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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던 순간들
송경원 2019-06-26

그곳에선 자포자기만이 허락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봉준호만큼 자신의 영화를 명쾌하게 설명해내는 이도 드물다. 실은 적지 않은 감독 인터뷰가 영화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어떤 이는 자세한 설명을 거부하고 누군가는 일부러 모호한 미로를 만들기도 한다. 최악은 결과물보다 많은 의미를 말로 덧붙이는 경우다. 이런 경우 종종 장면이 아니라 말에 설득되는 때도 있다. <기생충>은 다르다. 솔직히 영화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봉준호의 인터뷰를 읽는 것 이상의 정확한 가이드가 없을 것이다. 정교한 건축물처럼 영화를 설계하는 봉준호는 또 다른 의미에서 비평의 쓸모를 무력화하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이토록 많은 말과 해석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기생충>과 관련하여 봉준호 감독이 남긴 무수한 말 중에 특히 눈에 들어온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칸국제영화제 수상 전 “이 영화에 대해선 여한이 없다. 할 만큼 다 했다”는 인터뷰였는데, 겸양의 표현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기생충>의 좌표를 정확히 찍어주는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생충>은 봉준호가 그동안 사랑해왔고,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완벽한 통제하에 구현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봉준호 장르’라는 수사에 대한 그의 화답. “장르영화를 만드는 데 장르 규칙을 잘 따르지 않고, 그 따르지 않는 규칙 틈바구니로 사회 현실 등이 들어가게 된다.” 봉준호가 세상으로부터 영화를 추출해나가는 대원칙. 이 작동원리와 방향성만 염두에 둬도 봉준호 영화의 큰 틀은 대부분 이해된다.

머리로 받아들인 이해의 결과, <기생충>이 빼어난 영화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설국열차>(2013), <옥자>(2017)를 거친 뒤 다시 한국이란 공간으로 회귀한 봉준호는 전작들의 다소 경직된(혹은 장르에 충실한) 움직임이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다는 걸 새삼 증명했다. 장마철 물 먹은 솜마냥 폐부를 스며드는 <기생충>의 축축한 공기를, 한국의 오늘을 들숨으로 들이마시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버티기 위해 날숨을 내쉬어야만 한다. 이미 많은 평자들이 각자의 호흡으로 <기생충>의 경탄할 만한 점을 분석했다. 그들의 해석에 대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아직 말해지지 않은 지점이 있다고 느꼈고 이 글은 거기서부터 출발하려 한다. 이건 <기생충>이라는 들숨에 대한 나의 날숨이다. 정확히는 숨을 내쉬어야 하는데 종종 목에 걸려버린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접혀 있던 실감이 펼쳐지는 순간

<기생충>을 보면서 두번 경탄했다. 아니 산수경석에 맞은 기우(최우식)처럼 머리가 두번 깨졌다고 해야 할까. 경쾌한 장르영화처럼 유머의 호흡을 유지하던 영화가 돌변하는 순간이 있다. ‘데칼코마니’였다는 초기 제목처럼 <기생충>은 지상과 반지하가 짝을 이루듯 붙어 있는 영화다. 강박적이라 할만큼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영화는 인물의 동선부터 역할, 각종 상징물까지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다. 햇볕 잘 드는 박 사장(이선균)네의 통유리창과 햇살 끄트머리에 살짝 걸쳐진 기택(송강호)네 반지하의 창문은 각각 두 가족이 속한 세계를 표상한다. 박 사장네 가족이 창 밖의 물에 한번도 젖지 않는 것과 달리 기택 가족의 창문은 수시로 물(심지어 소변)의 침범을 허용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아예 흠뻑 잠겨버린다. 코미디의 정서가 두드러지던 전반부의 침투가 지나가고 박 사장네 집 지하의 공간이 열리는 순간을 기점으로 영화는 반전한다. 지상과 반지하의 대립이라고 착각했던 영화가 실은 그 밑의 공간을 한층 더 열어서 반지하와 지하의 대립으로 심도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대개 문광(이정은)이 박 사장 집으로 돌아와 한바탕 몸싸움을 벌이는 지점, 영화의 절반이 지나가는 그 무렵을 전환점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영화의 동력과 장르 색이 전환되는 건 분명 그 지점이 맞다.

