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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상한 그림책 작가 이수지 인터뷰
김혜리 사진 오계옥 2022-04-14

음악도 개도 그림이 되는 꿈

2016년에 이어 두 번째 최종 후보에 오른 끝에 지난 3월21일 그림 작가 부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이하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는 영광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과로 중이었다. 발표 당일 주요 방송사 뉴스부터 시사교양 프로그램, “대체 왜?” 싶은 음식 기행 예능까지 몰리는 섭외 속에, 그는 그림책을 향해 모처럼 쏠린 대중의 시선을 장르에 관한 관심과 조금 외롭게 노력해온 동료 작가에 대한 지원으로 확장하고자 꽤나 무리하고 있었다. 이수지 작가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너그러운 눈과 입에서 무던한 미소가 깜박 꺼지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 알 것이다. <씨네21>과 인터뷰 중에도 이수지 작가의 휴대폰은 동료들과 결성한 바캉스 프로젝트의 독립출판을 위해 설립한 1인 출판사 흰토끼 프레스에 들어오는 주문 문자에 수시로 부르르 떨었다. “표준화된 그림책과 다른 발상의 독립출판물이 나오면 그림책 생태계가 재밌어지지 않을까 싶어 1인 출판사를 차렸는데 희한하게도 처음부터 제안했다면 안 받아줬을 출판사들이 바캉스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보고 접근해오기도 했다.” 어쨌든 포장도 배송도 온통 그의 일인데, 며칠 후에는 남은 마감과 약속을 허덕허덕 이행하고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리는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총회로 가는 장거리 비행길에 올라야 한다.

<씨네21>은 이수지 작가가 첫 번째 안데르센상 후보에 오른 해에 그를 만나 대화했다. 이어진 작업을 지켜보는 동안 이수지는 위로와 감동을 준다거나 신기한 플롯과 캐릭터를 발명하기보다 예술로서 그림책의 형식적 완결성을 탐구하는 작가라는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아티스트로서 그의 엄정한 미적 판단은 고립돼 있지 않다. 이수지는 여전히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의 어린 독자들처럼-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느낌에 가만히 떨고, 종이 위 그림이 지어내는 가짜 환영을 믿기로 공모하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발생하는 진짜배기의 아름다움에 감동한다. 전시회에 가면 작품만큼 관람객들을 관찰한다. “예전에 영상 인스톨레이션 전시를 갔는데 아이들이 영상 내용엔 관심이 없고 그 앞에 가면 제 그림자가 생긴다는 사실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림자 극장> 전시회의 즐거운 참여 코너가 만들어졌고 <선>을 전시한 <내맘쏙: 모두의 그림책전>에 양말 스케이트장이 마련됐다. 어린이는 그가 작품으로 교육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영감이며 가장 예술적인 존재다. 볕이 잘 드는 그의 작업실에는, 이수지가 배움을 얻은 작가들의 그림책과 여러 언어로 번역된 이수지의 작품들, 그리고 이리저리 접힌 각양각색의 종이들이 비밀스럽게 수런거리고 있었다.

- 이번에 안데르센상을 받기 전에도 근작 <우로마>(2020)와 <여름이 온다>(2021)가 볼로냐 라가치상 스페셜 멘션을 받았다. 독자들이 아동문학, 그림책 코너에 가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칼데콧상, 보스턴 클로브 혼 북상 등 여러 이름의 상을 접하게 되는데 그중 안데르센상은 창작자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나.

= 나열한 상 중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과 안데르센상은 작가의 작품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나머지 상들은 그해 나온 책 중에 선정한다. 안데르센상은 각국의 국제 아동청소년 도서협의회에서 후보 한명을 선정해 5권의 대표 도서를 제출해야 한다. 6년 전 처음 후보가 됐을 때도 평생 공로를 논하기엔 아직 너무 부족하다 생각했는데 올해 보니 최종 후보에 오른 글 작가 6명, 그림 작가 6명의 연령대가 많이 낮아졌고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혁신적 작가도 많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심사 기준에 여태까지의 공헌과 더불어 앞으로 계속 활발히 작업할 것인지가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 수상 소감을 밝힐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어 받게 된 상이라고 말했는데 구체적인 의미는.

