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무해한 남자,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와 <나의 아저씨> 사이
임수연 사진 백종헌 2018-05-24

박현진 감독, 시청자 복길, 진명현 무브먼트 대표, 황효진 칼럼니스트가 대중문화 속 남성 캐릭터에 대해 말하다

※대담 참가자 중 복길(트위터 닉네임)님은 본인의 요청으로 사진을 싣지 않습니다. 진명현, 황효진, 박현진(왼쪽부터).

그 어느 때보다 미디어에서 남자 연예인의 매력을 설명할 때 ‘무해하다’는 형용사가 인기를 얻고 있다.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특히 여성에게 폭력적이지 않고 예의를 갖춘 것이 중요한 미덕이라는 것이다. 5월 5일자 <한겨레>에서는 “‘무해’한 남성들이 전하는 경고”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이 현상을 짚기도 했다. 특유의 바른 이미지로 전 연령층에 호감을 얻고 있는 배우 박보검, 드라마 <사랑의 온도>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각각 연하남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양세종·정해인 등이 무해한 남자의 대표 주자로 꼽히고 있다.

무해함이 남성의 미덕으로 떠오른 것은 여성 소비자들이 콘텐츠 속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때와 시기상으로 거의 일치한다. 유행에 민감한 광고 업계에서는 무해한 이미지의 남자들이 특히 여성 소비자들에게 선호되는 것은 ‘안전’이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진아 프리랜서 광고 플래너는 “여혐 범죄, 불법 촬영, 데이트 폭력 등 여성의 현실이 위협받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반면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2>를 연출한 정효민 PD는 “나쁜 남자가 전혀 먹히지 않는 시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세가 전적으로 바뀌었다기보다는 주목할 만한 수치로 하나의 흐름이 추가된 것 같다”는 생각을 밝혔다. 이렇게 무해함이 중요한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고 이에 힘입은 스타가 탄생하고 있는 업계의 풍경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각각 칼럼니스트·일반 시청자·마케터·연출자 입장에서 대담에 참석한 이들은 ‘무해한 남자들’에게 사람들이 주목하는 이유는 물론, 이런 흐름 속에 가려진 어떤 유해한 징후를 놓치지 않으며 열띤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해한 이미지, 예컨대 예의 바르고 착하고 적어도 여자에게 나쁜 짓을 하지 못할 것 같은 남자들이 인기를 얻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였다. 이 주제를 들었을 때 특별히 떠오른 인물이 있나. 그들이 인기를 얻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황효진_ 아무래도 <효리네 민박2>의 박보검이 가장 먼저 생각나더라. 다른 사람들의 무해한 이미지는 본인이 연기하는 캐릭터 때문에 만들어졌다면 박보검은 본인의 원래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어필이 됐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예의를 차리고, 일할 때 위생 관념도 철저히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웃음) 사실 지금까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나온 남성들은 잘 씻지 않거나 굉장히 무례하고 생활 습관이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인기를 얻지 않았나. 물론 얼굴이 박보검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가 보여준 깔끔한 태도 때문에 시청자 반응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또한 <윤식당2>의 박서준은 방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매사에 성실한 태도를 보여줬고, 타인에게 젠틀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서빙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들이 더욱 부각되었다.

=박현진_ 최근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정해인을 필두로 거슬러 올라가면 박보검·송중기가 나온다고들 하더라. 그런데 이렇게 묶어서 보니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성상이 새롭게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것이지 이런 이미지의 남자들은 예전에도 있었다. 가령 ‘밀크남’이라고 하는 부드러운 남자 캐릭터를 좋아하는 시장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심지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92) 당시에도 최대치(최재성)가 아닌 장하림(박상원)을 더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웃음) 다만 TV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부분에 시청자가 반응을 하는 경향이 분명히 보인다. <효리네 민박2>의 박보검이 손을 자주 씻고 세면대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호감을 표시한다. 또한 예전 드라마에서는 강한 남자와 부드러운 남자가 여자를 두고 경쟁하면 결국 주인공이 겉은 거칠지만 알고 보면 사연이 있어 연민이 가는 남성에게 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요즘엔 그게 뒤집히기도 하더라. 이러한 흐름에 여자들이 반응을 하고, 셀링 포인트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진명현 대표

