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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식으로 기대를 배신하는 <마약왕> <스윙키즈> <PMC: 더 벙커>, 그 참을 수 없는 피로에 대해
송경원 2019-01-24

한국영화를 보는 게 힘들어진 영화 기자의 아주 긴 변명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과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것 중 무엇이 더 괴로울까. 제 살 깎아먹는 고백부터 하고 시작해야겠다. 지난해 12월 극장가에 출사표를 던진 한국영화 3편 <마약왕> <스윙키즈> <PMC: 더 벙커>를 이제야 봤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상업영화, 특히 규모 있는 영화를 보는 게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노동처럼 느껴졌기에 애써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호기심이 생긴 건 슬프지만 세편의 영화가 모두 흥행에 실패한 탓이다. <마약왕> 186만명, <스윙키즈> 145만명, <PMC: 더 벙커> 166만명(2019년 1월 17일 기준)의 관객을 동원하며 제작비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뒀다. 관객 반응도 하나같이 아쉬움의 토로였다.

<스윙키즈>

적당히 현실인 척, 편리해서 더 나쁜 한국영화의 몇 가지 습관

만약 여느 때처럼 어떤 작품이 적당히 관객을 모으고 시즌의 승자로 기록됐다거나 혹평이 한두편에 쏟아졌다면 세 영화 모두 한동안 찾아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슬프지만 몇해 전부터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흥행한 영화는 나름의 이유로 대중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작이라고 나온 한국영화 들의 부진과 혹평이 한두편일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로 집요하고 집중적으로 쌓이면 그건 하나의 징후로 읽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뒤늦게 세편을 찾아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당황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세편의 영화는 딱히 비평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영화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중상업영화로서 관객의 즐거움을 향해 설계된, 복잡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시대의 무의식이 스며들어 고이는 그릇이기도 하다. 세편의 영화에서 요 몇년 사이 한국영화의 나쁜 습관들이 고스란히 묻어났고 여기서는 그 얼룩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미리 말하지만 이 글은 ‘왜 흥행에 실패했나’를 분석하려는 글이 아니다. 이유를 알고자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겠지만 흥행 분석만큼 사후적이고 부질없는 작업도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이 대작들이 맞붙어 누구 하나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출혈경쟁에 도화선을 지핀 건 2014년 여름 블록버스터 격돌부터다. <군도: 민란의 시대> 470만명, <해적: 바다로 간 산적> 860만명, <명량> 1700만명이라는 성적을 남긴 이후, 한국 영화산업은 관성에 이끌리듯 규모를 키우고 같은 시기에 경쟁을 벌였다. 결과론이지만 당시 세 영화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는 점이 지금의 나비효과를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이때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은 영화가 빼어나서 860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던 걸까. 흥행과 영화의 완성도의 상관관계는 짐작보다 훨씬 연약하다. 심지어 흥행 분석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변명의 도구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마약왕>

그럼에도 우리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어쩌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이유를 붙인 후 이해한 척 연기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불안을 달랠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한국영화의 경색된 분위기로 보건대 제작비 증가 등 한국영화의 산업 구조의 변화나 각 배급사의 속사정은 이후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은 그 작업을 위한 일종의 마중물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산업의 형태를 이야기하기 전에 반드시 영화의 내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건 영화 기자로서의 의무감이라 해도 좋겠다. 그럼에도 엄밀히 말해 지금부터 할 일은 영화의 속살을 들춰내는 비평이라 할 수 없다. 차라리 푸석거리며 주저앉은 한국영화가 일으킨 먼지에 대한 푸념이자 게으른 영화 기자의 자기 고백이며 책임을 방기한 평론가의 반성문이다.

