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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에서 보여준 페촐트의 역사 인식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피닉스>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엔딩을 되새기며, 서정시가 불가능함을 증명한 서정의 영화에 대해 썼다.

재건과 복원의 딜레마

<피닉스>의 넬리(니나 호스)는 육체로 자신을 증명하며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얼굴을 감싼 붕대를 풀어 자신을 증명했던 넬리는 영화의 엔딩에서 팔에 새겨진 숫자로 다시 한번 자신을 증명한다. 넬리의 육체는 그 자체가 아우슈비츠를 증명한다. 아우슈비츠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이 육체적 증명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아우슈비츠를 생략하려 했던 전후 독일의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육체에 새겨진 아우슈비츠의 고집스러움은 그 흔적을 지우려는 모든 시도를 실패하도록 했음을 보여준다. 아우슈비츠를 생략하려 했던 역사, 그럼으로써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가려 했던 시도들, 또는 그럴 수 있으리라 믿는 서정적 낭만은 이 육체/역사의 고집스러움 앞에 ‘말을 잃는다’(넬리의 육체적 증명을 확인한 자들의 리액션을 보라).

왜 아우슈비츠를 보려 하지 않는가

아우슈비츠에서 만신창이가 된 얼굴의 수술을 앞둔 넬리는 의사에게 ‘예전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의사는 과거와 절대 같아질 수 없다며 얼굴을 바꾸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이 대화는 <피닉스>의 딜레마를 함축한다. ‘재건과 복원’이라는 <피닉스>의 화두는 단지 넬리의 얼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페촐트가 훼손된 몸을 역사적 알레고리로 곧잘 활용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넬리의 육체적 변화 자체가 페촐트의 역사적 인식을 드러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얼굴을 갖는다 해도 육체적 각인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는 아우슈비츠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아우슈비츠/육체는 결코 그 이전의 상태로 복원될 수 없다.

이러한 페촐트의 역사적 태도는 넬리가 아우슈비츠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련의 단계에 다층적인 함의를 담게 한다. 넬리가 조니(로널드 제르펠트)를 통해 회복하는 옛 모습은 아우슈비츠 이전의, 또는 아우슈비츠가 생략된 외양이다. 넬리는 옛 모습을 회복하며 영화 초반부에 볼 수 없던 생기를 되살린다. 실제로 넬리는 고집스럽게 조니를 찾아나선다. 이는 그녀가 육체로서 아우슈비츠를 증명하는 존재이지만, 또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유대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이지 않을까? 레네(니나 쿤첸도르프)의 대사를 빌린다면, 그녀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아우슈비츠를 경험했기 때문에 유대인이다. 즉, 아우슈비츠는 그녀의 증명서다. 넬리는 아우슈비츠를 누락하려는 욕망과 그것을 증명하는 육체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다. 아니, 이 둘 모두가 이중 인화된 필름 같은 존재다. <피닉스>는 이 딜레마에 대한 영화다. 김병규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사람의 삶과 그가 머무르는 세계의 질서가 일으키는 불화를 주시”(<씨네 21> 1314호, ‘잔해 속의 우화-<피닉스>의 붉은 원피스와 검은 상의가 의미하는 것’)하는 영화다.

조니가 사온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넬리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라. 넬리가 붉은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등장할 때,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수치심에 사로잡힌 태도를 보인다. 몸을 움츠리는 몸짓은 마치 나신을 감추려는 자와 유사하게 느껴질 정도다. 조니가 붉은색 원피스를 권한 이유는 기차역에 마중나온 이들이 그녀를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알아봐야 하는 넬리의 모습은 아우슈비츠를 관통한 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생략된 모습이어야 한다. 조니가 넬리에게 짙은 화장을 권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고, 그때마다 넬리는 조니의 의도에 없었던 과잉된 리액션을 보인다. 넬리의 과잉된 리액션은 ‘배신’이라는 <피닉스>에 숨겨진 또 다른 주제와 연관된다. 넬리가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는 일은 아우슈비츠를 누락할 때만 가능하기에 이는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사실을, 그곳에서 희생된 자들을 배신하는 행위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증명한다. 그것이 넬리가 처해 있는 딜레마다.

이러한 딜레마는 넬리만의 것이 아니다. 조니는 넬리의 외양을 아우슈비츠 이전으로 복원하려 하지만, 그 계획이 성공에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을 느낀다.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온 조니는 무언가를 보고 놀라 얼어붙는다. 짙은 화장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넬리는 조니에게 “나를 알아보겠어요?”라고 묻는다. 내게 이 대사는 좀더 넓은 의미로 다가온다. <시티 라이트>의 “이젠 보이나요?”라는 무언의 대사가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티 라이트>에서 이 대사(자막)는 단지 시각적인 능력의 회복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깨달음 여부를 함축한다. 마찬가지로 <피닉스>에서 조니에게 던져진 이 질문은 아우슈비츠의 역사가 새겨진 넬리를 알아볼 수 있는가, 라는 것일 수도 있다. 조니는 화장과 걸음걸이가 틀렸다고 지적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얼어붙을 이유가 없다.

그에게 ‘알아본다는 것’은 두려움이다. 넬리/아우슈비츠는 죄의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는 이유다. 실제로 넬리를 다시 마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는 데 반해, 유일하게 조니만이 그녀를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누가, 그리고 왜 아우슈비츠를 보려 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페촐트의 역사적 응답이다(실제로 독일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아우슈비츠를 부정한 바 있다). 조니가 넬리에게 기차역에 나온 옛 이웃들이 아우슈비츠에 관해 묻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본다는 것의 두려움, 그리고 절망

본다는 것의 두려움은 레네의 것이기도 하다. 레네가 스스로에게 총을 겨눈 시점은 (아마도) 늦은 밤 흥분한 모습의 넬리를 만난 직후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레네의 모습은 불을 켜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그러니까 아우슈비츠를 지운 채 생기를 회복한 넬리와 마주할 때이다. 생략된 아우슈비츠, 그것이 레네가 절망한 이유다. 우리는 영화 엔딩에서 듣는 <Speak Low>라는 곡이 두 사람이 저녁을 먹던 날에 흘러나왔던 곡이었음을, 그리고 그때 레네가 넬리에게 자신을 위한 노래를 부탁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엔딩에서 넬리가 부르는 이 노래는 아우슈비츠를 생략한 세계에 대한 송가이자 레네를 위한 레퀴엠이다. 페촐트는 더할 나위 없는 방식으로 엔딩 장면을 마무리했고, 김병규 평론가 역시 이에 대해 더할 나위 없는 평론을 남겼다. 무슨 말을 덧붙인다 해도 사족이다. 비록 그렇다 해도 <피닉스>의 엔딩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날카롭고 단호하다.

조니와 만나 생기를 되찾던 무렵의 넬리라면,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건 야만이라 했던 아도르노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에서 넬리는 자신이 폐허 위에 쌓아올린 서정의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난다. 그 프레임 바깥이 어떠한 세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구축한 세계와 단호하게 절연하는 그녀의 시도는 더이상 세계를 아우슈비츠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렇기에 그와 관련된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의 행위다. 그것은 서정시가 불가능하다는 선언과도 같다. 페촐트는 아도르노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 서정시를 통해 그가 옳음을 증명한다. 서정시의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서정의 영화, 그것이 <피닉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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