=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의 한국위원회인 KBBY(Korean Board on Books for Young People)에는 후보를 정하는 위원회가 있고 결정 후에는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실행위원회가 많은 노력을 한다. 처음 후보가 된 2016년에는 KBBY도 경험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김지은 서울예술대학교 교수가 컨퍼런스에서 작가 연구도 발표하고 번역원 지원도 받고 출판문화진흥원에서도 도움을 구해 제대로 준비했다. KBBY는 한국 작가를 해외에 진출시키려는 열정으로 모여 재능 기부에 가깝게 일하는 작은 비영리단체라 서로를 의지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 모르는 사람들은 상이야 걸출한 작가가 있으면 당연히 타는 것이고 상을 못 타면 그런 작가가 없어서라고 여기지만, 그런 중간 과정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수상 가능성이 대폭 낮아지는 것이 현실인가보다. 청와대 축전에 답례로 보낸 작품에 대해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여러 개의 트윗으로 ‘독후감’을 올렸는데 상당히 놀랐을 것 같다.

= 그림책이 누구나 편하게 선물하고 편하게 답할 수 있는 매체라는 점이 방증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최고로 바쁜 사람도 3분이면 읽을 수 있고(웃음), 생일 축하로, 보통날 친구에게도, 슬픈 날에도 건넬 수 있다. 외국에서 커피 테이블 북이라고 불리는 역할을 그림책이 할 수 있고 향유층이 넓어질수록 작가들도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 작품을 보며 유년기에 자연과 얼마나 가까웠는지 그리고 가족이 뭔가를 그리거나 만드는 걸 보는 일에 익숙했는지 궁금했다.

= 부모님이 직접 예술을 하진 않았지만 평균보다 훨씬 많이 예술에 대해 열려 있고 즐기는 분들이었다. 다양한 공연에도 자주 데려갔고 그 기억 갈피에서 작업이 구체적으로 촉발되기도 한다. 초등학생 때 갔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공연이 너무 재밌었던 기억이 있다. 클래식 발레가 아니라 몇개의 짧은 프로그램을 콩트처럼 했고 진심으로 깔깔거리면서 봤다. 마임도 섞여 있는 공연이었는데, 세상 진지하게 공연하는데 진지하게 웃음을 주는 예술이라는 점에 굉장한 호감을 느꼈다. 춤과 음악, 연극적인 이야기가 섞여 있다는 데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글 없이 그림만으로 이뤄진 그림책도 사실 마임과 연결점이 있다.

그림책이라는 새로운 세계

- 예술가는 아니지만 부친은 새집 목수로서 책을 펴냈고 어머니는 이수지 작가의 그림을 자수로 옮겨 감탄을 샀던 걸로 안다.

= 아버지는 원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분이라 내가 하는 일과 주변 상황을 진심으로 재밌어 하신다. 일부러 이런저런 출판계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다 코멘트를 하신다. 내일모레, 수상 후 처음으로 나를 보러오시는데 열흘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될 것 같다. (웃음) 어머니는 모든 것에 재능이 있다. <파도야 놀자>(2008)의 한 이미지를 밑그림으로 수를 놓았는데, 목탄의 미묘한 그러데이션을 무수한 단계의 회색으로 표현해내 전시회에 온 사람들이 내 그림보다 더 좋아했다. 지금도 자꾸 수놓을 거리를 내놓으라고 하신다.

- 글과 그림이 함께 있는 <나의 명원화실>(2008)을 보면 주인공은 학교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면 교사에게 칭찬받는지 아는 아이인데 방과 후 화실에 오면 다른 그림을 그린다. 본인 이야기인가.

= 딱 그런 아이였다. <나의 명원화실>에서 자랑스럽게 들고 있는 그림은 다른 애들 것과 그닥 다르지 않으면서 좀더 꼼꼼히 칠하고 색깔을 다양하게 쓴, 선생님이 좋아할 요소를 갖췄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어린이다운’ 좋은 그림이다. 반면 명원화실에서 그리는 그림은 정답 없이 계속 어떤 지점을 향해 가면서 본인이 만족감을 느끼는 그림이다.

- 서양화를 공부하다 그림책 작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시점은 영국 유학 전이었나. 아니면 유학 동안 다양한 북아트, 아티스트북을 접하면서 본인에게 맞는 작업을 찾은 건가.

