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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티고네>가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을 소환해야 했던 이유는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아주 가끔 배우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영화를 만날 때가 있다. 정말 오랜만에 그런 영화를 만났다. 앞으로 나에마 리치가 어떤 연기자가 될진 알 수 없지만, <안티고네>에서 그녀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쉽게 잊지 못할 눈빛을 가졌다.

‘이미’와 ‘아직’ 사이

<안티고네>를 보며 가졌던 첫 번째 의문은 왜 작품의 제목을 <안티고네>로 내걸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안티고네>는 영화의 주요 사건 대부분을 현대적으로 각색했기에 독자적인 영화로 성립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영화의 제목과 인물 이름까지 모두 원작에서 가져와 그리스 신화(또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만들려 한다. 내게 이러한 시도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안티고네’가 지금 이 시대에 반드시 되살아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소피 데라스페는 관객이 이 영화를 통해 단지 안티고네를 연상하는 것이 아니라 안티고네를 직접 바라봐야 한다고 믿는다.

안티고네의 보이지 않는 적대자

그리스 신화(또는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 속 안티고네는 두개의 법이 충돌하는 세계의 갈등을 다루는 이야기의 원형이다. 신화 속 안티고네는 도시의 질서를 위협했던 둘째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위에 세줌의 흙을 뿌려 금지된 장례를 치른다. 장례를 금지한 크레온의 명령이 땅의 법이라면 안티고네가 따르는 것은 하늘의 법이다. 안티고네에게는 (그가 어떠한 자이든) 죽은 자에게 제의를 바쳐 그의 영혼을 기리는 것이 이 세계의 정의고, 그는 그것이 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의 세계, 두개의 법. 영화 <안티고네> 역시 두개의 법이 대립하는 세계를 고스란히 영화에 가져온다. 둘째 오빠 폴리네이케스(라와드 엘 제인)를 대신해 감옥에 갇힌 안티고네(나에마 리치)는 모든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에서 알제리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폴리네이케스의 편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심장이 시키는 것’(하늘의 법)을 따르기 위해 땅의 법을 위반하고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두개의 법 사이의 딜레마, 그것이 안티고네를 ‘산 채로 무덤에 갇히도록’ 한다. 이는 그것이 그 누구의 작품이든 간에 안티고네라면 응당 짊어져야 하는 운명이다.

그런데 신화와 달리 <안티고네>에는 안티고네가 싸워야 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누구와(또는 무엇과) 싸우는가? 영화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소포클레스의 비극보다 훨씬 까다롭게 느껴진다. 원작에서 땅의 법은 크레온이라는 절대 권력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만 영화에서는 그러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안티고네는 그녀에게 유죄를 선고할 법과 대립하지만, 이 법을 정초한 주인의 자리가 비어 있는 탓에 그녀가 싸우는 대상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피 데라스페는 비어 있는 크레온의 자리에 구체적으로 특정 인물을 앉히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인물이 그 빈자리를 잠시 채웠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안티고네는 자신이 누구와 싸우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힘든 싸움을 벌이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 역시 암담해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악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은 이때문이다. 안티고네가 ‘심장이 시키는 것’을 따르듯, 안티고네를 심문한 경찰, 법정의 검사와 판사 모두는 자신이 따라야 하는 법적, 제도적 의무와 절차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 관료적 시스템에는 영혼이 없다. 이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심장이 시키는 것 대신 자신의 자리에 부여된 법적, 제도적 절차의 매뉴얼을 따르면 그만이다. 첫 재판에서 변호사 선임을 거부한 안티고네는 스스로에게 유죄를 내린다.

그런데 안티고네가 유죄를 인정하는데도 재판은 끝날 수 없다. 재판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절차를 준수하는 일이다. 검사, 변호사, 판사 등 재판에 관련된 그 누구도 안티고네가 왜 오빠를 위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재판이 잘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역할만 수행하는 자동화된 기계라 해도, 그것이 그들이 악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어쩌면 영혼 없는 이 거대 시스템에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영혼의 자리는 형식적인 절차가 대체했다. 할머니는 그 복잡한 법적 절차에 맞춰 시민권을 신청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그녀의 사정에 귀 기울이는 것은 영혼의 끌림이지 법적, 제도적 절차에 따르는 관료제의 몫이 아니다. 그래서 안티고네의 할머니를 연행하던 경찰은 사무적으로 보석 절차를 안내할 수 있고, 안티고네의 절규는 법적인 절차 진행을 방해하는 성가신 난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안티고네의 친구들이 그녀를 위해 법정에서 소란을 피우는 장면은 꽤 흥미롭다. 영화 <안티고네>는 이 장면을 마치 아나키스트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은 유쾌한 소동극처럼 묘사한다. 그것이 조롱하는 것은 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존립 기반으로 삼기 위해 마련된 절차들이다.

