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고영남 (Ko Youngnam)

1935-02-22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5.8

기본정보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35-02-22
  • 사망2003-09-17
  • 성별
  • 학교홍익대학교 국문학 학사

소개

1935년 충북 수안보에서 태어난 고영남(본명 진석모(陳錫模))은 감독이라기보다는 고교시절 배구선수였었던 경력을 바탕으로 훤칠한 키에 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려한 외모를 자랑했다. 지금도 영화판에서 키 크고 잘 생긴 감독이나 스탭 혹은 매니저들을 가리켜 원래는 배우 지망생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당시 고영남은 배우 뺨칠만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마음을 두고 있던 고영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싣는다. 당시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등으로 이어지는 감독들처럼 한국 영화사에 커다란 획을 긋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서라벌 예술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몇 번은 삶의 틀은 바꾸는 운명적 사건과 조우하듯이 고영남도 운명의 길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변환을 주도하는 결정적 만남을 갖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연극계의 원로 이광래 교수였다. 바짝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던 이광래 교수로부터 희곡론, 연출론 등을 수학한 고영남은 당시 연극의 메카인 명동에 입성한다. 명동을 선점하고 있던 선배들의 후원으로 입단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는 극단 신협에 안착한 고영남은 연극에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고영남이 연극의 바다에 깊숙이 빠져들기도 전에 새로운 운명의 여신이 골목 안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잠시 쉬고 있던 고영남에게 충무로에서 제작부로 일하던 선배가 찾아왔던 것이다. 호기심 많은 청년 고영남은 기꺼이 응했고 당시 충무로 최고의 흥행감독 조긍하 감독과 만나게 된다.

조긍하 감독의 야심작이었던 멜로 드라마 “육체의 길”의 마지막 시퀀스 촬영을 하던 날, 고영남은 두 번째 운명을 만나게 된다. 눈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인공 명우가 방황과 질곡의 세월을 보내고 거지가 되어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는 함박눈이 내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눈은 내리지 않고 결국 눈을 만들어 덮기로 했던 것이다. 전 스탭이 달려들어 눈을 만들어 뿌리고 덮는 작업은 밤까지 계속되었고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스탭들이 모두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고영남은 혼자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묵묵히 작업에 열중인 고영남의 모습은 조긍하 감독의 눈에 띄게 되었고 즉시 연출부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았던 것이다. 장안은 물론 전국의 관객을 눈물바다로 몰아넣었던 “육체의 길”의 흥행성공은 연출부 막내인 고영남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권영순 감독의 “흙”, “표류도” 등 문예작품과 김기덕 감독의 “오인의 해병”, “맨발의 청춘” 등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하며 감독수업을 계속하던 고영남에게 세 번째 운명이 찾아온 것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주유천하”라는 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전국 극장연합회 회장이며 서울극장 대표였던 곽정환 사장은 놀라운 추진력으로 충무로를 종횡무진했다. 번득이는 눈으로 신인감독을 찾고 있던 곽정환의 눈에 조감독 고영남은 대어처럼 보였을 것이다. 곽정환은 신인에게는 파격적으로 “잃어버린 태양”의 연출을 의뢰했던 것이다. 다가온 기회는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데뷔작을 연출한 고영남에게 운명의 여신은 흥행성공의 선물을 주었고, 이에 고무된 곽정환과 고영남은 액션 멜로 “명동 44번지”를 함께 한다. 한국일보 현상공모 장편소설 당선작 “잃은 자와 찾은 자”와 강제구 소령 전기영화 “소령, 강제구”등이 잇달아 히트하면서 고영남의 인기와 주가는 초고속 수직상승 곡선을 그리게 되었고 장밋빛 미래와 푸르른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충무로 전역의 모든 제작자들은 고영남을 연호했고, 번쩍이는 메가폰과 거액의 개런티가 쏟아졌다. 결국 고영남은 급류에 휩쓸리듯 걷잡을 수 없는 거품인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몰되어 갔고 이러한 현상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질곡을 예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연출이 아니라 작업이었다는 회상처럼 당시 고영남은 무려 108편의 영화를 연출하게 된다. 예술가이기 이전에 장사꾼에 불과했던 영화제작자들의 무절제한 욕심과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했던 고영남 자신이 화학작용을 일으켰고, 1970년대 중반에 이를 때에는 난파한 선박처럼 빈 바다를 표류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탁류가 쏟아져 내려오는 바닷가 한쪽에 쓸쓸히 앉은 고영남은 그로부터 2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보낸다. 마치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처럼,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기나긴 잠에 빠져들었던 고영남은 마침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으로 세상을 향해 나서게 된다. 그 후 황순원의 “소나기”를 지나 “꽃신”, “빙점”, “외인들”, “영원한 관계”, “코리안 커넥션”등 종전과는 다른 장르를 섭렵하면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