= 유학 전에는 “나는 화가다”라는 인식이 강했고 그림책 분야 일은 아르바이트였다. 젊은 화가가 당장 작품을 팔아 먹고살긴 불가능하니까 내 작업과 별개로 돈을 버는 일로 인식했다. 그런 의식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하니 재미가 없고 일은 일일 뿐이었다. 한번은 어린이책 삽화로 음악 수업 장면을 그려갔는데 풍금 치는 선생님 등 뒤 시점으로 선생님은 손만 나오고 노래하는 아이들을 주로 그려갔더니 편집자가 사람을 이렇게 자르면 어떡하냐고 했다. 어린이가 읽는 책에는 모든 이미지가 다 온전하게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왜요?”로 시작해 엄청난 논쟁을 했다. 나는 회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이미지가 가능한 세계에서 살아왔고 어린이에겐 이러저러한 것만 보여줘야 하다는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일을 계기로 어린이를 향한 매체는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그런 와중에 그즈음 비룡소나 시공주니어 같은 출판사에서 세계의 클래식 그림책을 한꺼번에 출간하기 시작했다.

- 당시 어린이들이 무척 질투났던 기억이 난다.

= 우린 분도출판사밖에 없었는데! (좌중 웃음) 그러다 엔조 마리, 옐라 마리의 <알과 암탉>을 보게 됐는데 그 책엔 모든 것이 다 잘려 있었다! 이 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하며 봤는데 자른 의미가 명확했다. 알과 병아리가 주인공이니 그의 시점에서 모든 세상은 잘릴 수밖에 없고, 화면에 잘려나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기들이 까꿍놀이를 통해 대상영속성을 배운다고 하지 않나. 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거기 엄마가 계속 있음을 알게 되는 그 순간이 그 아이가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걸 생각하면 감동적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그림책을 그냥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책으로 생각하다가 그 뒤에 숨겨진 당연하고도 큰 진실을 엿본 것 같았고 책이라는 시스템이 새롭게 보였다. 종이를 화면으로 절단하는 순간 내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을 사람들에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멋있었고, 어미닭의 다리만 보이면 그냥 그림 한장이지만 뒷장으로 넘어가면 머리를 내미는 장면이 나온다거나. 그러니까 이미지가 연속되며 생겨나는 새로운 세계가 놀라웠다. 그렇게 유학을 알아보는 방향도 좀 달라지면서 북아트를 알게 됐다. 당시에는 그림책 자체가 내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책이라는 매체로 뭘 해보고 싶었다.

“큰 감정이지만 작게 그린다”

<선>

- 2016년 인터뷰 이후에 출간한 작품들을 일별하고 싶다. <선>(2017)은 겨울날 아이들의 스케이트가 빙판에 그리는 궤적이 끌고 가는 책이다. 뛰어노는 아이의 흔적이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린 화가들에게”라는 헌사가 붙어 있다.

= 겨울이 없는 싱가포르에서 살 때 방학에 한국에 오면 아이들이 눈도 보고 스케이트장에도 갔다. 보호자로서 나도 같이 타야 하는데 어린 시절 우면산 뒤쪽 집 앞 논밭에 물을 받아 만든 스케이트장에 출근하다시피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관리하는 아저씨가 제발 가라고 할 때까지 종일 타고 집에 오면 밤에도 내 몸은 계속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아무튼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는데 정빙기가 지나간 빙판에 애들의 스케이트가 긋는 획이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아이들이 넘어지면 선이 지워지니 그려지면서 지워지는 그림이구나 싶었다. 동네 아는 애들이 어우러지면서 함께 만드는 장관도 떠올라 동시다발적으로 재밌겠다는 생각이 솟았다.

- <선>도 그렇지만 이수지 작가 작품을 보면 화면에서 이미지가 크기건 밀도건 색상이건 질량을 보존하며 재배치를 거듭하는 것 같다. 하나로 모였다가 배분됐다가 끝날 때까지 총량이 유지되는 수학적 과정을 보는 기분도 든다.

= 총량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이만큼의 이야기가 있다고할 때 어떻게 분배할지 균형감각 같은 것도 존재한다. 완독했을 때 개운하려면 그 배분이 정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하기도 한다. <여름이 온다>도 무대로 시작해 무대로 끝나는데 원점으로 돌아오는 습관도 있는 것 같고. 역시 <알과 암탉>으로 모든 게 귀결되는 건가? (웃음)

- 확실히 다양한 형태로 변하며 순환하는 물이라거나, 그림자를 동반하는 빛 같은 소재를 선호하는 것 같긴 하다.

