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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영의 네오 클래식]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 4 Luni, 3 Saptamini Si 2 Zile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 / 상영시간 113분 / 제작연도 2007년

“이 나라에서 뭘 기대하겠어요?” 크리스티안 문주의 영화 <엘리자의 내일>(2016)에서 주인공 로메오는 영화 내내 이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내겐 너무 멋진 서쪽 나라>(2002)나 <신의 소녀들>(2012)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되풀이된다. 세월이 흘러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사회처럼, 감독의 분노와 절망도 변함없이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1987년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하는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그 오래된 환멸의 뿌리를 찾아가는 작품이다. 제목은 영화 속에서 태아가 낙태되기 전까지 자궁에 머물렀던 시간을 의미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면서, 수십년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는 부패와 불법, 무기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묻고 또 묻는다.

악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느 대학 기숙사의 평범한 아침 풍경이 펼쳐진다. 룸메이트인 가비타(라우라 바실리우)와 오틸리아(아나마리아 마린카)는 각자 하루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얼마 후 오틸리아는 시내로 나가 호텔방 하나를 예약한다. 가비타의 임신중절 시술을 위해서다. 그런데 친구 소개로 찾아온 불법 낙태 기술자 베베(블라드 이바노브)가 모자란 시술비와 몇 가지 실수를 꼬투리 잡아 두 사람을 협박하고 ‘위험수당’으로 그녀들의 몸을 요구한다. 돈도, 시간도 부족한 두 사람은 결국 그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고, 가비타는 예정대로 시술을 받는다. 저녁에 남자친구 집을 방문한 오틸리아는 남자친구 부모와 지인들의 대화에 불편해하고, 남자친구의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인 태도에도 실망한다. 호텔로 돌아온 그녀는 가비타의 몸에서 나온 태아의 사체를 싸들고 한밤중에 거리로 나가 어느 건물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온다.

영화는 이처럼 하루 동안 두 젊은 여성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따라가면서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 루마니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준다. 불법낙태와 태아 유기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영화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그 앞뒤로 묘사되는 현실의 풍경들도 씁쓸하고 암울하기는 마찬가지다. 가난한 기숙사에서조차 삶의 일부처럼 행해지고 있는 암거래, 평범한 시내 호텔들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법행위들, 그럴듯한 말들로 위장하지만 철저한 계급의식을 숨기지 않는 상류층,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황량한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 등.

희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한 사회의 부정과 병폐들은 두 여성이 겪는 끔찍한 폭력의 경험으로 모두 수렴된다.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비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시 차우셰스쿠 정권은 산업화를 위한 노동인력 증가라는 명목하에 여성의 낙태는 물론 피임까지 금지하는 전근대적인 인구정책을 강제했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여성들이 불법 낙태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고, 또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도 모른 채 길거리에 버려졌다. 이 시기에 여성의 몸은 단지 아이를 생산하는 도구에 불과했고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엄격한 처벌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낙태와 태아 유기 등 모든 기능 이탈의 책임은 여성에게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과 공포도 오로지 여성의 몫이었다. 같은 시기에 남성은 그 공포를 외면하거나 이용했다. 가비타를 임신시킨 장본인은 영화 내내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오틸리아의 남자친구도 임신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인 양 회피한다. 또 불법 낙태 기술자 베베는 여성들의 공포를 이용해 돈과 성을 착취한다. 명백한 불법이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끝까지 떳떳하다고 강조하고, 두 여성의 몸을 요구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발설하지 않는 이 남자. 끝까지 당당하고 끝까지 상대를 기만하는 이 낙태 기술자는 바로 국민의 가난과 공포를 이용해 자신들의 욕망을 채웠던 독재정권에 대한 탁월한 알레고리다. 또한 물리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그리고 정신적 폭력이 교묘하게 맞물려 돌아갔던 지난 시대의 상징적 기표라 할 수 있다.

목격자 혹은 증인으로서의 인물들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 영화로 분류될 만큼 영화의 전체적인 양식은 사실성과 현장감을 높이는 데 맞춰져 있다. 불필요한 서사적 기제를 제거하고 극적 긴장이나 반전을 자제했으며, 특수한 음향효과나 시각적 효과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 로케이션 촬영으로 제작되었고, 호텔방에서 낙태 시술을 하는 장면이나 뱃속에서 나온 태아 사체를 비닐봉지에 담는 장면 등 일반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들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주었다. 아울러 영화의 주제나 주인공의 내면심리를 암시하는 장치들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가령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작은 어항 속 물고기 두 마리와 길 잃은 새끼 고양이 두 마리는 향후 두 여성이 겪을 상황을 암시하며,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텅 빈 거리 풍경은 인물들의 황폐한 내면을 나타낸다. 남자친구 부모와의 식사 장면에서 오틸리아가 느끼는 불편함과 답답함은 롱테이크와 고정 카메라를 결합한 양식으로 표현되고, 태아를 버리러 돌아다니는 장면에서의 흔들리는 카메라와 사운드업된 거친 숨소리는 인물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를 극대화한다.

특히 주인공 오틸리아는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데, 이러한 ‘고정 외적 초점화’ 양식은 그녀를 시대와 사회에 대한 목격자 또는 증인으로 만든다. 불법과 폭력이 횡행하고 차별과 억압이 만연한 한 사회의 공간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그 실체를 직접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이러한 목격자-주인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신의 소녀들>에서는 젊은 수녀 보이치타가 수도원 집단의 종교적 맹신이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목격자 역할을 맡고, <엘리자의 내일>에서는 외과의사 로메오가 딸을 유학 보내는 과정에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불법과 부패를 몸소 경험하는 증인으로 등장한다.

영화의 라스트신은 목격자이자 증인으로서의 주인공 역할을 더욱 확실하게 부각시킨다. 태아를 유기하고 돌아온 오틸리아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호텔 식당에 내려온 가비타를 발견하고 그녀 앞에 가 앉는다. 몇마디 어색한 대화를 나눈 후 가비타는 고개를 숙인 채 메뉴판만 바라보고,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오틸리아는 마지막 순간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암전이 흐른다. 이 예상치 못한 라스트신은 영화의 시점(時點)을 과거에서 현재로 급격히 이동시킨다. 그리고 단번에 관객을 담론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체제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누군가는 얽히고 설킨 폭력의 구조 아래서 착취당하고 있다. 또 여전히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새로운 희생양을 찾고 있다. 감독은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야 화면 위에 자신의 이름과 영화 제목을 올려놓는다. 끝이 곧 새로운 시작인 것처럼. 혹은, 영화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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