임 안에서 주인공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흡사 러시안룰렛을 하고 있는 사람마냥 상대보다 거칠고 대담하게 행동하려 매 순간 애쓴다. <쳐다보지 마라>의 프레임 안에서 딸의 죽음에 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분투한 나머지 이에 집착하며 조금씩 더 큰 파국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영화는 중반에 이르기까지 <디어 헌터>와 <쳐다보지 마라>라는 힌트를 제시하면서 이대로 가다간 저 두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그녀 또한 끝내 파멸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나를 구원할 신도, 나를 구제할 체계도 부재한 세계. 거기서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일어선 사람들이 왜 항상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경찰서 방화 장면에 이르러 크리스토퍼 워컨과 도널드 서덜런드와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잔상이 겹치는 순간, 영화 <쓰리 빌보드>는 전환을 맞는다. <쓰리 빌보드>는 스스로를 구제하려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앞선 암시와 징조들을 극복해내고자 한다. 그것은 우디 해럴슨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디 해럴슨은 경찰 서장이다. 주인공의 광고판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처한다. 여론은 서장의 편이지만 정작 그는 마음이 편치 않다. 서장은 주인공의 행동에 당황하고 언짢아하면서도 그녀가 왜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 그는 이해할 수 있다. 혼자 힘으로 버티며 싸워나간다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기암을 앓고 있는 서장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 대목에 이르러, 그의 선한 의지는 묘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간다. 살면서 한번도 인정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인정으로, 희망이 절실한 사람에게는 희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를 돕기 시작하면서 작은 진전을 이루어나가는 마술 같은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기댈 수 있는 신적 존재도, 제도적 안전장치도 없이 혼자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피폐해진다. 싸우기 위해 거칠어진다. 불신만 남는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사람들끼리도 상대를 증오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상대에게서 발견했을 때, 우리는 공감과 이해보다 질타와 선긋기를 우선하기 마련이다. 버티어 살아남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끝내 우리가 싸웠던 어둠 안에 갇히고 만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남은 탓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은 것이다.

끝까지 버티고 싸우되 피폐하고 곤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선의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며 서로를 도울 것. <쓰리 빌보드>는 자력구제를 위해 일어선 사람들 사이의 선한 의도와 행동 그리고 연대만이 <디어 헌터>나 <쳐다보지 마라>와 같은 비관적 결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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