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존 휴스턴 (John Huston)

1906-08-05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7.4

기본정보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06-08-05
  • 사망1987-08-28
  • 성별

소개

영화가 지닌 ‘시각예술’로서의 특성상, 화가로 출발해 영화감독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게 있어왔다. 물론 이같은 변신과 시도가 아무에게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의 화가 출신 감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시각적 감각을 스크린에 성공적으로 옮겨놓은 것도 사실이다. 가령 ‘화가집안’의 장손인 장 르누아르가 그러했고, 온갖 매체적 실험을 거치면서 영상표현의 한계를 극단으로까지 끌어올린 피터 그리너웨이 역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점에서 존 휴스턴 또한 화가로서의 감각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만년에는 화가로서 삶을 마친, 말하자면 ‘매체를 넘나들며’ 능력을 표현한 감독이었다.

# 대표작 <시에라 마드라의 황금> <아스팔트 정글> <아프리카의 여왕> <아프리카의 여왕> <모비딕> <천지창조> <007 카지노 로얄> <애니> <악몽의 연인들> <재클린 비셋의 활화산> <프릿지스 오너>

젊은 시절의 휴스턴은 꽤나 다양한 경험을 하며 여기저기 떠도는 삶을 보냈다. 이미 세살 때 배우였던 아버지 월터 휴스턴을 따라 무대에 섰으며, 병약한 체력을 이겨내려 시작한 권투로 결국에는 챔피언을 거머쥐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뉴욕으로 옮겨 한동안 연극무대에 서서 자신도 배우로 일하다, 1930년에는 아버지 월터 휴스턴이 영화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각본가로 일을 시작한다.

각본가로서의 휴스턴은 꽤 괜찮게 팔리는 작가였는데 그의 각본 중 <분리된 집 A House Divided>은 윌리엄 와일러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얼마 뒤인 1931년에는 화가가 될 것을 결심, 파리로 건너가 미술 공부를 하면서 길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화가의 꿈을 접은 채, 1934년에는 다시 뉴욕에 돌아와 얼마간 극단에서 배우와 무대감독을 하다가는 아예 할리우드로 돌아가 각본을 쓰고 제작부 일에 참여하면서 점차 영화계에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간다. 이 시기 그의 각본 중에는 워너브러더스의 화제작 <지저벨 Jezebel> (1938) <하이 시에라 High Sierra>(1941) <요크 상사 Sergeant York>(1941) 같은 작품들이 있다.

이렇게 각본가, 조감독, 제작부일을 하면서 밑바닥부터 적지 않은 경험을 쌓은 휴스턴은 1941년 드디어 <말타의 매 The Maltese Falcon>로 성공적인 장편 데뷔를 하게 되었다. 휴스턴의 데뷔작이자 필름누아르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말타의 매>를 보면 이 감독이 어떻게 화면 구도와 인물간 비중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휴스턴은 먼저 자신이 구상한 컷을 일일이 스케치한 다음 여기에 근거해서 장면을 짜나갔다. 특히 그가 염두에 둔 것은 화면 내에서 큰 것과 작은 것, 가까운 것과 먼 것, 위에 있는 것과 아래 있는 것이 어떠한 의미의 층위를 형성하느냐, 즉 프레이밍의 문제였다. 가령 <말타의 매>에 자주 사용된 구도를 보면, 화면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등장인물은 화면중앙으로부터 전경으로 등장하며, 인물을 바싹 잡을 경우 얼굴이 화면의 반 이상을 덮고, 다른 피사체와 인물들은 부수적으로 처리된다. 즉 할리우드영화에 관습적으로 보이는 동등한 사이즈의 숏-리버스 숏(shot-reverse shot)의 연결보다는 낱낱의 프레임이 가지는 미학적 구도를 더 중시하는 화면짜기에 몰입했던 것이다.

이같은 양식은 그의 초기 걸작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에서도 두드러진다. 캐서린 헵번이 분한 로지는 자신의 오빠가 죽은 다음에 험프리 보가트가 분한 막일꾼 찰리와 대화한다. 이 장면을 보면 전경의 찰리가 로지가 해야 할 일을 말하면서 내용적으로 그녀를 압도해 가면 갈수록 찰리는 화면의 중앙으로 진입하며 로지를 점점 작게 만들다가, 나중에는 팔을 뻗어 화면 상단부를 가림으로써 관객의 시선이 온전하게 로지를 포착하는 것을 막는다. 이로써 찰리와 로지의 역학관계는 프레임 안에서 캐릭터가 차지하는 위치나 사이즈를 통해 행동이나 말 이상의 영향력까지 강화시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말타의 매> 이후 그는 다시 한번 평생 자신의 배우인 험프리 보가트와 호흡을 맞추어 <태평양을 건너서 Across the Pacific>(1942)와 <우리의 삶에서 In This Our Life>(1942)를 만든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자 존 휴스턴은 통신병으로 입대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알류산열도에서의 보고 Repots from the Aleutians>(1943)와 <산 피에트로의 전투 The Battle of San Pietro>(1945)와 같은 2차대전중 만들어진 가장 뛰어난 영화들을 만든다. 전쟁이 끝난 후 할리우드로 다시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감독으로서의 워밍업으로 <킬러 The Killers>와 <이방인 The Stranger> 각본의 일부분을 쓰고, 40년대판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화라 할 수 있는 <시에라 마드라의 황금 The Treasure of the Sierra Madre>(1948)으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각본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러나 행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지 못한 <세 이방인 Three Strangers> (1946)과 <키 라르고 Key Largo>(1948)로 한동안 침체기를 맞으며 존 휴스턴은 스튜디오를 MGM으로 옮긴다. MGM에서 그에게 맡겨진 영화는 대작 <쿠오바디스 Quo Vadis>였다. 그러나 팔팔한 원기가 끓어넘치는 그에게 고리타분한 시대극이 적성에 맞을 리 없었다. 그는 영화에 대한 감독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오히려 제작자 루이스 B. 메이어를 설득하여 또다른 필름누아르의 고전이 될 <아스팔트 정글 The Asphalt Jungle>(1950)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영화엔 그 자체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남자들을 유혹에 빠뜨려 성사 직전에 다다른 일들을 그르치게 만드는 전형적인 휴스턴식 팜므 파탈이 기용되었다.