내가 놀랐던 장면은 그다음이다. 문광과 근세(박명훈)를 지하에 가두고 박 사장 집을 빠져나온 기택, 기우, 기정(박소담)은 폭우를 뒤집어쓴 채 정신없이 반지하 집으로 내달린다. 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어서 마치 사람이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궤적을 그린 지옥도처럼 보일 지경이다. 끝없이 하강하는 나선형의 추락을 바라보며 전반부에 은폐되었던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영화가 그동안 기우와 가족들이 박 사장 집으로 이동하는 지난한 과정을 생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지하 집과 박 사장 집 사이의 거리는 계급의 간격이자 현실의 시간이다.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지만 영화는 기택 가족이 박 사장 집으로 이동할 때 그 거리와 과정을 지워버린 채 단번에 이동시킨다. 반지하 집을 나서자마자 옆집처럼 박 사장 집으로 이어지는 편집은 여러 의도와 효과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은폐와 착시를 일으킨다.

기택 가족과 박 사장 가족은 전반부 거리의 생략 덕분에 ‘가족’이란 카테고리 안에 묶일 수 있다. 양자간엔 결코 넘어갈 수 없는 벽, 또는 거리가 있지만 마치 동등한 대상인 양 일종의 착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거울을 바라보는 방식과 닮았다. 또는 미디어를 통해 다른 계층의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좋겠다. 미디어를 통해 학습되는 정보들은 우리의 현실감각을 교란시킨다. 뉴스에서 몇 억원 단위를 쉽게 이야기하고, 예능에서 값비싼 주거공간을 반복해서 보여줄 때 우리는 네모난 상자에서 재현되는 단위와 감각을 무심코 받아들인다. 그리고 문득 현실로 돌아와 그 격차를 깨달을 때마다 좌절한다. 그리하여 자포자기의 과정 자체가 내재화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 이는 기택 가족이 일시적으로 공유하는 박 사장 집을 자신들의 것처럼 착각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예컨대 기우는 대학생 친구 민혁(박서준)에게 산수경석을 받은 순간부터 민혁의 처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착각 속에 그들 내부로 침투할 ‘계획’을 세운다. 내가 속해 있는 곳(반지하)이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보는 곳이 자신이 속한 세상이라는 착시. 하지만 기우(와 가족들)는 창 너머의 세계에 물리적으로 도달할 수 없기에 결국 산수경석에 머리가 깨지고 만다.

폭우 속 하강 시퀀스를 처음 접했을 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중의 착시를 기반으로 현실을 투사하던 <기생충>이 장르적 왜곡(혹은 압축과 상징화)을 멈추고 드디어 진실의 순간을 들이민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접혀 있던 공간의 주름을 펴고 우화와 상징으로 얽힌 장면들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질 것이라 상상한 순간, 무서워졌다. 우화란 기본적으로 현실이되 현실이 아닌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이 아닌 재현’이라는 선을 긋고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는 거리감을 확보한다. <기생충>의 전반이 그랬다. 우리가 기택 가족의 궁핍한 생활을 보고 웃을 수 있는 건 그것이 일종의 상징과 압축일 뿐 현실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이미지들이 아닌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희극의 완성은 기시감을 채워줄 디테일에 있지만 출발은 안전한 거리감을 전제로 한다. 가족 희비극이라는 <기생충>이 해외 관객에겐 희극에, 국내 관객 사이에선 비극에 방점이 찍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웃을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던 장면들이 지금부터 일제히 반전하여 스크린 바깥의 나(현실)를 덮쳐오리란 생각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심경이었다. 아마 그때가 영화 속 기택 가족과 감정적으로 가장 가깝게 밀착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시금 환상 속으로 투신하는, 이것은 우화인가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장르라는 안전장치를 풀 준비를 하고 있던 나를 당황시켰다. 물바다가 된 집 안에서 기택과 기우, 기정은 뭐라도 하나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곧이어 기택네 가족은 집을 벗어나 비상 대피처인 체육관 창고로 이동한다. 이때 장면 전환은 와이퍼 방식의 편집을 통해 이뤄진다. 물이 차오른다는 이미지 운동을 활용하여 화면 하단에서 4분의 3 지점까지 점점 물이 차오르다가 이내 전체가 잠기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물건을 챙겨 판자에 싣고 반지하방 골목을 벗어나는 부감숏이다. 봉준호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카메라만 하늘로 올라가버린 잔인한 부감”이다. 기택 가족이 살던 골목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이 부감숏은 그들의 처연하고 씁쓸한 밑바닥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곧이어 화면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와이퍼 방식의 편집이 이어지고 상황은 종료된다.

