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이마무라 쇼헤이 (Shohei Imamura)

1926-09-15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8.1

/

네티즌7.1

기본정보

  • 원어명今村昌平
  • 다른 이름Shôhei Imamura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26-09-15
  • 사망2006-05-30
  • 성별

소개

현역 가운데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 1950년대 말에 데뷔했고 쇼치쿠의 좀더 젊은 감독들과 함께 1960년대의 일본 뉴웨이브를 이끌었으며, 뉴웨이브가 퇴조한 1970년대 이후에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온 정력적인 감독이다.

이마무라는 오시마 나기사와 종종 비교되는데, 오시마가 일본사회에 대한 격렬한 어조로 정치, 사회적 논평을 담으려 노력했다면 이마무라 쇼헤이는 인류학적인 접근이라고 부를 만한 접근법을 보여줬다. 그는 일본인의 일상 속에 담긴 일본인 특유의 신앙, 생활감정, 욕정, 충동 같은 것을 탐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마무라는 “내가 농부라면 오시마는 사무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두사람의 이같은 차이에 관한 재미있는 비유일 것이다.

이 태도의 차이가 정치적 격랑이 수그러든 뒤인 1970년대 이후에도 정렬적인 작품활동을 지속케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와세다대학 문학부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며 열성적으로 연극활동을 했던 이마무라는 대학졸업 뒤, 그 전까지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던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쇼치쿠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으로 일하던 그는 쇼치쿠 스튜디오의 전통과 오즈의 스타일에 반감을 가졌다. 이마무라는 쇼치쿠를 떠나 닛카쓰로 활동의 터전을 옮겼고, 1958년에 <도둑맞은 욕정 盜まれた欲情>으로 감독 데뷔했다.

이 영화는 유랑극단 배우들의 삶을 다룬 코미디로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오즈의 영화 <부초 浮草>(1959)와 비교되곤 했다. 오즈가 삶을 간접적이고 세련되게 다루면서 당면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마무라는 적극적인 삶의 에너지를 포착한다. 데뷔작에서 보여준 이마무라의 영화적 태도는 이후로도 지속된다.

이마무라의 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로 창녀, 무당, 포르노영화제작자, 호스티스, 유랑극단 배우 등 하층계급의 사람이거나 주류사회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들이다. 이마무라는 이런 인물들을 통해 일본인들의 은밀한 욕망과 감추고 싶어하는 생활방식을 태연하게 드러낸다. 특히 여자를 다루는 방식은 미조구치 겐지와 예리하게 대립된다.

50년대 미조구치의 영화에서 헌신적이며 종국에는 거의 자연화하는 여성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마무라는 종종 여성을 원초적 욕망과 징그러울 정도로 강력한 생존능력을 가진 동물적 존재로 묘사한다. <일본곤충기 日本昆蟲記>(1963) <호스티스가 말하는 일본전후사 日本戰後史 マダムおんぼろの生活>(1970)가 그 대표적인 예다.

소재와 인물 선택에서 이마무라가 가진 또다른 특징은 풍속과 범죄를 통해 일본인의 밑바닥 심성에 이르려 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신들의 깊은 욕망 神の深き欲望>(1968)이라면, 후자의 예가 <복수는 나의 것 復讐するは我にあり>(1979). 두 영화 모두 걸작이라 불러도 좋을 뛰어난 작품이다.

<신들의 깊은 욕망>은 한 시골마을을 무대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한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을 중심소재로 해서, 일본인의 전통적 성관념과 풍속의 힘을 묘사한 작품이다. 연쇄 살인범의 살인행각을 다룬 <복수는 나의 것>은 한 서구비평가의 “모든 연쇄살인범영화를 아이들 장난으로 만드는 걸작”이라는 표현대로, 살인과정을 극단적으로 무심하고 차갑게 묘사한다.

이마무라 영화의 형식상의 특징은 다큐멘터리 지향성이다. 이 점은 뉴웨이브 이후 일본영화의 전반적 특징에 속하는 것고 실제로 1960년대 이후 다수의 작가주의 감독들이 가진 지향이기도 한데, 이마무라는 이를 누구보다 자의식적으로 사용한다. <인류학입문 人類學入門>(1966)에서 카메라를 숨기는 기법을 이용하였고, <일본곤충기>에서는 전직 종군위안부였던 40대 여성을 등장시켰고, <호스티스가 말하는 일본전후사>(1970)에서는 실제 호스티스를 주인공으로 기용했다. 1997년 칸영화제 수상작인 <우나기 うなぎ>의 주인공이 아내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카메라 렌즈에 의도적으로 피를 튀긴다.

카메라의 존재를 관객에게 의식토록 하고, 나아가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인간증발 人間蒸發> (1976)에서 실제로 실종된 약혼자를 찾는 여자는 차차 예전의 연인보다 영화 속에서 같이 연기하는 남자배우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된다.

1970년대 들어서서 이마무라는 활동영역을 확장했다. 1975년 요코하마 방송영화연구소를 설립해 후진양성에 힘쓰는가 하면,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동아시아에 잔류해 있는 일본인들의 삶과 증언을 통해 일본사회를 비판하는 다큐멘터리 <가라유키상 からゆきさん>(1975)을 제작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에 극영화 작업으로 돌아온 이마무라는 <나라야마 부시코 楢山節考>(1983)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꾸준히 작품활동을 지속하다 1997년 <우나기>로 다시 한번 황금종려상을 받음으로써 건재를 과시했다.

1998년에도 이 노장은 일본인의 군국주의를 비판한 <간장선생 ガンゾ先生>을 들고 칸을 방문하는 열정을 보였다. / 영화감독사전, 1999

관련동영상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