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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마음이 하는 일] 청춘과 꿈의 막이 내리는 순간
오지은(뮤지션) 2021-08-26

일러스트레이션 EEWHA

꿈을 좇는 사람은 멋지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니 부럽고 대단하다는 말도 듣는다. 동시에 너 그러다 굶어 죽는다는 말도 듣는다. 특히 부모의 불안과 그에 따른 협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친구와 지인들의 태도는 롤플레잉 게임에 나오는 마을 주민 같다. 미지의 지역으로 모험을 떠나는 용사를 웃으며 환송하는 마을 주민. 그 미소 뒤에는 이런 마음이 있다. 저 사람 멋지다… 하지만 곧 죽을 위험에 처하겠지?

음악과 글의 영역에서 이래저래 돈벌이를 하며 버티고 있는 나는 아마도 분류상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일 테고 그런 나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렇게까지 이 ‘꿈 대륙’이 험난한가. 물론 땅에 풀뿌리 하나 찾기 힘들긴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의문도 든다. 이 땅에서 지내면 마냥 행복한가? 자유를 느끼고 하루하루가 충만한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가? 탑 위에 다다르면 엄청난 금은보화와 영원한 행복의 증표가 있는가?

역시 어딘가 과장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용이 뿜는 불기둥의 위험도, 금은보화의 반짝임도, 행복의 증표까지 모두. 물론 ‘꿈 대륙’에는 용도 있고, 사막도 있고, 탑도 있고, 금은보화도 있다. 하지만 다른 대륙에도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위기는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꿈 대륙’에서 지리학적으로 가장 넓은 땅은 모래밭이다. 꽃밭도 아니고, 하얀 성도 아니고, 비옥한 초원도 아닌 그냥 모래밭. 그리고 아마도 많은 용사들은 용을 만나지 못한 채로, 금은보화를 만지지 못한 채로 모험을 마칠 것이다. 그렇다고 대부분이 동굴 속에서 이름 모를 백골이 되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다! 난 꿈에 대한 글을 읽을 때 중요한 부분이 뻥 뚫려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광활하고 재미없는 모래밭과 무용담 없는 용사의 이야기 말이다.

일본 드라마 <콩트가 시작된다>를 보았다. 고등학교 동창 남자 개그 트리오의 이야기라고 해서 실눈을 뜨고 봤다. 이러다 결국 잘되겠지 뭐. 좌충우돌 예술인의 청춘 감동 드라마겠지 뭐. 얄팍한 편견은 15분쯤 뒤에 깨졌다.

사람들은 100번의 오디션에 떨어져도 101번째에 붙어서 결국 스타가 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당연하다. 멋지니까. 재미있으니까. 희망과 용기를 주니까. 하지만 75번째의 오디션에서 꿈을 내려놓은 사람의 이야기는 잘 없다. <콩트가 시작된다>는 후자에 대한 이야기다.

팀 이름은 맥베스, 결성 10년째, 단독 공연을 열어도 관객이 들지 않고, 써주는 방송도 없고, 매니저도 시큰둥한 것 같고, 해볼 만한 짓은 거의 다 한 것 같은데 이 상태에서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는다. 나이는 어느덧 29살. 부모님은 나이 들어가고, 오래 사귄 여자 친구와 결혼도 해야 할 것 같고, 빨리 사회에 나가서 자리도 잡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일이 좋다. 가능하다면 계속하고 싶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 지긋지긋하다. 마음의 소리는 점점 커진다.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포기하면 지는 걸까. 그 말이 맞다면 무엇에 지는 걸까. 언제 무엇에 이길 수 있을까. 사랑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더 잘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의 만족감일까, 티켓 판매 수익일까. 탈출은 지능순일까. 내려놓는다면 지금까지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이걸 놓은 후의 내 인생의 빛은 바래는 걸까.

맥베스 3인은 열심히 답을 찾는다. 그 과정이 멋있지 않아서 보는 나는 멋있다고 생각했다. 절망, 실망, 즐거움, 폭소, 우정, 신뢰, 비난, 멱살잡이, 다시 새로운 콩트 만들기, 이런 시간을 통과한다. 거쳐야 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비장하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여러 재미있는 전개 중에 맥베스 3인이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을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10년 전 맥베스의 결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강당에서 공연을 마치고 나온 얼빠진 맥베스에 그만 ‘너희 재능 있는 거 아냐?’ 같은 말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10대들은 짧은 말에도 마음을 뺏기고 인생의 항로를 정하곤 한다. 이제 동력을 잃은 스물아홉 맥베스는 선생님에게 그때의 격려를 다시 듣고 싶다. 선생님은 그들의 재능을 누구보다도 빨리 발견해준 사람이니까. 기대에 가득 찬 맥베스를 앞에 두고 선생님은 말한다. “이제 해체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중요한 화자가 한명 더 있다. 나카하마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점원이다. 그 가게는 커피가 무척 싸고 리필도 되기에 맥베스 멤버들은 항상 그곳에 모여 각본 회의를 한다. 레스토랑에서 일하기 전 나카하마는 성실한 회사원이었지만 그만 마음을 다칠 일이 생긴다. 모든 경험은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말도 있지만 꺾인 마음은 다시 일으키기 힘들다. 퇴사 후 나카하마는 깊이 가라앉아버린다. 그런 나카하마의 눈에 들어온 것이 맥베스였다. 맥베스의 개그가 나카하마의 삶의 에너지가 되었다. 흔한 덕질 이야기지만 사실 들어도 들어도 신기한 얘기다. 마치 허공에 뿌려진 씨앗 같다. 맥베스는 본인들도 모르는 새 씨앗을 뿌렸고, 비록 누구나 부러워하는 울창한 숲은 이루지 못했지만, 나카하마의 마음속에 아주 두텁고 푸른 싹을 틔웠다.

하지만 ‘그걸로 되었다’ 하고 말할 수 있을까. 나카하마의 마음속 떡잎이 맥베스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줄 순 없다. 하지만 맥베스에 새로운 떡잎을 틔워줄 순 있다. 떡잎은 사람을 새로운 길로 이끈다. 그나저나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반복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지만’은 ‘꿈 대륙’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하고 싶다. 하지만 실패할 것 같다. 하지만 하고 싶다. 하지만 준비하는 동안 기회비용은 어쩌지. 하지만. 하지만.

한 시절의 문을 닫아야 하는 타이밍이 있다. 얄궂지만 그렇다. 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아 대략 이쯤이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아마도 마음속에 수백번의 ‘하지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강하다. ‘하지만’의 파도를 견뎌온 것도, 흔들리고 의심하며 자리를 지킨 것도, 상황을 직시하고 내려오기로 한 것도 전부 강한 마음이다.

맥베스가 얼마나 멋진 콩트를 만들어왔는지는 나카하마가 분명 보았다. 나카하마가 어떤 사람인지 손님들은 분명 보았다. 회사 로비에 아름다운 꽃을 꽂은 사람을 나카하마는 분명 보았다. 분명히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누군가는 보았다. 그리고 싹이 튼다. ‘하지만’이라는 단어가 끼지 못하는 영역이다.

일러스트레이션 EEW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