=진명현_ 10여년 전 일본 멜로영화 혹은 그것을 따라하고 있는 지금의 대만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이들은 계속 있었지만 천편일률적인 한국의 콘텐츠에서는 자신의 취향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배우 가세 료 같은 식물남의 느낌을 가진 양세종이 나오니까 자신의 스타일을 발견했다며 반가워하는 거다. 사실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이 인기를 얻었던 것도 다양한 101명 중 자신의 취향을 선택해서 원석을 가꾸어볼 수 있겠다는 재미를 줘서 아닌가. 더불어 이제는 비주얼에서도 강함과 부드러움을 잘 섞은 캐릭터들도 눈에 보인다. 옷을 입으면 말라 보이지만 옷을 벗으면 잔근육이 보인다거나 하는 캐릭터가 드라마에 많아졌다.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 이미지가 전혀 다른 사람을 이른바 ‘갭모에’ (어떤 사람이 상반된 매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라는 뜻의 신조어) 때문에 좋아한다고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프로듀스 101> 시즌2의 강다니엘을 빼놓을 수 없다. 키가 크고 거친 모습도 있지만 강아지처럼 해맑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의 매력 포인트다. 예전에는 ‘늑대 같은 남자’가 인기를 얻었다면 지금은 ‘대형견’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거다.

=복길_ 개인적으로 ‘부드러운 남자’라는 건 언제나 눈속임이었다고 본다. (웃음) 하지만 영화 <차이나타운>(2014)이 어떤 기점이 됐다는 생각은 했다. 그 작품이 비록 흥행은 못했지만 당시 박보검이 전형적인 캔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영화가 일종의 성 반전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런 시도 자체를 소비하는 여성들이 있다. 강함 속에 감춰진 부드러움 같은 게 아니라 그저 부드럽고 무해한 것도 이제 전면에 내세워준다며 말이다. 예전에는 페미니즘을 그냥 학교 교양과목 정도로 생각하던 여자들도 지금은 모이면 당연하게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는 시대다. 페미니즘적으로 남성 연예인을 소비하고 싶은 여성 소비자들이, 남자들에게 이렇게 좀 해보라고 종용하는 의미에서 무해함을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상적이지 않은 콘텐츠가 난무하며 망쳐놨던 시장을 다시 정비해서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 말이다. 정해인이나 양세종은 이런 분위기의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다만 박서준은 이 계보가 아닌 것 같다. 박서준은 오히려 말도 잘하고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오빠’ 이미지에 가깝다. 강다니엘은 무해한 남자들을 띄워주는 것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강인한 몸이나 사투리를 쓰며 ‘누나’를 부르는 경상도 남자로 인기를 모은 게 더 크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서준희 캐릭터의 명암

-무해한 남성상의 인기를 보여준다며 최근에 빈번하게 언급되는 작품은 아무래도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서준희(정해인)가 아닐까 싶다. 서준희는 상대를 좋아하지만 일부러 깎아내리는 말을 일삼는 ‘츤데레’나 대놓고 폭력을 저지르는 ‘나쁜 남자’에서 벗어나 있다고들 한다. 적어도 여자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 나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캐릭터에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박현진 감독

박현진_ 다른 드라마였다면 남자주인공이 여자친구의 과거를 알게 된 후 괴로워하며 화를 냈을 텐데 서준희는 그러지 않는다는 이유로 캐릭터의 매력을 띄워주더라. 하지만 서준희도 윤진아(손예진)의 옛 남자친구 이규민(오륭)의 집에 찾아가 노트북을 부순다든지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정해인의 무해한 이미지 때문에 묻히고 있을 뿐이지 기존 드라마에서 남자 캐릭터들이 했던 행동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드라마는 서준희라는 캐릭터의 매력에 자신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구남친을 등장시키고, 서준희가 사건을 해결하는 식의 전개를 자꾸 한다. 윤진아에게 ‘곤약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서준희야말로 개성 없는 무색무취한 곤약같은 캐릭터다. 자기 직장이 있고 집이 있다는 것 외에 무슨 매력이 있나.

