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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인가. 아니,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서스펜스를 표방하곤 있지만 <스파이의 아내>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여기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고 비밀을 추적해가는 미스터리는 없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기억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선 이미 결정이 된 바이기 때문이다. 대신 <스파이의 아내>에는 그동안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내부자의 시선이 있다. 1940년대 일본 제국주의 말기, 불안과 혼란이 교차하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스파이가 되고자 했던 남자와 그를 위태롭게 바라보는 그의 아내가 있다. 아내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편을 불안한 가운데에도 믿고, 믿는 가운데에도 불안에 떤다. 이윽고 얇은 살얼음 아래 흐르던 불안과 의심의 격류는 서서히 진동수를 올리며 표면 위로 떠올라 당신의 마음을 장악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그의 관심사는 눈앞에
'스파이의 아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 삶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긴장을 견디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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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공부한 걸 얼마나 더 쉽게 전달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번에도 어렵게 공부해 쉽게 쓰려 했다.”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자산어보>는 쉽게 즐기고자 하면 쉽게 즐길 수 있는 영화고, 지적으로 즐기고자 하면 한없이 지적으로 파고들 수 있는 영화다. 이 인터뷰는 후자의 관객에게 좀더 유용한 글이 될 것 같다.
-<자산어보>의 시작이 궁금하다. 천주교 박해라는 거대한 시대적 배경,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의 이야기, 아니면 <자산어보>라는 책 자체. 어떤 것에 마음이 기울어 <자산어보>를 시작하게 됐나.
=개인주의 시대인 현재에서 조선의 근대를 찾아보자는 동기로 시작했다. 그러려면 거대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근대성에서 찾아내는 게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게 시작이었다. 그 개인이 한데 모인 게 동학이더라. 그런데 대체 왜 이름을 동학이라 지었을까. 의문을 따라가보니 앞에 서학이 있어서 동학이라 지었더라. 그러면 왜 또 서학이라 지었을까. 그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 인간의 본질은 선택과 행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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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열네 번째 영화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과 흑산도의 어부 창대(변요한)가 서로의 지식과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다. 이 우정의 서사에 성리학, 서학, 실학의 가치가 섞이고 흑백영화의 멋이 더해진다. 영화의 여백을 음미하며 쓴 <자산어보> 리뷰와 영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이준익 감독과의 인터뷰를 전한다.
영화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돛배에 외로이 앉아 있는 정약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유배지 흑산도에 가는 길. 고독하고 불안한 표류의 심상 너머 정약전이 마주하는 것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길을 찾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 중에는 창대라는 청년이 있다. 흑산도에서 나고 자라 바다 생물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는 어부 창대는 사실 물고기보다 글공부에 더 관심이 많다. 실제 정약전이 1814년 흑산도에서 쓴 어류학서 <자산어보>에는 창대라는
이주현 기자의 리뷰 - 이준익 감독의 열네 번째 영화 '자산어보'가 정약전과 창대를 그린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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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의 아내>는 오롯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지만 곳곳에서 다른 영화와의 연결고리들이 발견된다. 여기 <스파이의 아내>의 동지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영화들을 소개한다. 주제, 스타일, 캐릭터 등 여러 측면에서 함께 보면 좋을 영화들을 통해 한층 입체적인 감상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스파이 브릿지 2015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톰 행크스, 마크 라일런스
1957년 냉전시대,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은 모든 사람은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신념으로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마크 라일런스)의 변호를 맡는다. 미국과 소련의 스파이 교환을 위한 첩보 작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냉전의 초상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스필버그의 클래식한 연출 미학이 빛을 발하는 영화로 신념과 고뇌를 드라마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사건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상황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데 집중한다. 함부로 판단하기 전에 다리의 이쪽과 저쪽, 영화와 현실의 거리를 고민하는 카메라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첫 번째 시대극 '스파이의 아내'와 함께 보면 좋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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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따르면서 동시에 매우 현대적인, 보기 드문 영화.” 2020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그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를 두고 이런 평가를 남겼다. “히치콕 분위기가 뚜렷한 시대물”(<스크린 데일리>), “2차 세계대전을 다룬 특이하고 흡인력 있는 웰메이드 스릴러”(<할리우드 리포터>) 등 <스파이의 아내>에 대한 상찬은 일관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매우 잘 만들어진 장르영화라는 점이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는 장르를 자신의 중력 안으로 끌어들여 탈바꿈시키는 종류의 창작자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첫 번째 시대극인 <스파이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사코>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각본에 참여하는 등(구로사와 기요시, 하마구치 류스케, 노하라 다다시 공동각본) 전작들과 달라진 면모가 눈에 띄지만 결국 이것은 구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첫 번째 시대극이자 밀도 높은 실내극 '스파이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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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미디어 환경에서도 꿋꿋이 발행되고 있는 <씨네21>을 사서 보시는 독자 분들은 필시 전문가일 것이라 믿기에 다음의 질문을 하고 싶다.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는 무엇인가 ?”
이것저것 검색하다 시나리오작가들의 카페에서 동일한 주제의 논의를 발견했다. 영화가 화면으로 이야기하는 비중이 높아 ‘지문’이 중요하다면 드라마는 ‘대사’로 이야기를 하는 편이라는 주장부터, 영화는 극장에서 돈내고 보고 드라마는 공중파에서 공짜로 보여지니 집중과 병행의 시청 환경이 다르다는 의견까지 흥미로운 토론이 이어진다.