세편의 영화를 나란히 보면서 신기했던 점이 있다. 소재, 시대 배경, 장르 모두 완전 다른 영화들인데 희한하게 오프닝이 닮았다. <마약왕>은 1980년대 영화 앞에 걸린 선전 다큐멘터리 같은 화면을 차례로 보여주며 전설의 마약왕 이두삼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김인구 검사(조정석)의 입을 빌려 진행되는 보도자료 화면 위에 “모두가 좋아하고 모두가 싫어했던, 전설의 마약왕 이두삼”이라는 내레이션이 더해져 영화의 톤과 방향을 잡아나가는 것이다. 이두삼이 어떤 인물인지 노골적으로 설명하는 이 오프닝은 자신감이 결여된 인상이다. 달리 말하면 안전하게 레일을 깔아둔다. 이두삼은 이런 평가를 받은 인물이니 잘 따라오시오, 라는 안내문이라 봐도 좋겠다. 다큐멘터리와 뉴스 화면을 섞어놓은 듯한 구성으로 문을 여는 건 효율만 놓고 본다면 상당히 경제적인 전략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한 상투적인 수단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데 <스윙키즈> <PMC: 더 벙커>도 같은 형식으로 문을 여는 걸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뉴스 화면이 현실을 모방하며 사실감을 더해준다는 건 기능적으로 이해한다. 심지어 한반도의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 <PMC: 더 벙커>도 뉴스 화면을 빌려 짧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하지만 천편일률의 오프닝을 보며 문득 속살이 영글지 않은 영화들의 나쁜 버릇이 떠올랐다. 어떤 영화들은 습관적으로 현실에 기대 리얼리티와 개연성을 확보하려 한다. 가령 ‘실화에 근거함, 실화에서 영감을 얻음’이란 자막을 굳이 앞에 내세우는 영화들의 밑바닥에는 관객을 이야기의 증인으로 동참시키려는 욕망이 깔려 있다. 물론 실제로 상당 부분 그런 효과가 있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스스로 구축한 가상 세계가 단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히 영화 바깥의 사실성에 기대려 할 때 서사의 개연성은 모래알처럼 바스라진다. 대개 현실을 모방하고 함부로 현실인 척하려는 영화들의 이면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 각각 과도한 장르색과 비현실적인 설정, 만화적 혹은 게임적인 표현들을 통해 사실적인 영화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마약왕> <스윙키즈> <PMC: 더 벙커>가 한결같이 이러한 오프닝을 택한 건 단지 우연으로 치부하긴 어려울 것 같다. 단순하게 접근하면 영화 내부에 부족한 리얼리티를 상투적으로 확보하려는 기계적인 수단이겠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뒤되돌아보니 어딘지 스스로 이야기에 대한 불신이 반영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영화가 우연과 작위의 상황을 마구 남발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세편의 영화가 명백히 설명되지 않은 서사의 구멍들을 은근슬쩍 넘어가려 할 때마다 보는 내내 뇌리를 잠식했던 건 ‘왜’라는 질문이다. <마약왕>에서 이두삼은 언제 정화킴(배두나)에게 자신이 다루는 상품이 히로뽕이란 걸 알려준 걸까. <스윙키즈>에서 로기진(김동건)은 왜 마지막 공연 전날 밤 로기수(도경수)를 만나야 했을까. <PMC: 더 벙커>에서 에이헵(하정우)이 굳이 윤지의(이선균)의 도움을 받아 다리에 박힌 총알을 무리해서 빼낸 이유는 무엇인가. 서사의 개연성과 캐릭터의 설득력을 이야기 안에서 확보하지 못한 영화는 때론 충분한 설명 없이 장면을 생략하고 반대로 무리하게 장면을 끼워 넣기도 한다. 제한된 상영시간 내에서 뭔가 다른 걸 보여주고 싶어 전략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아쿠아맨>의 식상한 아서왕 서사는 모험 과정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한 기계적 어트랙션 장치라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세 영화의 핵심적인 문제는 이러한 생략과 점프가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마약왕>