황효진_ 무해한 느낌으로 4살 어린 연하남 캐릭터를 만들어놨지만, 그의 매력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기존 남자 캐릭터들이 갖고 있던 “오빠 믿지?” 같은 포인트를 자꾸 넣는다. 35살 여성이 어린 남자를 사귀는 것이 마치 페미니즘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를 넣었지만 여성 시청자 입장에서 불쾌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윤진아가 위험에 처했을 때 오히려 화를 내며 그의 처신을 나무란다거나,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이규민이 계속 등장한 것이 정말 유해했다. 이 사람이 계속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을 거울처럼 보여주면서 역시 문제가 많은 서준희를 좋은 남자로 포장한다. 또한 드라마 자체가 극중에서 남자가 4살 어린 것이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데 되게 남성적인 시각이다. 윤진아가 직장 상사들에게 더이상 성희롱을 참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의 맥락도 이상했다. 나이 많은 여자가 어린 남자와 사귀면서 자존감을 획득하고 그 결과 바른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비친다.

진명현_ 그 장면 때문에 드라마가 다루는 회사에서의 권력관계 같은 좋은 설정이 날아갔다. 또 전반적으로 극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서준희의 누나 서경선(장소연)이 윤진아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지 않고서는 납득이 안 가는 장면이 많다. (웃음) 어렸을 때부터 친구 사이라는데 둘 외에 친구도 등장하지 않는 등 드라마의 공간을 너무 좁게 만들어서 보고 있기에 갑갑하다. 무엇보다 서준희의 캐릭터가 너무 얇게 묘사되고 있다. 윤진아와 달리 게임회사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분당에서 차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갑자기 상암동 DMC에서 헤드폰을 끼고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는 게 이상하다. (일동 폭소) 도대체 어디에 차를 세워두고 어디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온 거지? 심지어 이게 첫회 첫 등장 신이었다. 너무 캐릭터의 멋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 아닌가.

복길_ 한국에서는 지고지순하고 청순한 여자를 파는 방법은 너무 많이들 아는 데 반해 소위 말하는 예쁜 남자가 어떻게 팔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매뉴얼이 없다. 서준희는 그런 상황에서 탄생한 캐릭터라 어떻게 만들고 소비해야 하는지 어색해들 한다. 사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가장 좋은 결말은 서준희도 결국 이규민과 똑같은 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웃음) 이렇게 문제 많은 캐릭터가 성공적인 연하남 캐릭터의 모델로 남는 건 좀 두렵다.

<효리네 민박2> 박보검

남성 캐릭터를 납작하게 만들지 말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대척점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드라마가 <나의 아저씨>다. 사채업자 광일(장기용)이 지안(이지은)을 폭행하는 장면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안건으로 상정될 만큼 논란이 됐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는 중년의 직장 상사가 주인공에게 성희롱을 일삼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주인공과 유일하게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나의 아저씨’가 된다. (웃음)

황효진_ 얼마 전에 드라마를 자세히 보게 됐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작품이더라. 참고로 ‘나의 아저씨’ 박동훈(이선균)도 이 드라마에서는 무해한 존재로 묘사된다. (웃음) 나는 어린 여자보다 스물 몇살이 많은 아저씨지만 결코 해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 어필하고 있다. 대기업 건축 사무실에서 45살의 부장 박동훈과 20살 인턴사원 이지안은 같은 계층이 될 수 없는데 둘 다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으니 연대하고 소통한다는 식으로 이상한 물타기를 한다.

복길_ 현실에서 어린 여직원을 성희롱하는 아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 세상이 그들을 박해하고 있다는 건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나의 아저씨>와 같이 방영되고 있기 때문에 좀더 좋은 드라마처럼 비치고 있는 거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오늘과 같은 논의를 할 수 있는 드라마지만 <나의 아저씨>는 문제작이라고 표현하기도 거부감이 든다.

