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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 그 기원에 대하여

지나간 한국영화의 기록, 다가올 한국영화의 미래

‘한국영화 99주년 기념 세미나’ 현장(사진 영화진흥위원회).

2019년, 드디어 한국영화가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됐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한국영화 100주년은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 1919)가 상연된 1919년 10월 27일을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1966년 영화인과 정부가 이날을 ‘영화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연쇄극은 간단히 말하면 연극 무대에서의 배우들의 연기와 영화의 스크린 영사가 결합된 공연 양식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쇄극을 한국영화사의 기원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영화인들은 어떤 기준으로 <의리적 구토>를 한국영화의 시작으로 보는 것에 합의했을까. 또 지금 시각에서 봤을 때 일제시기 조선인 신파극단의 연쇄극을 한국영화의 출발로 보는 것이 과연 설득력 있는 의견인가.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대답하기에 앞서 이러한 질문과 씨름하는 영화사 연구자라는 존재에 관해 먼저 얘기하고 싶다.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상당히 바빠질, 어쩌면 조금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사람 들. 화려한 영화계의 조명이 잘 닿지 않는 외진 곳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영화사 연구자의 작업부터 소개하려 한다.

<아리랑>

‘영화사 연구자’라는 직업

나는 영화사 연구자다. 영화사가라는 말도 쓰지만 이는 고 이영일 선생, 김종원 선생 등의 원로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므로 영화사 연구자쪽이 더 적합한 명칭일 것 같다. 소장 영화사 연구자인 나는 1990년대 중·후반 사설 시네마테크와 예술영화관에서 세계 영화사의 정전들과 작가주의 영화들을 섭렵하던 영화광 청년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졌고 당시 다양한 학과의 전공자들이 영화 공부라는 하나의 목표로 모였던 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 석박사 과정에서 전공하는 영화이론이란 생각보다 스펙트럼이 넓은 영역의 학제여서 순수 이론 탐구부터 영화 텍스트를 미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징후적으로 고찰하는 것, 그리고 영화의 역사 특히 한국영화사를 연구하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진다.

지금은 한국영화사 연구가 영화 연구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필자가 대학원 석사과정에 갓 입학했을 때는 영화이론 전공의 주요한 연구 영역으로 부상하는 중이었다. 예컨대 학교에서는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신상옥 감독 회고전 준비를 겸해 접근 가능한 그의 영화들을 모두 감상하고 장면별로 분석하는 수업이 진행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영화사를 영화이론의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그 새로운 물결이 이는 현장에 마침 내가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감독 개인의 창작에 대한 열정과 국가 정책 등 제반 환경과의 관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한국 고전영화 속에 새겨져 있음을 파악하는 수업은 실로 필자를 학문적으로 개안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나는 학계 동료들과 달리 영화사 연구자로서 나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한국의 내셔널 필름 아카이브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름 아카이브는 영화 및 그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잘 보존해 후세에 물려주고 또 동시대인들이 다양한 영화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관이다. 서구에서는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관련 기관들이 생겨났고, 1938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4개국의 참가로 국제필름아카이브연맹(FIAF)이 출범한 바 있다. 그 핵심 인물이 뉴욕현대미술관(MoMA) 영화 부문의 초대 큐레이터 아이리스 배리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앙리 랑글루아였다. 한편 1974년 설립된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영화 100년의 장대한 역사에 비해 그 역사가 채 50년도 되지 않는다. 즉 한국영화가 시작된 1919년부터 74년 이전까지는 영화필름을 국가의 문화유산으로 대접하고 보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잃어버린 영화필름을 조사하고 수집하는 것이 영상자료원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인 이유다. 내가 영상자료원에 입사한 것은 석사 논문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대학원 초기에 마음먹었던 디지털영화에 관한 주제가 아닌 한국영화사 서술의 공백기였던 6·25전쟁 시기의 영화 제작 활동에 관해 석사 논문을 완성한 필자는, 운 좋게도 그 논문 덕분에 영상자료원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영상자료원은 처음으로 영화사 연구자가 원장으로 부임해 일대 변화를 예고하고 있던 시점이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를 영화사 연구자로 성장시킨 건 8할이 영상자료원이다. 원로 영화인들을 만나 그들의 귀중한 목소리를 기록하는 작업, 한국영화사 사료를 가공해 책으로 만드는 일, 또 보다 많은 대중에게 한국 고전영화를 알리기 위해 DVD 컬렉션으로 기획하는 작업 등 영화사 연구 영역이 영상자료원의 주요 업무로 편입되는 그 시작과 진행 과정을 함께했다. 중국전영자료관이 어렵게 보여준 영화 목록에서 일제시기 조선영화의 제목을 찾아내고 또 대중에게 공개할 준비를 위해 수집된 필름을 가장 먼저 만난 것도, 러시아의 국립 필름 아카이브인 고스필모폰드(Gosfilmofond of Russia)에서 일제시기 조선영화를 찾기 위해 하루에 수십 캔의 필름 롤을 돌려본 지난했던 작업도 모두 영상자료원과 함께한 나의 귀중한 경험이다.

