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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영주가 왜 그렇게 고통받아야 했는지에 대해 영화가 더 생각했어야 하는 이유

고통이 성장은 아니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국 복수의 이야기였구나’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상문(유재명)과 향숙(김호정)에게 고백한 밤, “마음 주지 말걸…. 처음부터 우릴 찾아오지 말지”라는 향숙의 한탄을 우연히 엿듣게 된 영주(김향기)가 바로 다음 장면, 커튼 뒤에서 나타나 승일의 침대 곁으로 다가갈 때 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영주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있는 승일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딸깍’ 하는 소리조차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잠시 후 서서히 포커스가 승일에게서 생명유지 장치로 옮겨가면 향숙에게 선물받은 영주의 머리 끈이 장치에 묶여 있다. 이상하게도 이 신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마치 스릴러영화의 한 장면처럼 촬영돼 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영주가 승일의 생명유지장치를 뽑고 (딸깍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소행’임을 알리기 위해 머리 끈을 남긴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승일의 숨소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화가 모르는 어떤 것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나는 이 장면이 의도적으로 관객의 착각/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상당한 공들여 찍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말하자면 감독은 관객에게 벼랑 끝에 몰린 영주가 승일을 죽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증폭시켜놓은 다음, 마치 관객을 따돌린다는 듯 승일의 숨소리를 남겨놓고 빠져나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은 관객보다 한발 앞서 가려던 이 선택이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영화의 서사 전체를 교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이때 던져야 할 질문. 혼란의 한편에 승일을 죽이는 (상문에 대한) ‘복수’가 있다면 그 반대편, 그러니까 생명유지장치를 뽑지 않고 (혹은 못하고) 떠나는 선택은 무슨 의미일까? 물론 가장 직관적인 대답은 ‘복수의 실패’ 혹은 좀더 나아가 ‘용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복수에 실패하거나 혹은 (복수를 하지 않는 대신)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복수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정작 영화는 피해자인 영주에게 그녀가 받고 있는 고통이 모두 부모를 갑자기 죽게 만든 사고, 결국 가해자 상문 때문이라고 (마치 복수를 부추기듯) 끊임없이 상기시키기에 급급하다. 실제로 이미 6년이나 지난 판결문을 들추어 가해자를 찾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영화는 과도할 정도로 영주를 몰아친다. 사고 친 동생 영인(탕준상)의 합의금에 어색할 정도로 가혹한 고모의 냉대, 재개발 위기에 놓인 집, 거기에 대출 사기까지, 상문을 찾아가는 영주의 행위에 당위성을 주기 위해 영화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정신없이 쌓아놓는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영주는 상문의 집 앞에 서 있다. 영화는 영주를 이곳까지 힘들게 데려왔지만 정작 우리는 여전히 영주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 가해자가 어떤 사람일까 하는 설명하기 힘든 호기심? 아니면 절망적인 상황에서 찾아낸 원망의 대상? 혹은 결국 부모를 죽인 상문에 대한 복수심? 그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영화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영주를 상문 앞에 데려다놓았고, 영주가 상문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양상은 좀더 복잡해진다.