이미지를 과시하는 <마약왕>

<마약왕>은 삽화 같은 장면들의 연쇄로 구성된 영화다. 시시한 밀수업자였던 이두삼이 마약 중개업의 거물로 성장하는 상승과 몰락의 드라마는 결국 무언가 중독되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차례로 인물의 계단을 밟아나가던 영화가 갑자기 점프하는 장면이 있다. 일본 야쿠자의 신뢰를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판로를 개척한 이두삼이 귀향하는 배에서 돈을 허공에 뿌리는 장면이다. 절정에 다다른 인물의 감정과 돈에 대한 허영심을 좇기엔 적절한 이미지다. 우리는 그렇게 흥청망청 돈을 뿌려대는 인물의 몰락을 이미 여러 영화에서 숱하게 마주해왔다. 어차피 예정된 파국이지만 그 지점부터 관객은 이두삼의 결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 타이밍에 제시되기에 적절한 이미지였을까. 관객은 아직 이두삼이 어떤 인물인지,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어떤 불안과 고민을 안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마약을 선택했는지 아무런 설명과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저 피상적으로 제시되는 이미지는 극단적으로 말해 여타 장르들의 차용 혹은 과시적 소비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 등장이 너무 빠르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바로 거대한 저택을 사고 갑자기 문화적 소양을 뽐내며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어색하다. 이두삼이 그런 상류층의 문화적 향유를 바란 적이 있던가.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뿐이다. 왜냐하면 상승과 몰락을 그린 유사한 영화들에서 그래 왔으니까. 이 지점에 이르면 <마약왕>은 내러티브를 안쪽으로 쌓아나가 관객을 설득하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신 영화는 익히 보아왔던 마약 소재 영화들을 어떻게 멋지게 짜깁기할지에 몰두한다.

<마약왕>은 중독에 관한 이야기다. 중독은 필연적으로 결핍을 전제로 한다. 이두삼의 결핍은 무엇인가. 마약업자가 마약에 손대면 끝장이라는 예정된 파국을 깔아둔 채 진행되는 영화는 세 차례에 걸쳐서 이두삼의 마약 투입 장면을 제시한다. 이두삼이 마약에 기대는 계기는 살인이다. 사촌동생 이두환이 쾌락의 일환으로 자연스럽게 약에 빠져든 것과 달리 이두삼에게는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 영화는 이를 새빨간 조명과 강렬한 콘트라스트 등으로 과장되게 전시한다. 하지만 <마약왕>은 이두삼이 왜 성공을 욕망하는지, 어떤 계기로 마약이란 사업의 가능성에 눈뜨는지, 갑자기 왜 급속도로 몰락해나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캐릭터의 방향이란 결국 캐릭터가 무엇을 바라는지를 납득시켜나가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하지만 <마약왕>은 그런 건 멋들어진(혹은 단절된)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 것 같다. 아니면 그 정도 서사의 공백은 관객이 충분히 알아서 해결해줄 거라는 기괴한 신뢰를 발휘한 건지도 모르겠다. 대신 관객의 노력에 대한 대가로 익숙하고 자기 과시적인 '마약왕'과 향략의 이미지를 자극적으로 제공한다. <마약왕>은 이를테면 설정 숏이 빠진 현란한 장면들의 기계적인 나열로 완성된 영화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며 캐릭터의 아우라를 만들어나가는 대신 멋진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 같은) 이미지를 잔뜩 불어넣어 관객의 감각을 포화 상태로 만든다.

<마약왕>은 자극적인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다. 초반 이두삼에게 굴욕을 주는 오줌 세례 장면이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매달린 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맞는 장면들은 필연성이라기보다는 자기과시에 가깝다. 해당 장면은 거기서 소비될 뿐 후반에 이를 받아주는 장면이 없다. 이건 거의 모든 장면들이 마찬가지인데, 동기도 욕망도 불분명한 캐릭터들이 ‘왜’라는 인물의 고리를 생략시킨 채 끊임없이 쇼를 벌인다. 요컨대 인물은 없고 (바깥에서 빌려온) 상황만 있다. 덕분에 이두삼 저택에서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는 완전히 뜬금없이, 정확히는 이해는 가는데 납득이 가지 않는 형태로 ‘제시’된다. 연출이 아니라 제시다. 인물의 필연적인 상승과 몰락의 운동이 아니라 엇비슷한 도상들의 느슨한 나열. 그리하여 마침내 도착한 곳은 온갖 과장된 장식들로 점철된 (시대의 상식에 비춰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던) 이두삼의 저택이다. 시대의 욕망을 압축, 대변하는 동시에 시대와 격리된 공간. 거꾸로 되짚어보자면 <마약왕>의 서사는 그 화려하고 이질적인 공간의 집합을 풀어헤쳐 시퀀스마다 그럴듯하게 재배치, 장식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진정 안타까운 건 그 장식들 자체는 최고급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과잉된 이미지가 주는 자극들로 서사의 구멍을 덮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마치 여러 편으로 쪼갠 송강호 컬렉션, 거의 유튜브로 나눠서 보는 숏폼 콘텐츠(Short-form contents)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뒤늦게 겁먹은 영화는 오프닝과 엔딩에 뉴스를 배치해 이건 실화임을 덧대어 입히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내는 더이상 짓밟히고 싶지가 않다”는 이두삼의 외침은 그래서 공허하고 뜬금없다. 자신만의 성에서 혼자 불안과 의심으로 망가진 이두삼의 모습이 한국영화 전반의 악습과 겹쳐 보인다면 잔인한 평가일까. 수시로 뽕을 맞으며 불안을 누르는 이두삼과 때깔 좋은 장면만으로 괜찮다고 자위하는 <마약왕>의 모습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스윙키즈>

