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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영의 네오클래식] 미하엘 하네케의 '히든'

잘못은 그들에게도 있다

<히든> Hidden

감독 미하엘 하네케 / 제작연도 2005년 / 상영시간 118분

1961년 10월 17일, 알제리 독립전쟁이 격화되던 무렵에 파리 도심에서 시위가 벌어진다.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들의 야간통행금지 조치에 항의하는 평화적 가두 행진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광기에 전염된 프랑스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고, 며칠 새 2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한다. 자유를 상징하는 도시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 믿을 수 없는 참극은 정부의 조직적인 은폐와 대다수 언론의 침묵으로 빠르게 잊힌다. 또 프랑스 사회 전체의 암묵적인 외면도 집단적 망각에 한몫한다.

이듬해 자크 파니젤이 이 사건을 소재로 영화 <파리의 10월>을 만들지만, 당국에 의해 곧바로 상영과 배급을 금지당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이 영화를 본 미하엘 하네케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40여년 동안 이런 비극이 은폐되어왔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한다. 그리고 영화 <히든>을 구상한다.

폭력의 역사

영화의 주인공은 TV 문학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인 조르주. 그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파리의 한 중산층 동네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의 일상을 찍은 비디오테이프가 배달되면서 평온하던 그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기이한 그림과 함께 연이어 배달되는 테이프는 점점 더 큰 불안과 공포를 만들어내고, 어느 순간 조르주는 잊고 있던 옛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범인으로 추정되는 마지드라는 인물을 찾아간다. 마지드는 어린 시절 그의 집에 살았던 알제리인으로, 조르주는 당시 부모를 속여 그를 고아원에 보내게 했다.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마지드에게 조르주는 어떤 사과도 거부하며 더이상 비디오테이프를 보내지 말라고 경고한다. 얼마 후 마지드는 조르주를 자신의 집에 불러 그가 보는 앞에서 칼로 목을 그어 자살한다. 사건이 일단락되고 조르주는 모든 것을 잊으려 하지만, 마지드의 아들이 방송국으로 찾아와 그에게 대화를 요구한다. 조르주는 또다시 어떤 양심의 가책도, 죄책감도 없다고 외치며 그를 돌려보낸다.

영화 내내 타인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 행위는 한번도 일어나지 않지만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 강렬한 방식으로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번째 폭력은 한 아이의 거짓말에서 시작된다. 40여년 전, 그러니까 1961년 10월 조르주의 부모는 집안일을 거들던 알제리 부부가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사망하자, 책임감을 느끼고 그들의 아들 마지드를 입양하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함께 나누기 싫었던 어린 조르주는 마지드를 쫓아내기 위해 거짓말로 부모를 속인다. 마지드에게 수탉의 목을 치도록 시켜 피를 뒤집어쓰게 한 다음, 부모에게 달려가 그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이른 것이다. 부모는 입양을 포기하고, 마지드는 고아원을 전전하며 힘든 세월을 보낸다. 아이의 이기심과 부모의 책임 회피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은 것이다.

두 번째 폭력의 양상은 좀더 복잡하다. 먼저, 마지드가 우연히 TV에서 조르주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을 계기로 오랫동안 묻혀 있던 첫 번째 폭력이 다시 현재에 호출된다. 누군가 그의 불행한 삶을 알리기 위해 조르주에게 익명으로 비디오테이프를 보내고(서사 구조상 마지드 아들의 행위로 추정되지만 영화 마지막까지 입증되지 않는다), 이는 조르주 가족에게 공포를 유발하면서 일종의 간접적인 폭력 행위가 된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사건을 소환하는 자리에서 일말의 사과나 반성도 표명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의 태도를 비난하는 조르주의 행위 역시 명백한 폭력에 해당한다. 과거의 폭력을 덮는 이 또 다른 폭력에 마지드는 크게 상처받고 결국 죽음을 택한다. 40여년 전 그(들)의 거짓말에 희생양이 되었던 수탉처럼, 마지드 역시 그(들)의 변하지 않는 기망(欺罔)에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자신의 목을 자른 것이다.

영화 속에 나타나는 프랑스인의 모습은 4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들은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상대를 기만하고, 피해자의 입장에 대해서는 무관심과 외면으로 일관한다. 특히 하네케는 문학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인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의 모습을 통해 프랑스 중산층-지식인의 이중적 태도를 문제 삼는다. 말로는 온갖 자유의 향연을 즐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과오엔 침묵하고 문화, 경제, 교육 등 모든 기회를 다 누리면서도 그들이 지배했던 타자들의 고통과 불행에는 눈을 감는 태도에 분노한다. 현대 프랑스 사회의 핵심인 이 중산층-지식인의 철저한 위선이 사회 주변부에 남아 있는 증오의 기억을 더 심화시키고 지속시키는 주요 원인임을 고발하는 것이다.

영화는 하나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거리 맞은편의 한 주택을 바라보고 있는 비디오카메라의 시선이다. 주인공의 일상을 말없이 지켜보는 이 미디어의 시선은 그를 불안과 두려움으로 몰아가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과거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물론, 미디어의 시선은 끝까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시선이 될 수 있기에 항상 위험을 내포한다. 또 감독이 영화 <퍼니 게임>(1997)에서 보여준 것처럼, 미디어는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며 경우에 따라 실재를 대신할 수도 있다. 이 영화 역시 첫 장면부터 미디어 이미지와 실재 이미지 사이의 경계를 지우면서 언제든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 미디어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3분이 다 되어서야 관객에게 그때까지 보고 있던 것이 영화 속 비디오테이프의 이미지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미디어, 거짓말

그런데 감독은 원칙적으로 거짓인 미디어가 때로는 진실을 폭로하는 거짓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현실이 미디어보다 더 거짓일 때, 더 치밀한 조작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삭제할 때, 미디어의 시선이 그 내부로 파고들어가 허위의 이면을 들춰낼 수 있다는 것이다. 조르주에게 폭력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그의 무책임함과 이기심을 드러나게 만드는 몇편의 비디오 영상처럼, 혹은 자유의 나라 프랑스의 철두철미한 위선을 끝내 세상에 알린 자크 파니젤의 영화처럼. 영화를 비롯한 모든 미디어는 하나의 가공물이고 현실인 척하는 가짜이지만, 때로는 그 가공의 시선이 현실의 시선보다 더 큰 진정성과 힘을 얻을 수 있다.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에 대한 완벽한 알레고리인 이 영화는 불행히도 현시점에서 프랑스 혹은 서구 전체가 겪고 있는 또 하나의 사태를 상기시킨다. 표현의 자유를 지상의 가치로 내세우는 문화권과 테러라는 최악의 폭력으로 맞서는 또 다른 문화권간의 갈등이다. 무고한 이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는 그 어떤 정당성도 주장할 수 없으며 일체의 재고없이 엄격하게 심판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정말 표현의 자유가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면서까지 타인들의 가장 소중한 가치를 조롱해도 무방할 만큼 자신들의 과오와 치부도 남김없이 드러내 공론화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이제는 더이상 통제하지 않아도 각자 알아서 선택적 표현의 자유, 상대적 표현의 자유를 실천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끔찍한 악순환이 지금까지 이렇게 되풀이될 리 없다.

*이번 칼럼을 끝으로 ‘김호영의 네오클래식’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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