1951년 그는 처음으로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하고 미국문학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 <붉은 무공 훈장 The Red Badge of Courage> (1951)을 만든다. 스티븐 크레인의 소설을 충실히 스크린상에서 재현했건만, 영화는 흥행에서 완전히 참담한 실패를 하게 된다. 이제 그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다. 그에게는 역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1951년 마침내 그는 자신의 작품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던 평론가 제임스 에지와 한편의 각본을 완성해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1951)은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을 교묘하게 결합시키며 흥행상으로도 비평상으로도 최상의 평가를 받는 커플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휴스턴은 다시 재기한다. 이에 화가 출신 감독답게 휴스턴은 앙리 툴루즈 로트렉의 삶을 담은 영화 <물랑 루즈 Moulin Rouge>(1953)로 비주얼에 강한 감독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기도 했다. 여기서 휴스턴은 삶에 대한 자신의 허무주의적 시각을 로트렉의 인생에 대입해 말하고자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휴스턴은 로트렉과 자신을 동일시한 가운데 영화를 만들어나간 것이다. 영화 속 로트렉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조롱하며, 세상을 향해 가학적인 위트를 던지고, 여자들을 못살게 군다.

헛된 목표를 위해 애쓰다가 결국은 희생과 함께 실패를 맛보는 주인공의 이미지는 <모비딕 Moby Dick>(1956)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은 이스마엘을 빼놓고는 모두 죽으며 이는 주인공인 에이허브 선장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은 애초에 도전해서는 안 될 괴물고래 모비딕을 잡으려는 에이허브의 편집광적 열정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더욱 값어치 없는 존재로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휴스턴은 오히려 역설하는 듯하다.

이후 그의 영화는 그의 삶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고 질적으로도 상당히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야만인과 게이샤 The Barbarian and the Geisha>(1958) <천지창조 The Bible> (1966) <007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 (1967) <악몽의 연인들 Phobia>(1980) <승리의 탈출 Victory>(1981) <재클린 비셋의 활화산 Under the Volcano>(1984) 등의 작품들은 그의 명성을 빛 바래는 졸작들이거나 철저한 상업영화였을 뿐이다. 이 와중에서도 1963년부터 배우를 겸임했으며, 그나마 <왕이 되려던 사나이 The Man Who Would Be King> (1975)나 후기의 <프릿지스 오너 Prizzi’s Honor>(1985) 등이 그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이렇듯 존 휴스턴은 오랫동안 수많은 영화를 만든 만큼 그 편수나 내용에서 상당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인다. 그러나 아주 거칠게 본다면 존 휴스턴의 작품세계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화가 출신다운 비주얼로 대표되는 스타일에 대한 집착과 인간 세상에 대한 다소 염세적인 가치관의 반영이 그것이다. 특히 그의 초기작들 필름누아르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말타의 매>, 그만의 독특한 느낌이 나타난 <이구아나의 밤>이나 <아스팔트 정글> 등은 가장 그다운 어두운 박력과 힘이 넘치는 작품이다.

휴스턴은 직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방만하고, 취미라고 하기에는 너무 뛰어난 수많은 일들을 벌이는 다양한 삶을 살았다. 미술, 복싱, 조각, 도박, 여우사냥 등이 그의 취미였고 영화에서도 배우, 각본가, 감독을 해냈다. 쉽게 변화하고 내키는 듯 살았으며 영화도 그런 식이었다. 그런 그도 말년에는 좀더 변화했으면 좋았을 일들의 리스트를 남겼다. 그것들은 ‘아이들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좀더 돈을 모았어야 했다’ ‘독주 대신 와인의 즐거움을 배웠어야 되었다’ ‘5번이나 결혼하지 말아야 했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부모와 자신의 아이들 모두를 아카데미를 타게 한 다음 휴스턴은 자신의 딸인 안젤리카 휴스턴과 함께 <프릿지스 오너>를 발표한 뒤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외 주요 작품: <태평양을 건너서 Across the Pacific>(1942) <우리의 삶에서 In This Our Life>(1942) <산 피에트로의 전투 The Battle of San Pietro>(1945) <키 라르고 Key Largo>(1948) <야만인과 게이샤 The Barbarian and the Geisha>(1958) <용서받지 못할 자 The Unforgiven>(1960) <이구아나의 밤 The Night of the Iguana>(1964) <비대한 도시 Fat City>(1972) <로이 빈의 생애 The Life and Times of Judge Roy Bean>(1972) <왕이 되려던 사나이 The Man Who Would Be King>(1975) <시체 The Dead>(1987) <독립 Independence>(1987) / 영화감독사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