황효진_ 지금 시대에 <나의 아저씨> 같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은 명백한, 페미니즘에 대한 일종의 반격인 ‘백래시’(backlash)다. 박동훈이 “너랑 이렇게 밥을 먹으면 회사에서 말이 돈다”라며 이지안을 밀어내는데, 이지안쪽에서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목적으로 같이 밥 먹고 술을 마시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유도해낸다. 이런 구도가 보여주는 바가 너무 분명하지 않나. 중년 남성들은 회사에서 그냥 여직원들이 불쌍해서 밥을 사주는 것일 뿐인데 왜 사회가 나쁘게 보느냐는 거다. 무해하게 보이려 하지만 사실은 너무 유해하다. 저출산의 원인을 고학력·고소득 여성에게 돌리며 여성의 하향 선택 결혼을 위한 문화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담겨 있던 어느 정부 보고서도 떠올랐다. 일종의 음모 같다. 예전 드라마 주인공들에 비하면 가진 것도 잘난 것도 없는 사람들인데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로맨스의 주체이자 히어로가 된다. 그러기 위해 여자들은 계속해서 곤경에 빠진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정해인

-무해한 이미지가 콘텐츠의 유해함을 덮거나, 혹은 만듦새의 부족함을 가리는 경우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요즘 미디어에서 그리는 남자 캐릭터에 아쉬운 부분은 없나.

진명현_ <윤식당2>의 박서준이 요리를 하거나 드라마 <사랑의 온도>에서 양세종이 파스타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 요리하는 남자를 여자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남자가 요리를 하는 것 자체에 대단한 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박서준과 스페인을 소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남자들은 훨씬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왜 그렇게 캐릭터를 납작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30대 중·후반 남자들에게 요리는 그냥 다 해야 하는 일인데 매체에서 특별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아무래도 인스타그램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남자들이 SNS에서 멋있어 보이기 위해 올리는 사진이 세 종류가 있다더라. 차 키와 운전하고 있는 자신의 손, 운동하는 모습 그리고 요리. (웃음)

완전무결한 인성에 대하여

황효진_ 우리가 여성들이 무해한 이미지의 남자들을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렇게만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여자들은 무해한 남자를 좋아하니까 무해한 남자들을 보여달라고 하면 시장논리밖에 안 된다. 매번 남성 캐릭터의 나쁜 점이 무엇인지 정확한 비판을 해줘야 한다.

복길_ 무해한 이미지의 남자들이 소비되는 경향을 좀더 메타적으로 봤으면 좋겠다. 하도 문제 많은 캐릭터들이 많았으니까 저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다. 콘텐츠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유행을 베껴내는 시기가 있겠지만 어떤 과도기를 지나면 전보다 업그레이드된 것이 나올 테고, 이를 소비자들도 모르지 않는다. 콘텐츠 제작자들이 소비자들을 좀더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상정하고 만들었으면 좋겠다. 여자들은 몸 좋은 남자가 벗는 것을 좋아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맥락도 없이 노출을 보여주지 말고. 실제 여자들이 그런 것에 딱히 반응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진명현_ 예전에 인기 있었던 남자배우들보다 요새 인기 있다고 하는 ‘무해한’ 배우들이 오히려 외모적인 개성은 사라졌다. 얼마 전에 TV에서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 재방송을 봤는데 차인표가 벗은 몸에 엄청 큰 금목걸이를 걸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더라. (웃음)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지만, 그것에 솔직한 모습이었다. 90년대에는 이런 재미교포 남성상도 인기가 있었다.

복길_ 과거의 트렌드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사실 90년대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보지 못한 입장에서는 그런 정중한 남자들이 다시 TV에 나왔으면 좋겠다. X세대나 오렌지족 특유의 허세와 여유로움이 나에겐 새로운 남성상으로 다가온다.

<사랑의 온도> 양세종

-당당하게 자신이 멋있다는 것을 어필하지 못하는 남자가 나오지 못하는 것은 ‘인성’에 대한 검증도 적잖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요즘엔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겸손하지 못하다고 나무라지 않나. 더군다나 인성은 ‘무해함’과 직결되는 요소다.