= 내 생각엔 그림책은 말로 옮기면 뻔한 이야기가 많다. 예컨대 사계절을 같은 나무의 변화로 표현한 책도 있다. 다시 나무는 원점으로 돌아오는데 나는 거기서 큰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이고 그 질서 안에 나를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강이>

- 그런 면에서 가족의 반려견 이야기를 그린 <강이>(2018)가 이례적이다. 주인공에게 이름이 있는 것도 이수지 작가 작품으로서는 일단 드문 일이고. 사실 죽은 개를 쓰거나 그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작업인데 그럼에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나.

= 내 작품으로선 예외적으로 대상이 구체적이다. 원래 제목은 <눈밭의 검은 개>였는데 편집자의 제안으로 바뀌었다. 원래 펄쩍펄쩍 뛰는 강렬한 생명체로서 삶의 기쁨을 보여주는 까만 개 강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틈틈이 그렸고 에피소드도 수집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고, 예정보다 빨리 책이 나오게 됐다. 강이를 보내고 넘쳐나는 느낌을 지금 안 그리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독자뿐 아니라 강이를 향한 책이기도 했나.

= 강이에게 주고 싶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 없이 강이를 그려서 바닥에 그림을 늘어놓았고 그것들을 맞춰가며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여름이 온다>도 그런 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림의 순서를 맞추면서 그림 그리는 동안의 뜨거운 감정이 점점 냉정해졌다. 논리적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구성을 생각하며 나는 묘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슬픈 걸 보여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마음을 누군가에게 느끼게 하기 위해, 내가 거쳐야만 하는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안정감을 줬다. 그것이 애도로서 기능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아까 말한 균형점을 <강이>에서도 계속 찾았다. 작업 노트를 보면 “큰 감정이지만 작게 그린다”는 메모가 있다. 흰 눈과 검은 개. 그런 식으로 양쪽 끝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의 균형점을 계속 맞춰간다는 느낌이 본질에 가까워지는 것도 같고 좋았다.

- 강이가 어둠 속에서 펼친 오른쪽 페이지 아래쪽에 배치된 그림을 좋아한다. 고야의 <개>가 생각나기도 한다. <선>은 심이 단단한 연필과 지우개를 쓰고, <강이>는 오일파스텔을 썼다. 아우라를 수굿하게 눌러주고 싶다는 아까의 이야기와 모순되는 것 같지만 작품에 적절한 재료를 그때그때 선택하는 작가라 원화의 가치가 더 높아질 것 같다.

= 그것도 아이러니다. 항상 그림책을 보면 되지 원화를 왜 꼭 찾을까 이야기해왔다. 내가 원하는 흐름으로 구성한 그림책이 원본인데 거기에 뭔가 진짜 원본이 더 있을 거라 말하고 페이지 구성을 굳이 흩뜨려 벽에 걸어놓고 본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고 회화를 해서인지 책 크기를 벗어나지 않는 그림책의 원화들은 작은 공간에서 들여다보게 디스플레이하지 않는 한, 전시로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 종이에 얹지 않는, 앱이나 온라인에서만 쓸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는 것으로 안다.

= 둥둥 떠 있는 느낌을 싫어하는 것 같다. 어차피 종이 위에 앉힌 그림도 실체가 아니라 일루전이지만, 디지털화된 이미지에 대해 땅에 발을 안 붙인 것 같은 불안감이 있다. 나는 경계 없는 영토가 싫다. 한계 있는 종이가 좋다.

- 루시드 폴의 노래를 그림책으로 옮긴 <물이 되는 꿈>은 글 작가가 아닌 완전히 다른 장르와 협업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림책 아티스트의 독자성을 보여줬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동기였나.

= 가사는 글 원고 같은 텍스트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냥 노래와 음악이 같이 가는 그림책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뮤지션 역시 가사를 전달하려고 노래를 만든 게 아니라 음악과 언어가 서로 만나며 생기는 제3의 어떤 것을 향했을 터다. 그 점이 그림책과 비슷하단 생각도 들었다. 잘 짜여진 산문 텍스트는 내겐 별로다. 가령 “북극곰이 여행을 떠났어요”라고 시작하면 흥미를 잃는다. 내가 그려야 할 건 북극곰으로 정해지고 얼마나 곰을 잘 그리느냐밖에 할 일이 없어진달까.