봉준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 중 특히 눈에 띄는 건 포커스의 이동과 상대적으로 긴 테이크다. 봉준호는 가능한 한 장면을 쪼개지 않고 카메라를 이동시키거나 초점의 변화를 주면서 화면을 지속시킨다. 이 역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우선 연결된 장면들을 통해 공간의 형태를 그리는 데 용이하다. 지속시간을 통해 마치 관객이 인물 옆에 선 듯한 리얼리티가 확보되는 측면도 있다. 그런 봉준호가 폭우로 물에 잠기는 기택네 집을 그린 시퀀스에서는 굳이 두번의 도드라지는 편집 방식을 통해 장면을 전환한다. 이건 마치 연극의 막을 올리고 내리는 것 같은 노골적인 신호에 가깝다. 재치있다면 재치 있는 구성이지만 문제는 그 위치다. 바로 직전에 접혀 있던 이동거리를 펼쳐내며 진실의 그림자를 들추던 영화는 홍수에 잠긴 밑바닥에서 다시금 극적으로 재현된 세계, 장르적 과잉, 스스로 탈출했던 우화의 자리를 향해 투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구태여 여기서 이렇게 재치 있는 편집을 사용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가장 판타지스러운 장면은 물속에 잠긴 산수경석이 떠올라 기우에게 발견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영화 초반 산수경석의 시점숏으로 기우를 올려다보는 장면과 정확히 조응한다. 물에 잠겨가는 기택의 집에서 유일하게 자연스런, 혹은 상식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기택뿐이다. “민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던 기우는 현실의 나락에 떨어진 후에도 산수경석을 챙기며 다시 환상 속으로 투신한다. 기정 역시 변기로 역류하는 구정물을 엉덩이로 막으면서도 어딘지 지겨워진 듯한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문다. 이 장면에서 기정을 지켜보는 우리의 반응은 처연하고 씁쓸해야 마땅하겠지만 내겐 어딘지 폼을 재고 있다는 인상이 들었다. <기생충>은 어떤 순간에도 멋지게 찍고 포장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

전반이야 (언젠가는 비틀고야 말) 장르라는 우회로를 납득하고 따라갔다지만, 바닥의 진실을 보여주는 순간에 이르러서까지 영화는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기택 가족으로 상징화된 계급성의 이미지인가, 아니면 카메라로 베어낸 현실의 단면인가. 다시 말해, 이건 진짜인가. 아니면 상상된 이미지들의 전시인가. 이 영화가 현실의 단면을 잘라내 들이미는 게 아닐까 하고 제멋대로 착각했던 나의 믿음이 두 번째로 깨진 건 바로 이 지점이다.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지하실에서 기어올라온 근세는 수석으로 기우의 머리를 내리친다. 처음 머리를 깰 때의 장면은 정신없이 흘려보낸 영화가 두 번째로 근세가 돌을 내리치는 장면은 구태여 자세히, 훨씬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두 번째로 머리를 깨는 이 행위가 내겐 <기생충>의 좀더 솔직한 모습처럼 보였다. 우리는 지금 당신의 굳어진 머리를 깨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이 믿고 있던 현실 속 당신의 위치는 진짜인가요. 혹은 기우처럼 환상과 착각 속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요.

자포자기라는 불쾌하고도 안전한 자리에 앉아

현실을 ‘재현’하는 내러티브 영화가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설정과 상황이 과장되면 인물의 행동과 반응이 사실적이어야 한다. 반대로 설정이 현실적일수록 인물의 행동은 과장되고 상징화될 수 있다. 봉준호의 인물들은 언제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직진하는, 일종의 이야기 속 기능과도 같다. <기생충>에서의 기택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기우와 가족들이 반지하에서 지상의 부잣집으로 침투해 들어갈 때의 행동양식과 반응은 실로 프로페셔널하다. 임무를 수행하듯 능숙한 기택 가족의 행동은 케이퍼무비의 장르적 관습을 따른다. 다시 말해 인물이 곧 장르다.