복길_ 요즘 10대 사이에서는 그냥 일상어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인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굉장히 단순해졌다.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좀 생각을 해봐야 할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성격이 더럽고, 에고가 강한 상남자 스타일의 연예인도 좋아한다. (웃음) 왜 꼭 인성이 좋고 무해한 남자들만 선호받아야 하나. 물론 그게 범죄의 영역으로 가면 절대 사랑하면 안 되지만.

진명현_ <프로듀스 101> 때도 인성 논란으로 인기가 추락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지금은 SNS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이 노출되고, 바로바로 사생활에 대해 대중의 피드백을 받게 된다. 사생활 소비가 소비자의 권리처럼 되고, 사생활을 하나하나 검증한다. 사실 걸그룹 트와이스가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연예인의 사생활을 뜯어보며 ‘파양’(일부 팬덤 문화에서는 엄마 같은 마음으로 연예인을 응원하기 시작하는 것을 ‘입양’이라고 표현한다. ‘파양’은 그 지지를 철회하게 됐음을 과격하게 표현한 것이다)하고 ‘탈덕’(더이상 무언가의 ‘덕후’가 아니게 됐음을 의미한다)하며 싸우는 것이 피곤한 남자들이 모두 몰려서다. 이리치이고 저리 치인 우리를 위로해주는 건 트와이스뿐이라고 말이다. 트와이스는 그들이 만든 일종의 테마파크에서 코스튬 플레이를 보여주지 않나.

복길_ 남자들은 유해한 여자를 소비한 역사가 없다. 반면 여자들은 훨씬 복잡하다. 멀쩡해 보였는데 결국 폭력을 저지르는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여자도 있다. 여자 입장에서는 안전의 문제가 있는데 진짜 무해한 사람 찾기가 너무 힘든 거다. 여자들 중에서도 백치미 있고 몸 좋은 남자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웃음) 그런데 어떤 배신을 당할지 모르니 좋다고 말하기가 힘든 거다.

새로운 이야기에는 새 얼굴이 필요하다

-영화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영화에서는 예능이나 드라마와 달리 무해한 이미지의 남성 캐릭터를 찾아보기 힘들다고들 한다. 하지만 영화 <브이아이피>(2017)의 흥행 실패는 여러모로 중요한 사건이 됐다. 많은 여성들에게 호감을 얻었던 이종석이 출연했지만 여성 관객에게 현실적인 공포를 안겨준 폭력 묘사가 담겨 있어 논란이 됐다. 영화계의 변화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복길_ 이 자리에 계신 박현진 감독님의 <좋아해줘>(2015)에서 유아인·김주혁·강하늘이 보여준 캐릭터도 무해한 남자 캐릭터 계보에 있지 않을까.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족구왕>(2013)의 안재홍도 있다. 영화계가 조금 늦다고는 하지만 이런 캐릭터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진명현_ 재미있는 게 독립영화나 저예산 상업영화에서는 조금씩 바뀌는 부분들이 있다. 주인공을 서포트하는 여자배우들이 하던 역할을 남자배우들이 한다. 이를테면 <소공녀>(2017)의 안재홍이나 <리틀 포레스트>(2018)에서 류준열이 연기한 캐릭터들. 이런 영화들이 성공을 거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야 기획 단계에서부터 바뀌는 부분이 더 많아질 것이다.

박현진_ 최근에 모 메이저 투자·배급사 직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제작되는 영화 편수가 약간 줄어들었는데, 두가지 이유가 있다더라. 첫 번째는 미투(#MeToo) 운동이고, 두 번째는 기존 영화에 대한 염증이라고 한다. 예전에 비해 제작사들이 남자들만 나오는 시나리오를 덜 보내는 추세라고 한다. 영화계에서도 정해인이나 양세종이 부드러운 이미지로 인기를 얻은 것처럼 새로운 스타가 나와줘야 새로운 영화가 나올 수 있다. 새로운 이야기에는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흐름이 영화계에도 연결되면 좋겠다. 어디선가 발빠른 제작사나 작가·감독들은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본다.

