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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라짜로> 배우 루카 키코바니 - 내 삶을 바꾼 영화
김송희(자유기고가) 사진 최성열 2019-07-25

외부와 단절된 채 후작 부인의 담배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마을 사람들. 어머니에게 반항심을 품고 있는 후작 부인의 아들 탄크레디(루카 키코바니)는 착취당하는 순수한 농부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와 친구가 된다. 라짜로의 부활 전후로 시간과 공간이 이동하는 영화 속에서 탄크레디는 라짜로가 찾아 헤매는 친구이자 마을에 변화를 가져오는 인물이다. 탄크레디를 연기한 루카 키코바니는 <행복한 라짜로>로 처음 연기에 발을 디뎠다. 저스틴 비버의 데뷔 과정을 보며 ‘나도 할 수 있겠는데?’ 싶어 유튜버를 시작했고, 팝 가수를 커버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가수로 데뷔까지 한, 진취적인 스타 루카 키코바니가 한국을 찾았다. <행복한 라짜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국 관객을 만나고 싶다”고 먼저 연락을 취했다는 그를 만났다.

-가수이자 모델로 활동했고, 이 영화 이전까지는 연기 경험이 없는데 <행복한 라짜로>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님과 캐스팅 디렉터가 MTV에서 내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에 대해 찾아봤다고 한다. 유튜브에 올라온 내 영상들을 보고 “오디션을 보러 로마로 오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해왔다. 당시 밀라노에 살고 있었는데, 연기를 해본 적도 없는데 오디션을 보러 간다는 게 두려워서 가지 말까 싶기도 했다. (웃음) 오디션을 보러 가서도 연기가 어려워서 “나는 여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감독님이 “연기를 보여줄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간다”고 하셔서 1시간 동안 시나리오를 가지고 연기를 해봤고 다행히 캐스팅이 됐다.

-탄크레디는 라짜로와 우정을 나누기도 하지만, 계급이 다른 사람이기도 하고 완전히 선의로 마을 사람들을 대하지만은 않는다. 감독과 캐릭터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감독님은 우리에게 어떤 식의 연기를 하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이런 의미를 가진 영화라고 해석을 해준 적도 없다. 감독님이 사전에 설정한 캐릭터가 있었지만 리허설을 하면서 배우의 개성에 맞춰 상당 부분 달라졌다. 어떤 대사가 있을 때 “너라면 친구에게 어떤 식으로 얘기하겠니”라고 물어보셨고 “나라면 이렇게 얘기하겠다”고 하면 그런 것들이 반영되어 자연스럽게 대사들을 수정하면서 작업했다. 감독님은 아드리아노와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담기기를 원했다. 단 한번 연기를 제시해주신 적이 있는데, 탄크레디가 시를 읊는 장면을 하루 종일 촬영한 후 감독님이 “오늘 이 부분이 별로였다”면서 내일 다시 촬영하자고 했다. 그날 밤에 리허설을 하면서 <정글북>에서 뱀이 모글리에게 최면을 거는 장면을 보여주셨고, “라짜로를 모글리라고 생각하고 뱀처럼 연기하라”고 얘기해주신 적이 있다.

-탄크레디를 ‘나쁜 남자’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나.

=탄크레디는 18~19살 정도의 캐릭터인데, 아직은 무언가를 깨달아 가는 과정에 있는 인물이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자기 탓이라기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탄크레디의 어머니인 후작 부인은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이다. 탄크레디는 어머니에게 대척하면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완전히 나쁜 남자라고만은 볼 수 없지만, 그렇게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 같다. 촬영을 할 때 감독님은 아드리아노와 내가 초반에 너무 친해질까봐 걱정을 했다. “둘이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떨어지”라고 하셨을 정도다. (웃음) 탄크레디와 라짜로의 우정에 대해서도 관객은 분명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배다른 형제”라고 대사를 한 것도 그만의 감정표현이었을 것이다.

-<행복한 라짜로>는 16mm 필름카메라로 촬영했다. 신인배우에겐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 같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웃음) 감독님이 코닥의 남은 필름을 전부 구매했고, 우리가 촬영하는 게 마지막 필름이었다. 더 구할 수 없는 필름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작업을 한 것이다. 대사라도 틀리면 감독님이 “지금 너 때문에 필름 날아갔다”고 하셔서 실수가 없어야 했다. (웃음) 매일이 공포였다. 어머니가 이탈리아에서 촬영감독으로 일하셔서 암실에서 필름 작업하시는 걸 자주 봤다. 역사의 중요한 요소가 디지털화로 인해 사라져가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님은 휴머니즘을 말하는 영화를 만들면서 올드 스타일의 작업 방식을 고수했고 우리 영화와는 아주 잘 맞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외진 곳에서 장기간 촬영하면서, 실제 인비올라타 마을 사람들처럼 지냈을 것 같다.

=우리가 촬영한 마을은 호텔이 하나, 식당이 두개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처음 호텔에 도착해서 “와이파이 비밀번호 좀 알려주시겠어요?”라고 묻자 “와이… 뭐라고요?”라고 할 정도였다. (웃음) 세달 동안 와이파이도 없이 살았다. 대신 아드리아노를 비롯한 배우들과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아드리아노와 나는 연기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내일 연기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하면 다른 한 사람이 위로해주면서 형제처럼 의지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전세계 영화제에 함께 다니면서 친밀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아드리아노의 집이 와인 농장을 하는데, 올여름에는 그곳에 가서 함께 지낼 예정이다.

-이탈리아에서 자랐지만 조지아에서 태어났고, SNS에 조지아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더라. 조지아와 러시아의 분쟁 관계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하던데.

=5살까지 조지아에 살았고, 여름방학마다 그곳 할머니 댁에서 지내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게 조지아는 라짜로, 유럽의 대도시는 탄크레디를 의미한다. 조지아는 라짜로처럼 순박하고 솔직한 곳이다. 이탈리아영화계가 여성 차별이 심한 반면 조지아는 여성 황제가 있었을 만큼 여성의 힘이 강한 곳이다. 2008년 러시아와 조지아 분쟁 당시 나는 조지아에서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그때 탱크와 군대를 목격했고, 사람들이 혼란을 겪는 것도 지켜봤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어디서든 조지아를 지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밝힌다. 지금 하고 있는 배지도 조지아 기사단의 문양이다.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까지 모든 종류의 SNS를 유기적으로 활용하더라. 정치적인 발언뿐 아니라 <행복한 라짜로>에 대한 홍보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가 내 인생을 바꿨다”라고 자주 말하던데 어떤 이유인가.

=SNS는 내 메시지를 전하는 무기와 같다. 이 영화를 찍기 전과 후 내 삶은 크게 달라졌다. <행복한 라짜로>는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진정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하고 돈을 벌고 물건을 사는데, 행복은 새로운 전자제품이나 새 물건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과거에 나 역시 소비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영화를 찍고 난 후 진정한 행복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영화를 13번 정도 봤는데, 볼 때마다 진정한 행복이란 물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나만의 방식을 찾고 싶다. 앞으로 연기를 할 때도 누구를 흉내내지 않고 나만의 것을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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