봉준호의 디테일이 빛을 발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그가 현실에서 차용해온 디테일한 순간들은 허공에 뜨기 쉬운 비현실적인 인물과 상황들을 현실 영역으로 다시 끌어내리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기능적인 캐릭터에 현실의 부피를 불어넣는 것이다. 다만 봉준호가 제시하는 디테일은 꼼꼼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기시감에 가깝다. 대만 카스테라라는 대사 한마디에서 관객은 직접 보고 들은 현실로 연결되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 동시에 봉준호의 디테일은 하나의 단일한 서사 아래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기보다는 파편적으로 흩어진 점묘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 사장 집에 처음 입성한 기우가 마당에서 잠든 연교(조여정)를 내려다보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유리창 너머 하얀 탁자에 연교가 엎드려 자고 있고 문광이 연교를 깨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때 창문 안쪽에서 바라보면 창문의 모서리가 하나의 선처럼 문광과 연교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데 아무리 해도 일어나지 않자 문광이 선을 넘어가 연교 귓가에 박수를 친다. 이미지적으로 ‘선을 넘는다’는 행위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서사적으로는 아무런 기능도 없다. 하지만 전체의 서사를 한번 훑고 나면 영화 전체의 행위를 압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봉준호의 디테일은 대개 이런 식으로 빼곡히 메워진 촘촘한 장식과도 같다. 문제는 장식은 장식일 뿐일진대, 어떤 순간 성질이 다른 두 가지의 장식(기시감과 리얼리티의 디테일과 서사를 축약한 상징적인 디테일)들이 겹쳐지며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생충>은 기본적으로 우화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지만 종종 스스로 현실의 단면을 품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폭우 속 길고 긴 하강 시퀀스처럼 실제로 몇몇 장면은 그런 착시효과를 자아내기도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일부러 그런 착시를 유도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적어도 감독 스스로 이를 엄밀히 구분하고자 하는 의지는 엿보이지 않는다.

상상된 이미지, 또는 우화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현실의 포착과 사실의 재현, 두 가지는 별개의 영역에 있다. 어떤 영화가 두 가지를 기준 없이 뒤섞을 때 착시와 감각의 교란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우화란 재현 불가능한 현실의 복잡한 순간들을 온전히 담아내길 포기하는 대신 명확하게 하나로 수렴되는 목적론적인 서사를 말한다. 이것은 이미 결정된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머릿속에 재현된 투명한 유리의 성이라고 해도 좋겠다. 현실의 허리를 베어 담아낸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해석한 현실의 일부를 구현한 것이다. 우화로 인식되는 영화는 관객 각자가 이야기로부터의 거리감을 조절할 수 있도록 이러한 조건을 영화 스스로 드러낸다. 그 점이 중요하다. 하지만 <기생충>은 의도인지 우연인진 알 길 없으나 일정 부분 그런 경계를 뒤섞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지적한 ‘이미지의 잉여와 정서의 초과’ (<씨네21> 1210호 특집 ‘<기생충> 이렇게 보았습니다’ 중)에 대해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필설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송강호의 표정처럼 이 영화에는 분명 서사와 재현 이상의 어떤 상태와 정조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부분적인 디테일에 그런 순간이 깃들어 있다는 것과 그런 상태를 지향하는 영화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 경계가 흐트러지는 순간, 영화는 현실이 될 수 있다는(동시에 현실이 영화가 될 수도 있다는) 착시가 남용되고 우리의 감각을 교란시킬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디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인지한 뒤 직접 겪은 현실과의 괴리에 매번 좌절하는 것처럼. 기우가 언젠가는 돈을 모아 집을 살 거라는 안전한 불쾌감 속에 안주하는 것처럼.

섣불리 정의내릴 수 없는 진실 앞에서 기우는 눈을 가리고, 기택은 입을 막는다. 영화는 기택에게 대답과 계획을 수시로 요구하지만 기택은 그저 침묵하는 법을 익혔을 뿐이다. 아니 침묵했기에 여지껏 생존했다고 해야 할까. 기어이 그의 침묵이 불가능해질 때 영화는 파국을 전시하고 탐닉한다. 그리하여, 한바탕 악몽 같은 소동 끝에 우리에게 무엇이 허락되는가. 기우는 다시금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는 환상 속으로 투신하고, 기택은 스스로를 현실로부터 격리시킨다. 이것이 현실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합리적인 재현이라면 이토록 철저히 닫힌 세계를 마주한 뒤 우리에게 그다음을 이야기할 기력이 남아 있긴 한 걸까. 동시에 한편에선 체념의 과정이 이렇게 재미있고 흥미로워도 되는 것인가 하는 불안도 피어난다. 어쩌면 <기생충>은 포착과 재현 사이,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깨닫고, 살아남기 위해 포기하는 습관을 몸에 익힌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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