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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자들' 황승재 감독 - 일하는 당신은 행복한가요?
남선우 사진 백종헌 2020-11-12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아서 오히려 낯선 2220년의 대한민국.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인간(정경호)과 사람으로서 삶을 꾸리고 싶은 인공인간(강유석)이 종일 서울의 뒷골목을 헤매다 서로의 비밀을 맞닥뜨린다. 다분히 현재적인 미래의 풍경으로 두 남자를 불러낸 황승재 감독은 “100년 뒤에도, 200년 뒤에도 술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치 구전설화와 같은 SF영화 <구직자들>을 만들었다. 전작의 실패라는 깊은 터널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개봉까지 하게 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황승재 감독을 만나 <구직자들>의 뒷이야기를 들었다.

-<구세주2>(2009) 이후 오랜만의 연출 복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흥행과 작품성 둘 다 못 잡은 감독으로서 영화산업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았다. 글을 써도 연출을 맡을 수 없는,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겪었다. 그러다 인생 뭐 있나 싶어서 2016년부터 비행기 값만 벌면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한번 떠나면 2주 이상씩 유럽, 아시아, 북미를 도시별로 놀러 다녔다.

-그럼 <구직자들> 프로젝트는 언제 시작했나.

=2018년 봄쯤이다. 큰누나가 퇴직금을 받았는데, 100만원을 비행기 값 하라고 입금해줬다. 그 돈으로 여행 가지 말고 영화를 찍어보자 싶더라. 쌈짓돈이지만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100만원에 큰누나 친구 분이 또 100만원을 얹어주셨다. 그렇게 200만원을 가지고 200년 후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웃음)

-2220년이 배경인 이유를 알겠다. (웃음) <구세주2> 정필주 프로듀서와 또다시 호흡을 맞췄는데, 서로에게 어떤 파트너인지 궁금하다.

=정필주 프로듀서와는 전작을 작업할 때부터 말이 잘 통하고 합이 좋았다. 그도 여러 영화를 준비하다 부침을 겪었는데, 다들 영화를 찍고 있는데 우리만 안 찍을 수 없다 싶어서 함께 일을 벌였다. 예산도, 스탭도 없는 상태에서 엉뚱한 일을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둘은 이미 위기에 처했으니 기존의 프로세스를 깨나가는 방식으로 창작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모두가 위기인데, 지금이야말로 기존의 프로세스에 질문을 던지고 변화해야 할 때가 아닌가. 이 인터뷰를 보는 분들에게 이렇게 적은 비용으로도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다.

-<구직자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성사되진 않았지만 2013년쯤 정필주 프로듀서가 한국 근대소설을 영화화하는 기획안을 개발했고, 나에게 채만식의 <레디 메이드 인생>을 영화화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소설을 보면 근대사회에서 봉건적 사대부의 습성을 갖고 살아가는 룸펜 P가 아들 창선을 위해 일을 찾아야 하지 않나. 그 상황을 비틀어 각각의 시대성을 가진 인물들이 일자리를 찾아가는 하루의 이야기를 만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P로부터 인간 한명과 창선으로부터 인공인간 한명을 만들어 둘을 동행하게 했다.

-극중 인공인간은 신체를 가진 인공지능이자 장기보관 기능이 있는 인형처럼 보였다. 영화 속 2200년대 인공인간의 기능과 현실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200년 뒤의 인공인간은 어떠할 것이라고 상상하며 각본을 쓰지는 않았다. 인간다운 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인공인간의 처지를 설명하려 했다. 인공인간이 청년, 외국인 근로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여러 소외된 계층을 상징하게 하고 싶었다. 상상을 진짜로 여기게 하는 기존 SF와 달리 실재를 보여주며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그렇다면 인간성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나.

=다른 이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여부가 인간이냐 아니냐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 같다. 경호는 관계가 끊어져 고통을 앓고 있는 인간인 데 반해 인공인간 유석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건 진정한 인간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유석은 인공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경호 또한 유석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으니 다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화면 연출보다는 인물의 대사로 이러한 배경을 설명해야 했다. 배우들이 많은 대사량을 소화해야 했는데, 연출적으로 유의한 점이 있다면.

=대사가 많으면 배우들이 힘들다. 그래서 내가 써둔 대사를 배우들에게 연기하게 하기보다 그들이 쓰는 말투로 대사를 바꿨다. 그들의 삶에서 나오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이를테면 정경호 배우가 극중에서 중국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중국어를 한다. 실제로 정경호 선배가 중국에서 영화와 드라마 출연도 하고 공연도 많이 했다. 선배에게 아무 중국말이나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애드리브로 너무 즐겁게 장면을 채워줬다. 요즘은 내가 감독이니까 디렉팅을 한다기보다 배우들과 함께 작업해나가는 방식으로 연출하는 중이다. 정경호 배우에게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라고, 강유석 배우에게는 리액션에 충실하라고 했다.

-이 영화가 첫 출연작인 강유석 배우와는 어떻게 만났나.

=한 대학교 워크숍에서 만났다. 연극영화과 교수인 학교 선배가 아이들과 뭐든 찍어보라고 나를 워크숍에 불렀다. 여대여서 남자배우가 없었고, 오디션으로 강유석 배우를 뽑은 거였다.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참 똑똑하고 말이 잘 통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직자들>에서 경호가 유석을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고 내일을 향해 가듯이, 나도 그 친구와 새로운 작업을 하게 된 거다. 나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배우다.

-드라마가 이어지는 중간중간 인터뷰 신도 대거 등장한다. 실제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준비된 대본을 연기하는 배우도 있는 것 같던데.

=영화가 워낙 저예산이다 보니 대화 이외의 장면을 만들어나갈 비용이 없었다. 그래서 감정의 장면화를 효율적으로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모아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연기자 구인 사이트, 연기학원 등에서 60명을 모았고, 지인 40명 정도를 모아 100여명을 인터뷰했다. 영화 한번 출연시켜달라는 지인들의 빈말을 모두 실현시켜준 셈이다. (웃음) 모두에게 질문과 답변이 적힌 가이드 대본을 주고 30분 정도씩 촬영했는데, 15분 정도가 지나면 대본 밖의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하더라. 그 감정이 살아 있는 부분을 완성본에 넣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가 있다면.

=고시원에서 밥과 단무지를 먹었을 때 행복했다고 말하며 눈물 흘린 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처음으로 자기만의 공간을 가졌을 때의 벅찬 마음을 표현한 건데, 나도 처음 독립해서 옥탑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을 때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웃음) 모든 분들이 영화 속 인터뷰들에서 공감할 지점 하나씩은 있지 않을까.

-감독으로서 관객이 공감했으면 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행복하려고 일을 하는데 정작 자기 일을 하면서 행복하지 않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게 이 영화의 작의였다. 영화를 보는 분들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삶을 살고 있나 떠올려보면 좋겠다. 그러다 모든 분이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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