얼굴의 힘, 인간에 대한 신뢰

영화 속 안티고네는 ‘아니오!’라고 말하며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인물이기보다는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절실히 지키겠노라고 주장하는 인물에 가깝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심장이 시키는 것을 따르겠다는 그 욕망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외치는 인물에 가깝다. 알제리에서 망명한 안티고네 가족이 캐나다에서 추방되어 알제리로 돌아간다면 생존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안티고네는 그저 그 위험에서 둘째 오빠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 그녀는 거창한 목표를 위해 싸우는 투사가 아니다. 그것이 세상과 불화한다 해도, 그녀는 그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운다.

<안티고네>는 관객을 바라보는 안티고네의 얼굴로 영화를 시작하고 끝맺을 만큼 얼굴의 힘을 믿는 영화다. 무언가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도, 그리고 그 믿음이 배신당한 순간의 절망감과 분노도, 그리고 두개의 법 사이에 끼어 있는 두려움도 모두 안티고네의 얼굴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영화 속 안티고네의 얼굴은 관객을 설득하는 가장 큰 힘이다. <안티고네>가 관객과 어떤 연대감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나에마 리치가 연기하는 안티고네의 얼굴의 힘 덕분이다. 영화 속 안티고네의 얼굴은 왜 재현이 세상의 모든 오브제 중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장 소중한 오브제로서 숭고하게 다루어왔는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정서적 울림을 준다. 나에마 리치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잔다르크 역의 마리아 팔코네티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는데, 아마도 그것은 일반적인 영화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정형화된 얼굴과 표정에서 이탈한 새로운 얼굴과 마주한 듯 한 느낌을 나에마 리치의 얼굴이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마 리치의 표정에는 불안정성이 함께한다. 이는 그녀의 얼굴이 불안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얼굴에 내재하는 긴장감, 그러니까 얼굴에 새겨진 표정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를 불안정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표정의 불안정성이 비극이 비극으로 이어지는 처지에 처한 그녀의 영혼을 대변한다. 소피 데라스페는 나에마 리치의 얼굴을 통해 지금은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버린 ‘얼굴은 영혼의 창’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신뢰의 가시적 징표’라든가 하는 표현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얼굴의 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안티고네>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작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이 연대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얼굴,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

안티고네의 얼굴이 더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절망이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티고네는 자신(과 가족)을 저 아래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안티고네>는 이 구렁텅이에 빠진 자가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영화다.영화가 원작과 달리 안티고네를 이스메네의 언니가 아닌 동생으로 설정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가장 어리고 약한 존재인 안티고네, 그런 그녀가 자신보다 더 보잘것없고 하찮은 자, 결코 환대할 수 없는 것을 환대하는 ‘무조건적인 연대’를 포기하지 않는 그 고결한 욕망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안티고네>가 그 먼 시대의 신화를 지금 다시 반복하는 이유다. 하이몬의 아버지는 안티고네에게 왜 그런 오빠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미래를 희생하려 하는지 묻는다.

안티고네는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어린 시절에 캐나다 공항에 들어서던 무렵의 둘째 오빠의 울음을 그 이유로 이야기한다. 어쩌면 어린 시절 둘째 오빠의 그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의 이미지로 안티고네의 기억에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더 아래쪽으로 연대의 손을 뻗고, 그때마다 그녀는 집행유예를 잃고, 시민권을 잃고, 모든 것을 잃는다. 그렇게 산 채로 무덤으로 걸어 들어간다.