- 같은 가수의 새 앨범 재킷 작업도 한다고 들었다.

= <목소리와 기타>라는 제목이다. 게이트폴드 형태로 만들 예정이다.

<물이 되는 꿈>

- <물이 되는 꿈>은 딱 하나의 컬러만 썼다. 농담만 다르게 하면서 물이 강이 되고 별이 되고 산이 되는 여정을 이어 그렸다. 그림책 작가가 오직 한 색깔만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 하나의 물질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두었고 그게 아니라도 여러 가지 파랑을 넣어 같은 계열의 색깔들끼리 싸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지금의 색보다 초록빛이 약간 도는 무거운 파랑이었다. 그림으로는 색감이 좋았는데 책이 될 때는 코발트 블루처럼 더 가벼워야 사람이 페이지를 넘길 때 맑은 느낌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인쇄소에서 내가 원하는 파랑이 안 나왔다. 구시렁거리고 있었더니 제작부장님이 형광 파랑을 살짝 섞으면서 지금의 색이 됐다.

- 중국 작가와 협업한 <우로마>에서는 원작에 많은 제안을 하고 수정도 했다고 들었다. 최근 그림책 작가 사이에서도 성 역할이나 가족 묘사를 변화시키려는 대화가 많이 오가나.

=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사는 나라의 경우 인물 묘사에도 신중한데, 우리나라도 이제 그런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여름이 온다>에서 아이들 표현에 일부러 여러 색의 색종이를 쓰기도 했다. 이야기에 필요하지 않으면 반드시 부모 두 사람이 다 나오는 경우도 드물어졌다.

- 다른 그림책 작가들과 함께 바캉스 프로젝트를 출범시키고 첫 기획으로, 전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었다. 재밌는 점은 그럼에도 한국에서만 통하는 토속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국적이나 인종이 어디라도 괜찮은 이야기로 읽힌다.

= 주인공의 생김새나 복식이 민족적 색깔을 띠고 있을 뿐 근본적으로 옛이야기의 원형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그늘을 산 총각>(2021)처럼 힘없고 돈 없는 약자들이 부자 영감을 골려먹는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

- 지난해 알부스 갤러리에서 전시도 가진 <여름이 온다>는 대작의 풍모가 있다. 판형도 크고 내용에도 오케스트라가 등장하지만 책도 편성이 크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들으며 넘겨 보는 헝태인데 <물이 되는 꿈>의 영향도 있었을 것 같다.

= <물이 되는 꿈>을 하다보니 최소한의 문학적 장치인 가사조차 없는 음악을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 서사를 이끄는 문학적 장치를 제거하고 나머지 감각으로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 그림책은 음악 자체와 통해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 텍스트가 제시하는 내용은 없다고 해도 아무 음악이 아니라 비발디의 <여름>이다. 책의 흐름도 악장의 전개를 따르고 있다.

=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인간이 정말 열심히 만들어낸 연주 기호와 약속들이 흥미로운데 그것을 이미지로 녹여낼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일단 오선지는 무척 아름다운 형태라 악보를 보면 음악하는 사람도 아닌데 가슴이 뛴다. 극히 얇은 그 라인이 주는 흥분이 있고 음표들도 그렇다. 베토벤의 자필 악보를 봤는데 그건 그냥 드로잉이었다. 베토벤은 자기가 그린 악보를 보며 음악의 환청을 들었겠지만, 내 귀에는 상상의 음악은 안 들려도 어떤 음악인지 알듯한 감정이 일어 놀라웠다. 어차피 악보가 시각적 흔적이라면 그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여름이 온다>에서 튀긴 물방울들이 음표가 되고 마음속에 뭔지 모를 음악이 들려올 거라고 생각했다. 악장이 바뀌는 중간에는 색만 있는 종이가 지질도 다르게 한장 들어가서 긴장하게 만드는 조율의 시간을 표현했다.

<여름이 온다>

- <여름이 온다>를 그리는 동안 비발디의 <여름>을 몇번 들었나. 누구의 연주를 주로 들었나.