나는 영화학계의 일원인 연구자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직업인으로는 유실된 한국영화를 발굴해 그 영화를 가장 먼저 보고 분석하는 자리에 있다. 또한 영상자료원이 세계 각국의 필름 아카이브와 교류하는 덕분에 일국사(一國史)의 한계를 넘어 비교영화사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시야를 갖추게 된 것도 직업상의 장점이다. 필자가 한·일 비교 영화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인 셈이다. 물론 영화사 연구자라는 정체성과 필름 아카이브 연구원으로서의 직업적 자아가 부딪칠 때도 있다. 일제시기 조선에서 만들어진 영화처럼 한 국가의 영화사로 편입되기 힘든 영화들이나 경계를 넘나들며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관해 개인 연구자로서 관심이 많지만, 국가기관의 연구원으로는 한국영화사라는 내셔널 필름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가지 정체성이 행복하게 만나는 순간도 있는데, 바로 한국영화 100년의 기원에 관한 필자의 견해에서 그렇다. 한국영화의 출발점에 대한 논의는 일차적으로 한국영화사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찾는 작업이지만 그 근거를 서구영화와 일본영화의 비교 역사 연구에서 도출한다면 더 흥미로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보려 한다.

<청춘의 십자로>

한국영화 기점의 문제

지난해 10월 26일, 한국영화 100주년을 준비하는 예비 행사의 하나로 ‘한국영화 99주년 기념 세미나’가 있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주최하고 영화계의 여러 조직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모인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후원한 행사였는데, 공동위원장인 이장호 감독을 비롯해 원로 영화인들과 현역의 젊은 영화인들이 오랜만에 함께 모인 것만으로 의미가 큰 자리였다. 여기서 나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영화사적 의미를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그날 서두에서 밝혔듯 필자의 발표 내용에 따라 한국영화 100년의 기점을 다시 고민해야 할지도 모르는, 꽤 부담감이 큰 상황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제작으로서의 영화(film)’라는 관점에서 한국영화의 첫 자리에 <의리적 구토>를 놓는 것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사실 연쇄극인 <의리적 구토>를 한국영화의 기원으로 삼는 문제는 <아리랑>(1926)의 실제 감독이 나운규인가, 일본인 쓰모리 슈이치인가 하는 것만큼이나 영화사가들의 치열한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잠깐 <아리랑> 얘기를 하자면 사실 1926년 10월 1일 이 영화가 단성사에서 개봉할 때 신문광고 크레딧에 나운규는 원작·각색·주연이었고, 쓰모리가 감독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사를 포함한 조선인 배우들의 연기를 실제로 누가 연출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이후 일제시기의 조선영화 관련 지면에서도 기록하듯이, 조선인 나운규가 실질적인 연출자인 것이다. 무성영화에 대사가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영상자료원이 보존 중인 가장 오래된 극영화 <청춘의 십자로>(감독 안종화, 1934)의 장면들을 생각해보자. 무성영화라 하더라도 배우들은 당연히 대사 연기를 하고, 배우들의 입 모양을 보면 한국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청춘의 십자로>