예외를 거부하는 연대

물론 <안티고네>가 안티고네를 홀로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도 다양한 연대의 손길이 이어진다. <안티고네>에는 SNS 영상 몽타주 장면이 세번 등장한다. 때로는 멸시와 조롱을, 때로는 연대의 카니발을 벌이기도 하는 SNS 영상 몽타주 장면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결과다. 첫 번째와 두 번째 SNS 영상 몽타주 장면이 진실보다는 표면의 사실만을 가지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중의 특징을 보여준다면, 세 번째 영상은 얼핏 안티고네에 대한 순수한 연대의 운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연대의 운동의 계기인 법정에서의 안티고네의 행동은 ‘그렇게 보이도록’ 연출된 것이고, 그 이후의 SNS반응은 이에 대한 반응이다. 물론 연출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연대의 진정성이 그저 자기 증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SNS 놀이와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 영화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안티고네의 할머니가 청소년 보호시설에 갇힌 손녀를 위해 매일같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 앞을 지나가는 이들뿐 아니라 (아마도) 동일한 상처에 아파하는 가족들이 할머니의 곁에 몰려들어 함께 노래를 부른다. 어쩌면 이 장면은 소피 데라스페가 꿈꾸는 연대의 단서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사람들이 할머니 곁에 몰려든 것에 대해 아무 설명을 하지 않는다. 할머니의 마음을 느낀 사람들이 그 곁에 함께하는 것과 같은 연대, 어쩌면 그것이 할머니의 노랫소리가 세 번째 SNS 영상의 배경으로 깔린 이유인지도 모른다. 이 SNS 영상에서 보이는 연대의 진정성은 화면 자체보다는 할머니의 노랫소리에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연대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이를 안티고네가 둘째 오빠에게 내민 손길과 질적으로 동일한 연대라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안티고네의 변호사는 재판관과 검사에 비해 안티고네에게 상당한 호의를 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법정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한계 안에서이다. 하이몬의 아버지가 안티고네에게 베푸는 호의 역시 마찬가지다. 징벌도 호의도 이 정당한 절차 바깥으로는 감히 나가지 않는다.

문제는 난민(또는 이주민)으로서의 안티고네의 삶은 이 정당한 절차 외부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언니 이스메네가 울부짖으며 하는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착민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삶조차 이주민(또는 난민)에게는 너무 높은 장벽으로 막혀 있다. 그것이 안티고네가 “나는 언제든 다시 법을 어길 거예요”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들을 사회 외부에 남겨둔 상태에서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호의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안티고네가 원하는 연대가 아니다. 안티고네가 꿈 꾸는 것은 무조건적인 환대에 가깝다. 그것은 지금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조건들을 뛰어넘는 행위다. 안티고네와 하이몬은 두번 철책을 넘는다. 영화 후반부, 안티고네와 하이몬은 철책을 넘어 들어간 잔디밭에서 사랑을 나눈다. 이 행위는 안티고네가 그 무엇도 포기하거나 양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선택한 유일한 행위다. 영화 곳곳에 자연의 풍광을 삽입하곤 했던 <안티고네>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이 만든 인위의 법이 아닌 가장 자연스러운 욕망(심장이 시키는 것)과 자신의 행위를 합일시키는 안티고네와 하이몬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티고네>는 연대를 낭만화하지 않는다. 낭만화는 사태에 드리워진 어둠을 감추게 할 위험이 있다. 구조적 모순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안티고네만을 예외로 한 호의를 통해 어떤 사태가 해결된 것처럼 포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세계에 균열을 냈던 신화 속 안티고네의 고결함을 배신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진짜 연대의 시작은 연대의 탈낭만화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안티고네>가 궁극적으로는 실패담의 서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것이 신화든 영화든 간에 안티고네의 싸움은 결국 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티고네의 고결함은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신념을 위한 싸움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는 그 태도에 있다. 안티고네의 이러한 태도가 크레온의 세계를 무너뜨렸듯이, 소피 데라스페가 원하는 것은 안티고네를 통해 공고하게 돌아가는 이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며 그 불완전성을 들추는 일이다. 어쩌면 안티고네가 그 모든 호의를 거부하고 알제리로 떠나며 비워진 그 자리야말로 이 세계가 균열하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이 균열은 이 세계의 불완전성의 징표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균열(안티고네가 떠난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세계를 꿈꾸어야 한다. 그러니까 안티고네가 ‘산 채로 맞이한 죽음’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알제리로 추방당하는 안티고네는 자신의 과거를, 또는 또 다른 난민을 마주친다. 안티고네의 비극은 그렇게 반복될 것이다. 이 반복의 역사를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라는 질문.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휘파람 소리(또는 휴대폰 벨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이 휘파람 소리가 법정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알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그 휘파람 소리는 그런 안티고네를 향한 연대의 다짐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화면 바깥에 ‘이미’ 도착한 그 휘파람 소리가 ‘아직은’ 화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처럼, 그 연대의 손길은 ‘이미 그러나 아직은 아닌’(already but not yet)이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지금 캐나다 공항 출국장에 선 눈앞의 안티고네가, 아니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안티고네가 ‘이미’ 그 길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 길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것이 안티고네가 우리를 바라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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