그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지점은 영주에 대한 향숙과 상문의 과도한 호의일 것이다. 마치 영주를 기다렸다는 듯 일자리를 주고, 일한 지 며칠이 안 돼 돈을 훔쳐간 영주에게 더 큰돈을 조건 없이 건넨다. 그리고 마치 부모처럼 영주를 집에 들여 밥을 차려주고, 옷을 사주고, 못다 한 공부를 마치라고 다독인다. 물론 6년 전 사고 이후 신실한 마음으로 속죄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마지못해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 앞에 애써 데려온 피해자 영주를 세번이나 “잘못했다”라며 가해자에게 사과하게 만드는 잔인한 설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동생의 합의금을 훔쳤을 때, 배달 중이던 두부를 모두 엎어버렸을 때, 그리고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숨기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 영주는 상문과 향숙에게 잘못했다, 고 말하거나 미안해한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죄해야 하는 당혹스러운 상황 속에서 우리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용서해주는 더 끔찍한 상황도 지켜보아야 한다. 부부는 죗값을 치르고 출소하는 죄인을 맞이하듯 한손에 두부를 들고, 집 떠난 탕자를 받아들이는 부모처럼 영주를 끌어안는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 품에 안긴 영주가 그들의 ‘아이’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키운다는 점이다. 술에 취한 상문은 영주를 “승일”이라고 부르고(“승일아 미안하다.”), 가게에서 일하는 영주가 누구냐고 묻는 손님의 질문에 향숙은 “숨겨둔 막내딸”이라고 대답한다. 침대에만 누워 있는 승일 대신 영주는 ‘승일 두부’ 가게에 자기 영역을 표시하듯 자신이 만든 신메뉴, 만두를 판매한다는 광고지를 붙인다. 부부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승일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혹은 승일의 형제가 되기 위해서) 영주는 ‘옛가족’을 지우기 시작한다. 엄마가 남겨준 낡은 카디건 대신 ‘새’엄마 향숙이 사준 점퍼를 입고, 동생 영인이 아닌 승일의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누나 미쳤어?”라고 말하는 동생에게 ‘너만 없었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상문과 향숙에게 당신들이 내 부모를 죽인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순간까지도 영주는 승일을 부러워하고(“넌 좋겠다.”), 부부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까봐 불안해한다. 출발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주가 겪는 이 모든 고통의 근원에 ‘부모의 부재-상문이 저지른 사고’가 있다. 영화는 그 고통을 한참 나열한 후 영주로 하여금 결국 상문을 찾아가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피해자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사죄의 자리는 흐릿하게 지우고, ‘복수(용서)-속죄’로 연결되어야 할 고리는 어느 순간 아들이 다 채우지 못한 빈자리를 채우려는 부부의 욕망과 부모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은 영주의 바람으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슬며시 바꾸어놓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모르는 것이다.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과, (의도적이든 만듦새의 부족 탓이든) 이야기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전자는 보는 이의 능력이지만, 후자는 만드는 이의 책임이다.

복수심은 이미 사라졌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첫 질문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승일의 방에 들어온 영주는 (승일의 생명유지장치를 끄지 않고) 머리 끈만 남긴 채 떠나간다. 흐릿해지긴 했지만 이 선택은 상문에 대한 복수의 실패이자 용서일까? 영화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영주에게 상문에 대한 복수심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고 영주 자신이 말한다. “아저씨도 충분히 괴로웠을 거야… 내가 (엄마, 아빠에게) 왜 미안해야 하는데? 미안해야 할 사람은 엄마, 아빠 아냐?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야? 왜 그렇게 죽어버려서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데.”). 결국 영주가 떠나가는 건 상문과 향숙의 아이가 되고 싶어 했던 욕망의 좌절 혹은 포기일 수밖에 없다. 정체를 알면 절대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 동생에게 영주는 끝내 ‘네가 틀렸어’라는 문자를 보내지 못한다. 그리고 한강대교에 서서 자살을 생각하다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애들이라며 무시하던 고모 앞에서 “어린애 아니라고” 소리치고, 엄마 같은 거 필요없다며 동생을 꿋꿋하게 돌보던 영주는 상문-향숙 부부를 만나 어느 순간까진 무릎으로 어리광을 피우며, 엄마가 묶어주는 머리에 기뻐하는 아이로 퇴행했다. 자신을 ‘강제로’ 보호자로 만들었던 동생 영인이 불편해지는 시점도 이와 비슷하게 찾아온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유년기를 회복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보이지만, 영주를 억지스레 부부의 집으로 데려와 지난 상처를 헤집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헛된 희망을 심어놓은 다음 결국 내팽개쳐버려놓고, 죽고 싶은 심정으로 울고 있는 영주를 오래, 그렇게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를 나는 도저히 긍정할 수 없다. 그래도 끝내 눈물을 거두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영주의 모습을 보고 ‘성장’이라고 말한다면, 왜 그렇게까지 고통스럽게 성장해야 했는지 좀더 집요하게 질문하지 않았냐고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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