그동안 연쇄극에 대한 영화사가들의 논의는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영화로 봐야 한다는 입장과 한국영화의 태동에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영화로 판단하는 것은 유보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물론 한국영화의 시작으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 힘을 받았기 때문에 1919년을 기점으로 삼은 것이고, 특히 이는 연쇄극에 사용된 필름을 조선인들이 직접 제작한 것에 주목한 결과이다. 필자는 이 입장을 기본으로 삼고 최근의 연구 경향을 덧붙여 연쇄극을 최초의 한국영화로 보는 방향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서구의 초기 영화(early cinema) 담론이나 일본 학계의 연쇄극 연구를 동시에 검토해본다면 연쇄극을 한국영화 제작의 출발점으로 삼는 데 이견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앞서 필자가 ‘한국영화 제작(film)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해서 쓴 이유는, 1896년 서구영화 매체의 수용과 자국인의 실질적인 영화 촬영이 큰 간격 없이 이루어진 일본과 중국에 비해 한국은 이른바 ‘활동사진’(motion picture)의 유입과 제작 실천의 시기적 간극이 꽤 크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1896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고베에서, 이어 1897년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가 교토에서, 또 에디슨이 스크린용 영사가 가능하도록 만든 바이타스코프가 오사카에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편 일본인들의 영화 촬영은 1898년 <귀신 지장>(化け地蔵) 등 단편 트릭영화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의 경우 영화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96년 상하이에서였고, 처음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05년 베이징의 한 사진관에서 경극 배우의 연기를 촬영한 <정군산>(定軍山)을 기점으로 삼는다(그림 자극까지 자국 영화사의 기원으로 소환하는 중국의 입장은 일단 논외로 하자).

활동사진 관람 광고(<황성신문> 1903년 6월 23일자).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 1919년 조선인 신파극단의 연쇄극에 포함된 영화필름이 공개되기에 앞서 서구영화가 대중에게 상영된 것은 언제였을까. 한국에서 언제 처음 영화가 상영되었을까, 하는 질문 역시 영화사가들의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인데, 공식적인 기록을 근거로 들자면 1903년 6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대문 안의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한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계속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생생한(生命) 도시, 각종 극적인 장면(劇場)의 절승한 광경이 준비되었습니다. 입장 요금 동화 10전”이라는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의 활동사진 광고는, 한국에서 일반인에게 돈을 받고 영화를 상영했음을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사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의 경우 대중 상영이 이루어진 시점을 공식적인 기록인 1903년부터 계산해도 제작과는 16년의 간극이 있다. 영화 문화 전반을 의미하는 ‘시네마’(cinema)로서의 영화라기보다 ‘필름’으로서의 영화, 즉 영화 제작의 경험을 영화사 100년의 출발점으로 놓았던 결정적인 배경인 셈이다. 확실히 세계 영화사 100년을 자국의 영화사와 겹쳐서 보는 일본, 중국에 비해 한국의 영화사 100년에 대한 감각은 다르다. 일제강점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경험한 한국인들이 한국영화사 100년의 기점을 설정함에 있어 우리의 제작 경험과 그 영화필름의 상영에 방점을 찍는 민족주의적 입장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대목일 수 있다.

<의리적 구토> 광고(<매일신보> 1919년 10월 26일자).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영화적 실천

먼저 연쇄극이 어떤 방식의 상연 방식이었는지는, 일본 영화사가 다나카 준이치로가 “실연의 무대와 영화 스크린을 이용한 줄거리를 구성하는데, 예를 들어 실연의 실내 장면이 연출되고 이어서 이야기가 실외로 확대된다. 무대가 어두워지고 스테이지의 전면에 스크린이 드리워지면 미리 같은 배우로 촬영해둔 실외 장면의 영화를 비추고, 지금까지 무대에 나와 있던 배우가 스크린 뒤에 모여서 영화 속 인물에 대사를 붙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라고 기록(<일본영화발달사1>(1957))한 것을 참조하면 좋겠다. 대체로 실외 장면은 서구 활극을 본뜬 것으로, 자동차나 보트를 이용한 추격 장면이었다.

<의리적 구토> 광고(<매일신보> 1919년 10월 28일자).

그렇다면 조선인 신파 극단이 만든 연쇄극은 어땠을까. 물론 필름이나 대본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신문광고나 기사를 통해 연쇄극 공연에 사용된 영화필름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의리적 구토>가 상연되기 전날인 1919년 10월 26일자 <매일신보>의 소개 기사를 보자. “근래 활동 사진이 조선에 많이 나와 애극가의 환영을 비상히 받았으나, 첫째 오늘날까지 조선인 배우의 활동사진은 아주 없어서 유감 중에(중략) 이번 단성사주 박승필씨가 오천여원의 거액을 내어 신파신극좌 김도산 일행을 데리고 경성 내외의 경치 좋은 장소를 따라가며 다리와 물이며 기차, 전차, 자동차까지 이용하여 연극을 한 것을 처처(處處)히 박은 것이 네 가지나 되는 예제(藝題)인 바 모두 좋은 활극으로만 박았으며 (중략) 서양사진에 뒤지지 않을 만하게 되었고”라는 기록은, 조선인 연쇄극이 처음부터 영화 매체를 지향했던 사정을 잘 보여준다.

