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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타: 배틀 엔젤>, 안전한 현재의 욕망

미래의 몸

우리의 몸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를 규정짓고 우리의 욕망을 만들고 욕망의 대상이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어쩌고저쩌고. 몸은 예술가들이 버릴 수 없는 소재다. 이들의 머리와 손을 거쳐 인간의 몸은 미화되고 추화되고 과장되고 단순화된다. 그리스 신화나 북구 신화, 인도 신화의 신들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몸을 갖고 있다. 더 아름답고, 더 크고, 더 쓸모 있고 재미있는 몸. 이들이 상대하는 적수들 역시 우리 인간보다 더 재미있는 몸을 갖고 있다. 잘려나간 토막들이 멋대로 붙여지고 뒤틀리고 무시무시하고. 그리스 신화는 인간 몸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난장판이다.

이들에 대한 상상력은 한계가 있다. 신화의 이야기를 상상한 예술가들은 오로지 그들의 피부만을, 그 피부를 통해 드러나는 근육의 모양만을 보았다. 그들은 그 밑의 내장과 기타 장기는 보지 못했고 될 수 있는 한 외면했다. 그리스 신들의 내장을 상상해보라. 분명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들도 먹고 마셨으니까.

판타지에서 SF로 넘어가는 단계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되고 묘사될 수 있다. 오늘은 <알리타: 배틀 엔젤>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몸을 통해 이야기해보자. 판타지에서 SF로 넘어가면 우리가 상상력을 통해 창조한 육체들은 장기를 가지기 시작한다.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피조물의 피부 밑에 있는 것들을 상상하기 시작하면서 판타지는 SF가 된다. 이 경계선은 뚜렷하지 않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서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청동 거인 탈로스는 혈관을 갖고 있었다. 서툴게나마 금속 몸과 생물학적인 액체를 결합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탈로스는 최초의 로봇일 수도 있지만 최초의 사이보그일 수도 있다. E. T. 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에 나오는 올림피아는 기계장치 인형으로 우리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작동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도들이 프랑켄슈타인을 거쳐 로봇과 사이보그 시대로 가면 우리에게 친숙한 SF시대가 열린다.

인공 육체를 다룬 SF의 시도는 다양하고 그 영역은 광대하다. 단지 여기엔 함정이 있다. 이 세계는 끊임없이 현실세계에 영향을 주지만 아직까지 상상력의 영역이며 우리의 욕망과 이야기의 재미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진다. 예를 들어 고대의 외계인 가설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은 옛 그림이나 조각에서 SF영화에 나올 법한 무언가를 발견하면 외계 기술 문명의 흔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그건 당시 사람들의 망상이 지금 사람들의 망상과 어쩌다 겹쳤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알리타: 배틀 엔젤>이 상상하는 몸 역시 과학적 가능성보다는 당시 유행과 문화의 영향을 더 받는다. 기계 몸을 상상하는 데에도 유행이 있는데, 1970년대에 히트했던 <6백만불의 사나이>와 <소머즈>의 사이보그와 사이버펑크가 유행했던 1980, 90년대의 사이보그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SF작가들이 상상하는 기계 육체는 또 다르다. 단지 1980, 90년대의 상상력을 실사로, 정확히 말하면 실사처럼 표현하는 기술이 지금 나왔을 뿐이다. 게다가 영화에서 알리타(로사 살라자르)를 구현한 몸은 300년 전의 과거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기술의 발명품이니 이 영화가 그리는 기술이 속한 시간대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알리타를 이루는 기술에는 수많은 미래가 수많은 과거와 함께 존재한다. 이를 하나하나 따지는 건 재미있는 작업이겠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통 안에 수렴된다. 기술과 기술 묘사가 어떻건 이들은 모두 특별한 기계 몸에 대한 장르의 욕망을 반영한다. 알리타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욕망을 위해 존재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기계 몸 중 고대 신화에서 원형을 찾을 수 없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신과 괴물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알리타와 다른 기계 몸을 가진 존재들 사이에는 계급의 벽이 있다. 그것은 알리타가 전통적인 의미에서 아름답고 알리타의 상대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기계 몸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몸의 모양과 정체성의 연관성을 찾는 건 무의미해 보인다. 몸의 모양이란 그냥 옵션에 불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알리타: 배틀 엔젤>이 그리는 신과 괴물들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알리타는 신과 영웅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느 정도 변주되더라도 전통적인 미의 범주 안에 드는 육체를 고수해야 한다. <알리타: 배틀 엔젤>의 절반 이상은 알리타가 가진 기계 육체의 모습을 정당화하는 과정이다. 여기에 붙은 알리바이들을 보라. 알리타의 새 몸은 사라진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기계라 재생산, 개조, 수리가 불가능하다. 알리타의 무의식이 반영되기 때문에 육체는 가장 알리타다운 모습으로 수정된다. 전투 사이보그 몸이 왜 굳이 인간 여성의 모습이며 왜 구차한 머리칼 같은 것이 있는지는 그냥 넘어간다. 그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왜 굳이 가슴이 커져야 하는지도. 중요한 것은 알리타의 육체는 변형되거나 수정되어서는 안 되며 곧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야기꾼(들)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알리타: 배틀 엔젤>은 정상적인 육체를 가진 주인공(신 & 영웅)이 비정상적인 몸을 가진 존재(괴물)를 파괴하고 죽이는 이야기로 수렴된다. 영화의 세계가 더 넓은 풍경을 보여주어도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비정상적으로 강인하지만 정상적으로 아름다운 몸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그 세계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정상성에 대한 집착은 반대 방향으로도 향한다. 알리타는 몸 전체가 기계로 이루어진 사이보그지만 이 기계 몸은 정신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도 박사(크리스토프 발프)는 알리타가 “정상적이고 건강한 틴에이저 여자아이”의 두뇌를 갖고 있다고 선언한다. 뒤에 자신도 민망한지 “그런게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을 덧붙이지만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까 이 주장에 따르면 아무리 기계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고 끊임없이 기계로부터 자극을 받아도 인간의 두뇌는 언제나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며 일반적인 몸을 가진 사람과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같은 욕망을 품는다는 것이다.

이는 편리하다. 관객이 주인공에게 더 쉽게 몰입할 수 있고 스토리 전개에 필요한 로맨스를 가능하게 한다. 공감 가는 이야기가 가능하다면 무리한 설정은 별문제가 안 된다. 단지 편리함 다음에 남는 것은 안전함뿐이다. 아무리 기계의 간섭을 받아도 완벽하게 인간처럼 생각하는 두뇌는 설정의 발전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리고 인간적 욕망이 양방향에서 철창을 두르는 이 상황에서 알리타가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SF는 미래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장르로 여겨진다. 하지만 SF가 정말 그렇게 소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SF는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지금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지 욕망의 방향이 다를 뿐이다. <알리타: 배틀 엔젤>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배경을 만드는 욕망은 미래의 욕망이 되지 못할 것이다. 기계와 인간은 계속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다른 욕망을 만들어내고 다른 식으로 행동할 것이기에. 내가 엄청 대단한 예언을 하는 건 아니다. 2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손바닥 위의 전자기기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거나 밀면서 쾌락을 얻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지 않았나. 과연 팔다리를 기계로 교체할 수 있는 미래에도 우리의 욕망은 그렇게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하고 인간적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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