관객의 장르적 허용을 과신한 <스윙키즈>

<스윙키즈>의 작위성은 결이 다르다. 미군의 불법 댄스홀에서 술에 취해 칼린카 춤을 추는 로기수의 모습이 일부러 조악한 CG로 재현될 때 초반엔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영화적 허용이라고 해도 좋을 과감한 표현들과 집요하다 싶을 만큼 반복되는 과장된 유머들은 이 영화가 장르라는 환상의 영역 안에 있음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킨다. 처음에 <스윙키즈>의 이야기 세계 속으로 진입하는 게 다소 어색하고 부끄러울 뿐이지 일단 즐기기로 마음먹은 후에는 농담 따먹기로 이어지는 아재 개그마저 즐겁다. 미군 사령관이 ‘자유세계의 단맛’으로 수용자들을 꾀려 할 때 영화는 ‘판타지, 동화의 단맛’에 관객이 흠뻑 젖도록 끊임없이 시도하는 셈이다. 잭슨(재러드 그라임스)과 로기수가 댄스 대결을 벌일 때 양판래(박혜수), 강병삼(오정세), 샤오팡(김민호) 세 사람이 홀 바깥에 나란히 앉아 기다리는 장면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동화적 색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게 간신히 납득시킨 장르의 톤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비극의 드라마로 전환되는 방식에 있다.

전환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좋은 코미디일수록 비극의 페이소스는 진하게 묻어나오는 법이고 비극은 한국에서 특히 대중적인 마무리다. 하지만 <스윙키즈>가 그 과정에 대한 설득 없이 예정된 수순대로 흘러갈 것을 고집, 강요하는 순간부터 당혹스럽다. 수용소에 새로 들어온 북한군 광국(이다윗)으로 인해 잠재된 갈등이 점화되고 댄스를 향한 순수한 갈망을 감춰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는 것까진 자연스런 위기의 국면 전환으로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로기수의 형 로기진과 숨겨진 반전이 연이어 점화될 땐 정해진 비극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조급함마저 감지된다. 갈등의 씨앗을 안고 있는 수용소 내부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이 미리 제시되지 않는 문제는 잠시 미뤄두자. 전개상의 오류나 자잘한 구멍을 쉽게 메울 수 있다는 점이 판타지적인 상황에 기반한 장르물의 강점이다. 반면 이는 영화가 스스로 구축한 환상을 찢고 나오려 할 때 감당해야 할 당혹감이 이전보다 훨씬 커진다는 약점을 함께 품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상당 부분을 장르적 허용에 기대어 진행되던 <스윙키즈>가 예정된 비극이라는 강박에 휩싸일 때 영화는 전반부의 장점마저 갉아먹는다.