그중 “드라마가 길게 늘어선 엿가락이라면 영화는 단단하고 각 잡힌 각설탕 느낌”이라는 찰진 표현이 눈길을 끌었다. 요컨대 길이와 밀도의 차이라는 것인데 그간 보았던 영상물들의 상영시간과 시간당 제작비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이야기다 싶었다. 길이의 제한이라면 최근 나의 추억의 리마인더는 왓챠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였다. 짬짬이 먹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어쨌든, 함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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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영방송 <ZDF>와 우파 영화사가 지난 3월 23일, 폴란드 법원 2심에서 미니시리즈 3부작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Unsere Mütter, unsere Väter)에 대해 “독일 공영방송 <ZDF>는 홈페이지에 공식 사과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소송인은 2차대전 당시 폴란드 빨치산이었던 96살 즈비기니예프 라돌프스키다.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폴란드 빨치산 군대에서 활동하며 유대인을 구했던 라돌프스키는 인격권 침해를 주장하며 8년간 소송을 진행했다. 극중 폴란드 빨치산 대원들이 유대인에 대해 반감을 보이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20대 초반의 젊은이 다섯명을 주인공으로 한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는 2013년 3월 독일 방영 당시 시청률 20%를 기록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평범한 젊은이들이 전쟁에 휘말리는 비극을 밀도 있게 보여준 작품성을 인정받아 80여개국에 수출되고, 독일텔레비전상
[베를린]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역사 왜곡, 폴란드 법정에서 공식 사과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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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곳>의 유진은 선배 창석(연우진)의 소설 출간을 돕는 편집자다. 시종 시니컬함을 유지하면서도 과거의 상실을 거리낌 없이 창석에게 털어놓는 인물이다. <대자보>로 제15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단편의 얼굴상’을 수상한 후,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기까지 배우 윤혜리가 달려온 시간에 관해 물었다.
반짝이는 사람 유진은 과거에 큰 상실을 경험했는데도 사람이 피폐하지 않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모습이 억척스럽지 않고 반짝이더라. 그런 지점에 매력을 느꼈다.
아이유 가수들을 정말 좋아하는데 특히 아이유는 내게 ‘테스형’ 같은 존재다. 지혜를 구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과 작품에서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니 너무 좋지 않나. (웃음) 출연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줌파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 김종관 감독님이 추천해준 책이다.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뛰어나 유진 연기의 디테일을 채우는 데에 도움이 됐다.
시니컬
[WHO ARE YOU] '아무도 없는 곳' 윤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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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스파이 혐의로 잡혀가기 직전에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걸쳐 입는다. 카메라는 침묵을 지키며 이 몇초 동안의 동작을 보여준다. 이런 호흡을 놓치지 않는 작가의 영화라면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고 싶다.
두개의 세계, 두개의 필름, 두개의 얼굴
영화의 초반부에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남편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에게 말한다. “당신은 언제나 나보다 멀리 보고 있어요.” 예사로운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꽤나 인상적인 부름이다. 이야기 내부의 단서들로 이 말의 표면적인 의미를 유추해보는 건 어렵지 않다. 유사쿠는 사토코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눈앞에 보이는 세계 바깥을 향해 시선을 둔다. ‘코즈모폴리턴’을 자처하는 사업가인 그는 만주에서 일본군의 생체실험 일지와 기록 필름을 목격했으며, 그 거대한 전쟁범죄의 증거가 담긴 필름을 밀반입한 뒤 미국으로 떠나 폭로할 계획을 세운다.
영화 절반이 지나갈 동안, 정확히 말하면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 사토코는 유사쿠의
'스파이의 아내'는 어떻게 밀도 있는 실내극을 완성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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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 잭(잭 고트사겐)에겐 꿈이 있다. 지금은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집단생활 중이지만 프로레슬러 데뷔를 소망한다. 10년도 더 지난 경기 비디오를 보며 영상 속 선수를 찾아 프로레슬링을 배우겠노라 다짐한다. 룸메이트의 도움으로 시설에서 탈출한 잭은 강가에 정박한 어느 통통배 안에 숨어든다. 선주 타일러(샤이아 러버프)는 보트를 몰다 잭을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듣게 된다. 타일러는 잭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도움을 줄 것을 약속한다. 맨몸으로 세상에 뛰어든 잭과 과거의 방황에서 도피한 타일러의 동행이 시작된다.
<피넛 버터 팔콘>은 로드무비다. 영화는 아웃사이더 주인공이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서 자신의 꿈을 성취한다는 장르의 공식이 바탕을 이룬다. 다만 여타 미국 로드무비와 달리 미주 대륙의 광야를 자동차로 달리는 장면은 적다. 대신 완보와 뗏목 운전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자율주행 시대의 뗏목 여행은 마크 트웨인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감흥을 기억의 수납에서 꺼낸다.
컨
영화 '피넛 버터 팔콘' 아웃사이더 주인공이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을 담은 로드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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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우지현)은 여기저기 떠돌며 살아가는 청년이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집을 나왔고, 서울역에서 다른 홈리스들과 함께 꿋꿋이 살아간다. 어느 날 태산은 굴다리를 지나가다가 굴다리 벽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는 모아(심달기)를 만난다. 태산은 길거리에 주차된 자동차 뒤 유리에 쌓인 먼지로 그림을 그려 모아에게 보여준다. 일면식도 없던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에 관심을 보이며 점점 가까워진다.
줄거리만 보면 두 청춘의 로맨스물처럼 보이지만 정작 이야기는 남녀 관계를 그리는 데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태산과 모아가 과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세히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각기 다른 이유 때문에 상처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두 사람이 만나면서 서로에게 에너지와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이야기다. 특히 태산이 먼지로 그리는 그림은 눈이 즐거울 만큼 경이로운 예술 작품인데, 보잘것없어 보이는 재료(먼지)로도 충분히 예술적 가치가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영화 '더스트맨'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출신 김나경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