당시 극장가는 연속영화(serial film) 등 서구 활극영화가 조선인 관객을 매혹시키고 있었다. ‘서양(활동)사진’을 직접 호명하고 서양식 장면을 강조하는 후속 기사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조선인 연쇄극은 미국 활극영화를 염두에 두고 영화 매체 특유의 시각적 볼거리를 앞세워 만들어졌다. 일본 연쇄극과의 비교도 필요하다. 일본의 경우 1904년에 연극과 영화가 결합된 공연이 시작되어 1913년 연쇄극이라는 호칭을 부여받고 1918년경까지 크게 유행한 것에 비해 조선에서는 압축적으로 진행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조선인 신파 극단의 연쇄극은 1919년 10월부터 1920년까지 집중적으로 만들어져 상연되었고 1922년경까지 유행이 이어졌는데, 그 이유는 1923년부터 조선 무성극영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인 연쇄극이 무성영화의 전초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1916년경부터 영화 비중이 높은 연쇄극이 등장했는데, 조선의 경우 처음부터 영화적 요소가 더 부각된 연쇄극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한국 최초의 영화를 만든 단성사 사장 박승필.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의리적 구토>와 함께 서울 도심 곳곳을 기록한 <경성 전시(全市)의 경>이 상영된 것이다. 연쇄극 본편에 앞서 상영된 이 실사 필름은, 연극과 영화의 경계점을 허무는, 즉 영화를 강력히 의도한 조선 연쇄극의 설정 숏(establishing shot)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조선인 연쇄극을 맞이한 조선 관객의 반응은 어땠을까. 1919년 10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연쇄극 상연 첫날부터 조선인 관객이 물밀 듯이 몰려든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영사된 것이 시작하는데 우선 실사로 남대문에서 경성 전시의 모양을 비치우매 관객은 노상 갈채에 박수가 야단이었고, 그 뒤는 정말 신파사진과 배우의 실연 등이 있어서 처음 보는 조선 활동사진임으로 모두 취한 듯이 흥미있게 보아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었더라.”

연구자로서 필자의 견해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영화 장면과 실사 필름 <경성 전시(全市)의 경>을 조선의 ‘초기 영화’(early cinema)적 실천으로 보자는 것이다. ‘내러티브 통합의 영화’(The Cinema of Narrative Integration) 이전에 ‘볼거리로서의 영화’(The Cinema of Attractions)가 존재했다는 톰 거닝의 논의를 참조하면 연쇄극에 포함된 필름 역시 초기 영화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다. 서구의 초기 영화는 작품의 평균 길이가 5분 미만이고, 스토리텔링을 통한 극적 구성이 아닌 몇개의 숏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실사 필름(actuality film)이었으며, 특히 극영화와 달리 관객에게 시각적인 볼거리를 직접 전시하는 영화였다. 즉 연쇄극의 필름 부분만 본다면 내러티브 영화로서의 완결성까지 갖추지는 못했지만 조선 관객에게 경성의 실사와 서구 활극영화의 스펙터클을 지향한 활극 장면들을 동시에 제시한 것이었다. 즉 연쇄극은 사진적 기록성과 활동사진적 감각, 그리고 서사로 구축되는 허구적 세계가 공존하는 양식이었다.

한국 최초의 영화를 만든 신극좌 대표 김도산.

한국영화 100년 기념하기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영화계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중이다. 필자 역시 영상자료원 연구원이자 개인 연구자 자격으로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의 학술출판분과에 의견을 보태고 있다. 그간 조직 내부 사정으로 준비가 늦어진 영상자료원도, 지난해 12월 영화학자 출신의 전문가가 새 원장으로 부임하며 기념사업 추진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이제 영상자료원의 각 사업들은 콘텐츠 기획을 최상위 가치로 두고 유기적으로 연동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첫 행보는 상영, 전시, 교육, 학술행사 등이 중심인 이번 100주년 사업이 될 것 같다. 핵심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것, 그리고 정전 중심의 역사에서 소외된 여성, 테크놀로지, 독립영화 등을 재조명하는 프로젝트들이다.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지난 100년을 정리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100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 고민하고 준비하는 새로운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전문가 조직으로 성장해갈 영상자료원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써갈 영화사 연구자들의 작업에 더 적극적인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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