앞서 예시로 든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들이 숱한 스타일적인 모방에도 깊이를 잃지 않는 건 스타일은 뒤섞되 색, 방향, 정서는 뒤섞지 않는 단순성의 추구에 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항상 비극적인 상황이 아니라 그 속에 놓인 사람에 황금의 과녁을 맞추고 있다면 <스윙키즈>의 카메라는 인물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관객을 흘끔거리며 쳐다본다. 잭슨이 로기수에게 카네기홀의 사진을 보여주며 언덕 위에서 탭댄스를 추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때 카네기홀로 장소가 잠시 전환되며 쏟아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는 잭슨의 비전인가, 로기수의 상상인가. 아니면 관객을 향한 친절한 설명인가. 혹은 전부 다 해당되는 걸까. 마찬가지로 엔딩에서 선보이는 잭슨과 로기수의 애틋하고 신나는 탭댄스 대결은 누구의 시점에서 재현된 장면인지, 누구를 위한 공연인지 알 길이 없다. 요컨대 <스윙키즈>의 특정 장면들에선 종종 시선의 주체가 사라진다. 자유로운 탭댄스라는 환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영화는 스스로도 이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면 일부러 구분해놓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관객이 좋은 방향으로 해석해주길 막연히 기대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결과적으로 인물은 지워지고 그럴듯해 보이는 상황(예컨대 멋진 탭댄스 공연)만 반복된다.

로기수, 강병삼, 샤오팡이 잭슨의 출소와 공연의 성사를 위해 기자들 앞에서 한판 춤을 추는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의 어설프지만 웃긴 공연을 보며 기자들은 즐거워하고 포로들은 열광한다. 도대체 왜? 이들의 춤에 어떤 특별함이 있어서? 적어도 영화는 그 이유를 직접 보여주거나 설득하진 못한다. 대신 거기에 열광하는 기자와 포로의 모습들을 제시해 거꾸로 이들의 춤이 특별하다는 근거로 삼는다. 이들의 춤은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매력적이어야 한다. 설득과 당위의 역전. 어쩌다 한번이라면 이야기 전개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 이해해줄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역전된 제시’가 중요한 순간마다 반복된다는 것이다. 로기수의 형 로기진은 왜 공연 마지막 날 로기수를 찾아와야 했던 걸까. 순수하게 형제애의 발로로 보이지 않는 건 뒤이어 찾아올 예정된 비극의 알리바이로서의 기능에 지나치게 충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멋진 무언가, 슬픈 무언가, 웃긴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다들 그렇다고 연기를 벌이고 있는 작위적인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때마다 관객은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라는 명분하에 이를 그냥 받아들일 것을 강요받는다. 이쯤 되면 일종의 습관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강요에 실패하는 순간 <스윙키즈>는 당황스러운 영화로 돌변한다.

전능한 카메라에 도취된 지루한 플레이 <PMC: 더 벙커>

<PMC: 더 벙커>는 그나마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전진한다는 점에서 앞선 두 영화와 나란히 놓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다. 김병우 감독이 <더 테러 라이브>(2013)에서 시도했던 장기들, 폐쇄 공간의 긴장감과 편집을 통한 공간의 창의적인 연결 등을 한층 가다듬은 영화다. 전편의 성공을 반복했다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오는 기획영화들 속에서 나름 자신의 방향을 설정하고 깊게 파내려는 시도 자체는 긍정할 만하다. <PMC: 더 벙커>에 쏟아지는 혹평에 대해 짧은 변명을 하자면 둘러싼 기대에 대한 배신감도 한몫하는 듯하다. 한국영화 중에선 대규모 예산이지만 할리우드에선 적은 규모의 영화인 만큼 액션이나 볼거리 자체보다 기획과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영화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아마도 여느 대형 액션영화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당황하거나 실망할 수밖에 없을 배급과 마케팅상의 핸디캡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MC: 더 벙커>를 지지할 수 없는 건 이른바 ‘게임적 문법’이라는 얄팍한 변명 때문이다. 만약 이 영화를 쉽게 ‘게임적’이라고 명명한다면 그건 게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무책임한 발언이다. 오퍼레이팅 화면을 통한 상황 제시 후 에이헵의 선택을 강요하고 다음 상황으로 넘어가는 방식은 확실히 몇몇 게임의 서사 전개방식을 닮았지만 이 영화의 핵심과는 거리가 있다. <PMC: 더 벙커>는 한정된 공간을 어떻게 쪼개어 지배하는지에 관한 영화다. 두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에이헵이 카메라와 지시를 통해 벙커 내부를 통제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거기서 파생되는 긴장감을 즐기는 영화라고 해도 좋겠다.

