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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SF를 좋아해] 결국 작품은
이경희(SF 작가) 2022-03-24

양영순 작가의 웹툰 <덴마>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작품 내적으로도, 작품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란마저도.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줄거리부터 요약해 소개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줄거리를 설명하기가 정말 난감하다. 핵심 인물만 수십명에 달하는 데다 그들이 겪는 사건들이 서로 복잡하게 얼키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피소드의 시간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섞어놓아서 언제가 언제인지 정리하기도 어렵다. 연재는 또 어찌나 길게 이어졌는지, 총연재 회차가 1414화에 달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도 이 작품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를 못했다.

네이버 연재 페이지에 적힌 소개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덴마>는 ‘특수능력을 지닌 악당 덴마가 꼬마의 몸에 갇혀 우주택배 업무를 하며 겪는 기상천외한 모험 이야기’다. 완결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중에 맞는 말이 거의 없는데, 어쨌든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일종의 배달부 이야기인 셈. 하지만 늘 그렇듯 택배 회사 실버퀵은 평범한 택배 회사가 아니며,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배신자요, 우주는 비정하고, 주인공 덴마에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어휴, 진짜 모르겠다.

<덴마>의 스토리가 이토록 복잡한 이유는 작가 양영순의 즉흥적인 연출 성향에서 기인한다. 작가 스스로 인터뷰에서 수차례 밝혔듯, 그는 짜임새 있게 스토리를 설계하고 작업하는 스타일의 작가는 아니다. 그보단 그때그때 흥미로움을 유발하는 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장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충격적인 전개나 반전, 필요하다면 새로운 설정도 즉석에서 뚝딱 만들어 줄거리에 신선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좋게 말하자면 한회차의 재미에 최선을 다하는 작가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뒷일이야 어찌 되든 당장의 일만 생각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잦은 지각과 부정기적인 연재 주기가 더해져 <덴마>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완성된다. 다음 회차가 언제 업로드될지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목마른 기다림의 시간마저도 이 웹툰의 아슬아슬한 재미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요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솔직히 조금 부럽다. 극소수의 작가만이 부릴 수 있는 사치니까. 매번 약속을 어기는 작가를 원망하면서도 독자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기행을 양해하게 된다. 다음 편이 너무 궁금하니까. 연재가 중단되는 것보단 나으니까. 참, 그는 연재를 도중에 중단하기로도 유명하다.

작업 방식이야 어쨌건 10년치 분량을 쌓아올린 이야기가 오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될 리 없다. 적어도 모두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결말의 파국은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었고, 독자들 역시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으리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연재 기간 동안 느낀 즐거움과 결말 이후 남게 된 찜찜함 중 무엇이 우선일까? 보는 내내 즐거웠다면 결말이 좀 별로여도 용서될 수 있는 걸까? 떡밥 회수와 설정의 개연성은 정말로 이야기를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일까?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깔끔한 결말을 기대하는 독자들과, 영원히 결말 맺기를 회피하며 새로운 흥밋거리를 투척하는 작가 사이의 팽팽한 힘싸움은 웹툰이라는 플랫폼과 만나 폭발적인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여느 인기작의 숙명이 그렇듯 <덴마> 역시 연재가 길어질수록 부정적인 댓글 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개가 느리다는 이유로,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궁금한 이야기 대신 다른 부분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여성 등장인물들의 비중이 늘어났다는 이유로.

댓글의 분위기가 한층 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온라인 게임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이 있기 즈음이었던 것 같다. 특정 성우의 정치적 성향이 온라인상에서 이슈로 떠오르며 부당하게 계약이 해지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페미니즘 성향을 드러내는 창작자들에 대한 무분별한 사상 검증과 폭력적인 퇴출 요구가 이어진 끔찍한 백래시였다. 당시 양영순 작가는 간접적으로 피해 창작자에 대한 연대 의사를 표현했고, <덴마> 연재 내내 관련 논쟁에 시달렸다. ‘임신 중단’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거나, 여성 캐릭터가 강조된다는 등의 사소한 이유를 들며 심각한 악플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여성 인물들의 비중을 늘리며 마치 댓글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한다. 그래인지 내게는 <덴마>의 연재 과정이 마치 작가와 댓글의 사투처럼 느껴졌다. 완결에 이르러 대립은 더욱 격해진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덴마>에는 스토리의 핵심 부품이 하나 빠져 있다. 작중의 모든 사건은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반드시 하나의 벽과 마주하게 된다. ‘실버퀵 7지부의 정전 사태.’ 해당 사건의 전후로 연관된 모든 사건들을 서술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까지 시시콜콜 풀어놓는 동안에도 작가는 집요하게 정전 사태 장면만은 보여주지 않는다.

<덴마>의 독자들은 누구나 정전 사태가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할 클라이맥스일 거라 예상했으리라. 작가 역시 이러한 독자들의 기대를 모를 리가 없었고. 댓글의 여론 역시 정전 사태에 대한 추측과 다른 에피소드로 질질 끌지 말고 어서 사건의 전말을 공개하라는 식의 내용이 줄을 이었던 것로 기억한다. <덴마>라는 작품의 완결은 정전 사태를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상황. 하지만 연재가 종료되는 순간까지도 작가는 정전 사태의 전말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에필로그 내내 여성 인물들에 집중하고, 그들의 성취에 점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마치 댓글 창 속 사람들이 원하는 결말을 일부러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이.

작가가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는 알 수 없다. 원래 의도했던 방향이었을 수도 있고, 한없이 확장된 이야기를 수습하지 못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저 변덕을 부린 것이었을 수도 있고. 어쨌든 작가는 독자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비켜간 결말을 그려냈다.

댓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작가와 독자가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되면서, 작품에 대한 독자의 영향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하고 격렬해졌다. 조금만 지루해져도 별점 테러가 쏟아지고 베스트 댓글 창은 비난 여론으로 도배된다. 어떤 독자들은 마치 작가를 조종하는 것이 목적인 양 교묘하고 집요하게 여러 회차에 걸쳐 암시를 심어놓기도 한다. 주말 드라마 마지막회를 앞두고 ‘제발 우리 000 죽이지 말아주세요’라며 시청자 게시판을 도배하던 시절은 이제 애교로 느껴질 정도다.

물론 열성 팬들이 벌이는 기행이야 어디서나 일어나는 흔한 일이지만, <덴마>를 둘러싼 싸움에는 조금 독특한 지점이 있다. 영향력은 결국 영향력일 뿐, 누구도 작가가 지닌 창작의 자유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