= 작업실에서는 음원으로 집에서는 CD로 무수히 반복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 바이올린 주자 줄리아노 카르미뇰라의 정교하고 우아한 연주를 듣다가 파비오 비온디가 이끄는 연주를 발견했는데 몰아붙이는 격렬함이 굉장해서 다른 연주를 들으면 맥이 빠질 지경이 됐다. 그리고 비온디 연주 편성에는 시각적으로 재밌는 류트가 들어 있어서 책에도 그려넣었다.

- QR코드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했는데 그 곡은 파비오 비온디 연주는 아니다.

= 저작권 프리인 연주 중에 고를 수밖에 없었다. 중요하지도 않고. 이 책을 수업에 사용한 선생님들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름이 온다>를 칠판 앞에 올려놓고 우선 음원을 재생해줬다고 한다. 아이들이 뭐야 하면서 듣다가 “그 음악이 이 책에 표현돼 있다” 하니 돌아가면서 그 책을 정말 자세히 보았다고 한다.

- 카탈루냐 감독 페르 포타벨라의 에세이 필름 <바흐 이전의 침묵>에도 자동피아노의 움직임과 악보를 따라가는 패닝으로 바흐 음악을 시각화한 장면이 있다. 조형적으로 악보가 가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경험이었다.

= 이음줄도 파도처럼 보이며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건 그림 그리는 사람이 음악을 바라볼 때 누리는 특권이 아닌가 싶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악보를 주목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빠르기와 연주 톤을 지시하는 기호들도 이번에 찾아보니 “진심이야? 이런 거까지 지시했단 말이야?” 싶은 내용이 많았다. “경쾌하게 그러나 너무 발랄하지 않게”라든가. 그러니 그 약속을 책으로 가져오면 책을 읽는 기분과 속도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 <여름이 온다>의 무대에 오르는 아이들 사이에 강아지도 있다. 개는 이수지의 세계에서 어떤 존재인가? 아이들이 그렇듯 세계를 잘 느끼고 훼손되지 않은 의지를 가진 존재일까.

= 개와 아이는 내게 같은 개념이다. 개를 동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개는 그냥 개다. 아이들처럼 보호자만 바라보면서 본성대로 움직인다.

- 이수지 작가가 그린 꼬리 흔드는 개의 그림을 보면 자코모 발라의 <줄에 매인 개의 역동적 움직임> 생각이 난다. (웃음)

= 개의 꼬리가 아이들과 닮았다. 어디선가 삐죽이 나오는 진짜 감정 말이다.

그림책이 독립된 장르가 되기를

- 글 작가와 협업인지 단독 작업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창작 과정의 순서도가 있나. 내용, 구조, 재료, 형식이 어떤 순서로 정해지나.

= 혼자 하는 작업은 모든 게 한꺼번에 온다. 글을 먼저 써놓는 작가들도 많던데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과 동시에 그림이 비전으로 보이고 책의 꼴(판형)도 보인다. 흰 종이를 보고 있으면 그림이 보여 그걸 눌러앉히는 느낌으로 그려간다. 원고가 원래 있는 책은 이야기에 공감이 가는지를 판단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에 막연히라도 내가 들어가서, 누가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만한 일이 확실히 있을 때 선택한다. 내게선 나오기 힘든 따뜻함이 있어서 끌리는 작품도 있다. <아빠, 나한테 물어봐>(2014, 버나드 와버)는 원고를 받았을 때 그냥 너무 좋았다. 아이가 “난 토끼가 좋아”라고 하면 될 것을 어른에게 “내가 토끼 좋아하냐고 물어봐”라고 말할 때 마음이 보이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데, 그냥 쉽게 주고 싶진 않고 네가 궁금해하면 알려준다는 당당함이 있다. 가령 새는 왜 둥지를 만드냐고 책에서 아이가 묻는데 아빠가 설명을 해주니 아이가 “알아”라고 답한다. 아는데 왜 물어봤냐고 하면 아빠 말로 듣고 싶어서라고 답한다. 아이들은 다 알지만 그 말을 또 듣고 싶어서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조르는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을 포착한 원고여서 좋았다. 어떻게 그릴지 생각하면서 내가 개입한다. 어떤 상황에서 아빠와 아이가 이야기 중일까. 아이들은 앉아서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어디를 가는 도중에 의미 없는 말을 조잘조잘한다. 그래서 걷는 상황을 생각했고 “빨간색으로 된 건 다 좋아”라는 말에서 가을 단풍이 든 공원을 걷는 정경이 떠올랐다. 그렇게 걸어가는 도중에 아이가 좋아한다고 말한 단어들이 이미지로 등장하면 되겠다고 구상했다.

