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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자마' 미지의 땅을 탐험하며 마주한 정체불명의 상황

18세기 말 남아메리카, 스페인의 식민지 영토에서 오랜 기간 치안판사로 일해 온 자마(다니엘 지메네스 카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적하라”는 내용이 담긴 총독의 편지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서 타지에서 공무를 수행하며 얻은 권태로 인해 사실상 자마의 내면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다. 그러던 중 죽음 직전에 몰린 어느 원주민의 외침을 듣고 자마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되돌아본다. “어떤 물고기는 죽을 때까지 평생 앞뒤로만 헤엄친다. 자기를 육지로 떠미는 물과 싸우지만 물이 물고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강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물고기의 이야기는 현재 자마의 상황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점차 변화시킨다. 더이상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절망감이 들자, 자마는 새로운 일에 뛰어든다. 악명 높은 전설적 도둑 ‘비쿠냐 포르토’를 제거하는 일에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용병이 된 자마가 미개척 지역으로 이동한다. 유령 같은 토착민이 거주하는 미지의 땅을 탐험하면서 그는 숨 막히는 정체불명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애쓴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환각적이고 몽환적인 모험은 그렇게 시작된다. 문명의 이기를 거절하는 습기와 적대감으로 가득찬 불편한 공간에 둘러싸여, 영화의 주인공은 진정한 현기증을 경험한다.

<자마>는 2001년에 데뷔작 <>을 내놓을 당시 이미 ‘새로운 아르헨티나영화의 지표’로 꼽혔던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감독의 고향 마을인 아르헨티나 북부의 ‘살타’를 중심으로 진행된 기존의 ‘살타 3부작’과 달리 이번 영화의 시공간은 다소 비현실적이다. 정확하게는 1790년대 히스패닉 식민지의 상황을 다루지만 최소한으로 표현된 배경 탓에 정확한 상황을 꼬집어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파라과이의 교차점인 ‘그란차코 평원’의 어딘가를 영화의 실험적인 플롯이 가로지른다. 국내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다양한 영화제를 통해 감독의 작업들이 소개된 바 있지만 공식적으로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영화가 개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국내 팬들의 기대도 높다. 이 영화는 특히 2018년 영화잡지 <필름 코멘트>가 ‘올해의 영화 1위’로 지목하면서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높은 관심을 받은 바 있다.

<자마>는 여러 면에서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결을 보인다. 우선 현대가 아닌 과거를 다루는 영화이며, 직접 쓴 각본이 아니라 안토니오 디 베네데토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란 점이 그렇다. 주인공의 성별 역시 이전과 달리 유일하게 남성이다. 내러티브의 중심에는 고독과 빈곤으로 고뇌하는 왕실의 관료 ‘자마’가 놓여 있는데, 전반부에서 인물은 자신의 상황을 파편적이지만 명료한 상태를 통해 드러낸다. 하지만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주관적인 양상을 띤다. 식민 벽지에서 시작된 한 인물의 내면적인 모험은 그렇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영역으로 넘어간다. 숏의 길이도 후반부로 갈수록 길어지고 프레임의 여백도 차츰 커진다.

사운드 디자인 역시 일반적이지 않다. 이러한 패턴은 감독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데, 마치 현재의 감각이 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듯 시각이 사운드에 종속돼 있다. 감독에 의하면 “영화의 결말을 중시하는 19세기의 내러티브 시스템에서 벗어나고자” 이러한 구성을 택했다고 한다. 임의적인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플롯의 인과관계는 의도적으로 파괴되며, 사건과 무관한 사운드가 전면에 배치된다. 덕분에 관객은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선’이 아니라 ‘부피’처럼 느끼고 체험한다. 특히 마지막 30분의 결말은 극도로 강렬하다. 붉은빛으로 칠해진 원주민의 행렬과 땀에 젖어 풀밭과 물에 엉킨 주인공의 모습은 그 자체로 끔찍한 역사의 나른함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감각적인 최면과 체험으로 가득한, 매우 기이한 시간성을 지닌 영화다.

CHECK POINT

공상과학의 역사영화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머리 없는 여인>(2008) 이후 거의 10년 만에 <자마>를 완성했다. 그사이에 SF영화에 몰두했는데, 이 경험이 <자마>의 시간성에 영향을 주었다. 심지어 감독은 “역사영화와 SF영화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두 장르가 ‘상상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면에서 공통점은 있다.

스페인계 멕시코 배우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났지만 멕시코시티에서 자란 다니엘 지메네스 카초는 유명한 히스패닉 계열의 감독들과 작업하면서 세계적인 배우로 성장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으로는 알폰소 쿠아론의 <러브 앤드 히스테리>(1991), 기예르모 델 토로의 <크로노스>(1992),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나쁜 교육>(2004) 등이 있다.

미술의 전략

18세기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감독은 무수한 자료를 찾아냈다. 하지만 대개의 자료들이 동일한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미지의 대륙을 마주한 백인의 모습’을 기록했던 것이다. 반면 원주민들 중심의 자료는 전무했다. 모든 면에서 그들은 멸종한 듯 보였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미술은 영리하다. 면밀히 그리기보다는 ‘삭제’하는 데 더 치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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