연기의 어색함이나 지나치게 설명적인 대사, 반복되는 미션 제시의 피로감, 일차원적으로 때려부으며 빈틈을 메우려는 음악 등 자잘한 요소들은 일일이 언급하지 않겠다. <PMC: 더 벙커>는 빼어난 장점으로 수많은 단점들을 메워나가는 방향으로 기획된 영화다. 영화적 밀도나 기술의 완성도는 이 영화에서 부차적인 문제다. 핵심은 무엇이 관객, 보는 이를 몰입시키는지에 달렸는데 그 대부분의 상황은 카메라를 통한 정보의 순차적 통제를 통해 발생한다. 거칠게 말해 영화와 게임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여기에 있다. 게임은 특정 상황이나 서사적 필요에 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유저의 통제를 벗어난 화면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즉 통제권이 유저에게 있다. 반면 영화의 관객은 철저한 수용자의 입장이며 카메라의 시선과 위치는 감독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창구이자 핵심, 아니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PMC: 더 벙커>가 당황스러운 건 어디까지나 영화의 틀을 갖추되 게임의 요소를 몇 가지 빌려왔다는 이유로 정체성을 구분짓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영화의 카메라, 그리고 이를 통제하는 에이헵의 힘은 거의 신의 권능에 가깝다. 모든 공간을 헤집고 다니는 카메라는 필요한 순간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적절한 타이밍에 친절하게 클로즈업까지 한다. 총을 재장전하는 순간 줌인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작전상 필요한 동작이 아니다. 그건 오직 관객의 긴장감을 고양시키기 위한 편집일 것이다. 문제는 작전의 도구로서의 카메라와 권능을 휘두르는 감독의 시선, 에이헵의 시선 등이 구분되지 않고 자의적으로 마구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작전 상황을 그럴듯하게 흉내는 내지만 리얼리티를 떨어트리고 작위적인 상황의 점프와 억지 연결은 작전의 흉내만 낸다는 인상에 그친다. 이러한 태도는 서사 전반으로 확장되어 실소를 자아내는 상황과 한반도의 현실, 인물의 트라우마 등의 주제를 강박적이고 강제적으로 연결시켜버린다. 요컨대 한반도의 운명을 건 대단한 작전이자 개인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그럴듯한 서사는 머리로만 이해될 뿐 관객을 상황에 이입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아마도 상황의 통제권이 유저에게 있는 ‘게임’이라면 감각 또한 다를 테지만 <PMC: 더 벙커>는 실력이 떨어지는 플레이어의 조악하고 산만한 (심지어 종종 치트키까지 남발하는) 재미없는 플레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감흥 이상을 안기지 못한다.

빤하고 식상하다는 비판을 받아도 대중상업영화에 대해 기대하는 패턴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실재하는지는 알 길 없지만 그 안정적인 흥행 공식(이라 믿어지는 관습들) 자체를 폄하하고 싶진 않다. 틀에 박힌 영화는 때로는 가능성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장르 기획 속에서 이에 저항하는 사이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창의적인 문법이 태어나는 법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영화들은 이에 저항하기를 포기하는 걸 넘어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는 것 같다. <마약왕> <스윙키즈> <PMC: 더 벙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한결같이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배우와 스탭 혹은 기술적인 부분을 맹신하고, 관객의 허용치를 지나치게 믿는가 하면, 종종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고 스스로를 과신한다. 물론 이를 한국영화 전체로 일반화시키는 건 섣부른 짓이다. 하나 누적되는 실망 속에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발품을 팔아 찾아가서 보고 싶은 영화가 한편도 남아 있지 않다. 한국영화의 위기라는 말은 2000년 중반부터 옅게 낀 안개처럼 사방에 깔려 있었지만 지난해만큼 피로를 실감한 적도 없었다. 안타까운 현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며 2019년 개봉을 앞둔 한국영화들의 목록을 가만히 들춰본다. “중요한 건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윌리엄 서머싯 모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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