- 2016년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그림책을 인쇄로 복제하면서 아우라가 한번 눌리는 데에 오히려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항상 결과가 의도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했다. 에드 루샤의 아티스트북 <미국의 26개 주유소>처럼 별스럽지 않은 구도의 이미지를 편집한 책을 대량 복제해 반아우라적 태도를 취하는 입장과 통하는 이야기였을까 뒤늦게 궁금했다.

= 항상 그 부분에 생각이 많다. 처음 같이 일한 출판사 대표님이 “그렇게 좋은 종이를 꼭 써야 할까요?”라고 말했는데 그 태도가 좋았다. 책이라는 매체는 원본 이미지가 스캔되는 순간 손실이 있고 인쇄 공정도 원본을 훼손하면 했지 더 나아지게 할 순 없다. 운명론적 한계가 불가피하다는 전제 아래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종이들을 쓰는 것이 현실일 때, 책 단가를 적절히 맞추는 것도 하나의 예술일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마음에 드는 입장인데 동시에 파인 프레스(Fine Press)의 전통에 입각해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종이로 최상의 퀄리티를 뽑아내고 싶은 마음도 공존한다.

-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표지에 참여했다. 앞으로도 할 작업인가.

= 표지는 책의 서사를 딱 한장의 그림으로 은유한다는 점에서 그림책과 비슷한 것 같다. 한강 작가님과 아는 사이였는데, 미술쪽에도 조예가 있는 작가님이 <심청>의 그림 중 하나를 쓰고 싶다고 제안해서 믿고 응했다.

- <파도야 놀자>부터 본인의 캘리그래피를 제목에 쓰고 있는데 특별한 의미를 두는지?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 번역돼서 알파벳 아닌 문자로 써야할 때도 있을 텐데.

= 문자도 그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꼭 내 글씨로 하려는 마음은 아닌데 표지를 만들고 나면 결국 내 글씨가 제일 잘 어울려서다. 물론 작품에 따라 안 그럴 수도 있다. 미국 출판사와 작업 중인 신작 <See You Someday Soon>은 캘리그래피 제목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 어떤 내용인가.

= 상황 때문에 오랫동안 서로를 보지 못한 할머니와 아이가 여러 경로로 서로를 그리워하고 함께 추억을 나눈다.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대화를 표현하는 형식으로 종이를 금형으로 찍어 구멍을 내는 타공 기법을 썼다. 종이는 오래된 사물인데도 내겐 매번 신기하다. 색종이의 형광기 있는 느낌이 만났을 때 오는 이상한 흥분감도 있다. 종이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인데 다음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 내 손으로 그걸 넘겨야 된다는 사실도 항상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 장벽을 뚫어 다른 세계를 내다보도록 형식적으로 해결하는 작업이 즐거웠다. 할머니와 아이의 화상통화 장면에서 모니터를 표현한 구멍에 서로의 의도와 다르게 모습이 잡히는 데에서 나오는 유머도.

- 웹툰에는 자동 스크롤 기능이 있는데, 스크롤 방식 때문에 웹툰 시대가 오고 나서 만화와 멀어진 사람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 웹툰은 어쩌면 내 지향과 반대 지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전자책도 비슷한 이유로 여행 갈 때가 아니면 가까이하기 어렵다. 남은 페이지가 얼마인지 몸으로 감각하면서 마음 졸이며 읽는 체험과 전자책 독서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 안데르센상 수상 이후 그림책에 모인 관심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요즘 과로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어떤 기회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나.

= 일단 그림책이 장르로 독립해야 한다. 만화는 그것을 이뤄 만화라는 이름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데 그림책은 미술도 문학도 아닌 ‘나머지’ 매체에 묶여 있다. 포털에 내 이름을 검색하면 동화 작가라고 나오는데 수정을 요청해도 카테고리가 없다고 한다. 예전 교보문고에서 나는 만화가로 분류돼 있었다. 작은 일 같지만 장르로 독립하지 않으면 지원 사업에서 항상 누락된다. 인구 감소와 함께 그림책을 소비하는 인구도 줄어드는 셈이라 공공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더 많이 사고, 여기까지 이야기가 가도 될지 모르지만 공공대출 보상권도 유의미할 것 같다.

<고개 넘어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