복길_ 그동안 많은 남자배우들이 드라마에서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내세우다가 충무로에서는 남성성을 인정받겠다며 소위 ‘남자 영화’를 찍는 행보를 보였다. 지금 무해한 이미지의 남자들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배우 본인의 의지, 그리고 업계에서도 좀 다른 이미지를 가진 얼굴을 띄워주려는 의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성 소비자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어야 한다. 페미니즘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콘텐츠를 자꾸 소비해주면 안 된다. 사랑에 눈이 멀어 이 문제에 있어 쉽게 넘어가면 안 된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다. (웃음)

-무해한 남자들에게 여성들이 보여준 지지는 페미니즘이 부상하고 있는 시대 흐름과 직결되어 있지만, 지금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오간 자리였다. 앞으로 대중문화 콘텐츠 시장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진명현_ 남자든 여자든 취향은 굉장히 다양하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마냥 무해한 게 아니라, 유해하지 않은데 그 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청순한 남자여도 오토바이를 탈 수 있고, 꽃을 좋아할 수도 있다. 지금 소비자들은 총알도 있고 좋아하고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복길_ 예전에 메트로섹슈얼이라는 새로운 남성상도 그랬고 지금의 무해한 남자도 그러하듯 결국 어떤 남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이어진다. 어떤 남자를 타입화해서 권력을 주면 안 된다. 한 배우 개인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어야 한다고, 인물론 같은 것도 축소되어야 하고 늘 생각한다. 콘텐츠 제작자들이 단지 무해한 것을 만드는 것 이상의 시도를 했으면 좋겠다. 다양한 남성상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피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영석 PD의 예능을 보면 문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꾸 시골로 가는데, 그냥 젊은이들이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 아닌가. (웃음) 또한 페미니즘적인 시도를 할 때도 좀더 치열하게 고민해서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면 좋겠다. 넷플릭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2018)는 간단한 성 반전을 시도한 작품이지만 정말 재미있지 않나. 드라마의 경우 단막극이 많아져서 그게 좀더 보편화되고 돈이 되고 시장이 형성되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황효진 칼럼니스트

황효진_ 페미니즘이 아니었다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지금보다 인기가 더 많았을 거다. 예쁜 그림으로서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드라마에서 불편한 부분이 무엇인지 세세하게 말할 수 있는 시청자들이 생겼다. 이것을 바탕으로 제작자가 어떻게 더 좋은 모델을 만들어나갈지 고민해야 한다. 아까 복길님이 말했듯이 소비자들도 자신이 무엇을 소비하고 있는지 똑바로 봐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박현진_ 여성들은 남자가 꼭 무해하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남성 캐릭터에게도 다양한 결이 있고, 그런 것을 많이 보여주어야 페미니즘 이슈도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생긴다. 아직 페미니즘 담론은 과도기에 있지만 그 여파라고 볼 수 있는 상황에 우리가 서 있는 건 맞다. 제작진이 굳이 길을 막지 않는 이상 좋은 흐름으로 갈 수 있는 자양분이 곳곳에 많다. 오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아쉬운 점도 많이 이야기했지만, 주로 혼자 사는 독신 여성을 묘사한 기존 트렌디 드라마와 달리 부모와 함께 사는 35살 여성을 다뤘다는 것은 주목할 지점이었다. 전에는 거의 없던 시도였다. 윤진아에게는 답답한 점도 많지만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갖고 있는 얼굴이기도 하다. 이런 서사를 예능이나 영화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대담자 소개

황효진_ <izE> 기자로 일하다가 지금은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오늘은 젊은 여성이자 칼럼니스트 입장에서 최근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했다.

복길_ ‘복길’이라는 이름으로 트위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직장인. 칼럼니스트로서 <GQ> 등의 잡지에 글도 쓰고 있다. 대담에는 일반 시청자 입장으로 참여했다.

진명현_ 독립영화 배급·홍보·마케팅 및 독립영화 감독·배우 에이전시 무브먼트 대표. 대담자 중 유일한 남성이다. 주제를 들었을 때 이런 현상은 성인 남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현진_ 영화 <6년째 연애중>(2007), <좋아해줘>(2015), 드라마 <출출한 그녀> <출중한 그녀> 등을 연출했다. ‘무해한 남자’의 시대가 왔다는데 동의하지는 않는다. 일반 시청자이자 연출자로서 느끼고 있는 것들을 얘기해보려 한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