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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뱀과 용의 기도
강화길(소설가) 2021-04-12

<사바하>

얼마 전 절에 다녀왔다. 법당 천장에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등 수십개가 가득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기도’로 이해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말이다. 아마 다양한 마음들이 있었을 것이다.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거나, 승진을 바라는 현실적인 마음들도 있었을 것이고, 피로한 하루하루를 제발 위로해 달라는 애원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마음들은 부처님 앞에 평등하게 매달려 있었다. 뭐 하나 더 크고 작은 것 없이 나란히 똑같이.

새삼 그 말이 이해됐다. 신 앞에서는 누구든 평등하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 앞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 많이 배운 자와 적게 배운 자, 못난 자와 잘난 자의 구분이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만일 신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든 간에 모두와 똑같이 기다리고 인내해야 한다.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종교가 어떻게 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었겠는가.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이 세상의 모두는 평등하며, 너는 그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을 해주는 유일한 존재. 무한하고 공평한 사랑을 나누어주는 절대자.

때문에 그 말과 사랑을 이끄는 사람들이 존경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요구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영화 <사바하>의 박웅재(이정재) 목사의 말을 빌리자면 용이 뱀이 되는 경우도 많고, 애초 용도 아니었던 것들이 용처럼 구는 경우도 너무 많다. 내가 보기에는 물론… 후자가 더 많은 것 같긴 하다. 혹세무민의 세상이다. 문제는 그들의 타락이 결국 자신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자꾸만 누군가를 죽게 한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연다. 영화에서 박웅재 목사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저 밑바닥에서 개미들처럼 지지고 볶고 있는데, 도대체 우리의 하느님은 어디에서 뭘 하고 계시는지.”

인상적인 대사였다. 하지만 이보다 충격적인 건 바로 그 앞에 등장했던 어떤 이야기였다. 아주 신실한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아프리카에 선교 갔다가 가족을 모두 잃었다는 것. 13살짜리 어린아이가 신의 이름으로 그 가족에게 총을 쏘았다고 했다. 억울한 죽음은 이런 식으로 충격과 공포를 내던진다. 마음에 착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슬픈 건, 이것이 꼭 종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우리 주변에 가득한 온갖 다른 말로 치환될 수 있다. 정의, 진실, 정직, 평등, 희망…. 갑자기 비정한 기분이 든다. 이번주만 해도 얼마나 많은 부조리를 목격했는가. 얼마나 많은 죽음을 겪었는가. 지난 일년 내내,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내던져졌다. 아니 평생 그랬던 것 같다. 점점 더 심해진다는 생각뿐이다. 우리는 정말로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세상에 과연 희망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어쩌면 판도라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닐까. 그러니까 사실 그 상자는 텅 비어 있었던 게 아닐까.

가장 힘든 순간은 바로 이럴 때인 것 같다. 어떤 절망에 휩싸이는 순간이 아니라, 그냥 냉소하게 되는 찰나. 그냥 눈을 감고 싶어지는 순간.

<사바하>에서 지지고 볶은 시간은 거의 십수년이다. 그 시간 동안 여자 아이들이 차근차근 죽어나갔다. 뱀이 된 용 때문에 말이다. 그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울고 있는 자’가 끝없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도저히 그 울음을 무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그는 자신이 운 이유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간 죽은 많은 아이들의 영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울음이 멈추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인가. 이쯤 되면 또다시 그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당신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물론 모두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사바하>의 깊은 울림은 어쨌든 이 지지고 볶는 사바세계에 있는 인간들이 울음소리를 듣기 시작한 뒤 벌이는 이런저런 시행착오와 고군분투에 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진심 어린 소망에도 깃들어 있다.

‘울고 있는 자’의 자매가 말한다.

“언니도 같이 죽여주세요. 다음 세상에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때문에 이 영화는 뱀이 된 용의 연쇄 살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울고 있는 자’의 비명을 이해한 한 인간의 기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 여자아이. 그 애는 ‘울고 있는 자’와 함께 울면서 살았다. 하지만 그를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울음소리를 무시하며 살았다. 문을 잠갔다. 다가가지 않았다. 무서워서, 너무나도 무서워서 말이다. 하지만 울음은 함께했다. 매일 들었고, 들을 수밖에 없었기에, 마음에 새겨졌다. 외면할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바라는 것이다. 귀신으로 태어난 언니가 다음 세상에는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말이다. 그 어떤 풍파도 겪지 않고 오직 평범하게, 뱀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간절한 마음. 등에 불을 켜는 마음. 신 앞에 공평하게 띄우는 기도. 어쩌면 그 기도가 아이의 언니를 용으로 만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건 너무 거창한 의미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관심이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만든다고 이야기하자. 살아 있는 것들을 계속 살아 있게 한다고 말하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런 믿음일지도 모른다.

구원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할까? 잘 모르겠다.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하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있다. 무방비 상태이고 미래를 알 수 없고, 그래서 냉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삶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것을 손에 꽉 쥐고 있다. ‘울고 있는 자’가 건네준 건 이런 게 아닐까. 어둠 속에서 불을 붙일 수 있는 것.

아 이런, 결국 또 희망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고 만다. 텅 비어 있는 상자에 대한 끝없는 믿음 말이다. 그렇다면 한번쯤은 기도해도 좋을 것 같다. 계속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그때마다 내가 고개를 돌릴 수 있기를. 그럴 힘이 남아 있기를 빌어본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좀 많이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세속적인 소원이 좀더 우선에 있지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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