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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의 중력> 영화인과 자연인의 틈새에 고인 임권택의 시간
송경원 2019-12-04

임권택 감독은 손님이 오면 늘 녹차를 대접한다. 스크린에 불이 켜지면 그는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자신의 지난 작업들에 대해 천천히 입을 뗀다. 그의 기억 속에는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의 제작 과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녹차의 중력>은 임권택 감독의 입을 빌려 <만다라> <서편제> <춘향전>에 대한 살아 있는 강의들을 들려준다. 하지만 정성일의 카메라는 임권택의 설명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 흐르는 시간, 비어 있는 장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행위들을 지속적으로 응시한다.

평론가 정성일은 “감독의 시간은 영화를 찍는 시간과 기다리는 시간, 둘로 나뉜다”고 말했다. <녹차의 중력>은 임권택 감독이 102번째 영화 <화장>(2014)의 촬영을 앞두고 기다리는 시간을 담아낸 영화다. <백두 번째 구름>(2018)이 <화장>의 촬영 현장에서 거장의 비밀을 따라가는 영화라면 <녹차의 중력>은 영화인과 자연인의 틈새에 고인 임권택의 시간을 담아낸 기록에 가깝다. 평론가 정성일에게 임권택은 운명이고 감독 정성일에게 임권택은 배우고 싶은 스승처럼 보인다. 한 그루 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선 임권택의 ‘지금’을 숏마다 긁어모아 꾹꾹 눌러담은 정성일의 손길에는 존경과 헌사, 애정이 묻어난다. 동시에 감독으로서 정성일은 숏 사이에 놓인 빈틈, 얼핏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에 집중한다. ‘영화’라는 개념에 대한 열정적인 질문과 치열한 반응의 집합. 그리하여 임권택의 시간은 마침내 정성일의 영화가 된다. 고요하게 웅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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