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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이규홍씨가 앉혀서 밥을 먹이고 씻긴 뒤 옷을 갈아입히는 상대는 손주가 아닌 아내 이연숙씨다. 그가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는 이연숙씨를 곁에서 돌보기 시작한 그날부터 철저히 아내 위주로 짜인 그의 하루 시간표는 13년째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가 췌장암 선고를 받으면서 영원불변의 일과에도 큰 변동이 생긴다. 수술을 앞둔 이규홍씨는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아내가 지낼 요양원을 알아보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둘만의 여행을 계획한다.
다큐멘터리 <그대라는 기억 연숙씨>의 초반은 헌신적 사랑의 주인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리는 데 목적이 있는 영화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한다. 더 잘해주지 못한 남편의 회한을 읊는 성우의 내레이션과 간병과 살림을 도맡은 남편을 안쓰럽게 지켜보는 카메라의 시선 때문이다. 그러나 중반쯤 딸의 등장으로 이규홍씨와 이연숙씨의 호칭이 남편과 아내에서 아버지와 엄마로 바뀌는 순간, 영화는 하나의 특별한 러브 스토리에서 보편적인 가족 이야기
[리뷰] 하나의 특별한 러브스토리에서 보편적인 가족 이야기로 확장된다 '그대라는 기억 연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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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 보호사로 일하며 홀로 살고 있는 중년 여성 경아(김정영)에게 하나뿐인 교사 딸 연수(하윤경)는 정서적으로 큰 힘이 되어주는 존재지만, 독립한 뒤로는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 경아는 이따금 영상통화를 주고받으며 딸의 일상을 세심히 신경 쓰지만, 정작 연수는 그런 엄마의 걱정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한편, 연수는 헤어진 남자 친구 상현(김우겸)이 자신에게 집착하자 그에게 최종 이별 통보를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간의 비밀스러운 동영상이 연수의 지인들에게 뿌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영상의 수신인 중에는 연수의 엄마 경아도 포함되어 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영상을 받아보게 된 경아는 깊은 충격과 혼란에 빠진다. 피해 당사자인 연수 또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해보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사람들의 뜻밖의 언행은 연수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단편 <우리가 택한 이 별> <야간근무> 등을 연출한 김정은 감독의 장편 데뷔
[리뷰] 어둠 속을 헤쳐나가는 나란한 걸음, 미약하지만 분명한 빛 '경아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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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혈투 끝에 비밀연구소 아크에서 빠져나온 소녀(신시아)가 흰눈으로 뒤덮인 숲을 따라 걷는다. <마녀 Part2. The Other One>(이하 <마녀2>)는 소녀를 중심으로 전작의 미스터리를 풀어내기 위해 그 세계관을 더 확장했다. 책임자 장(이종석)과 죽은 닥터 백의 쌍둥이 동생 백 총괄(조민수)은 망실된 소녀를 제거하려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지만 서로를 끊임없이 경계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여기에 두 수뇌부의 명령에 따라 미션을 수행하는 조현(서은수)과 토우 4인까지 소녀를 추격하면서 더 다양한 이해관계를 드러낸다. 그 사이에서 다정다감함을 잃지 않는 이가 있으니 바로 경희(박은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소녀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갈 곳 없는 그에게 집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경계심으로 경직된 소녀가 경희 남매 앞에서는 순수함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한다. <마녀2>는 소녀를 역대급으로 강력한 초월
[리뷰] 확장된 세계관 속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궁극적 목표 '마녀 Part2. The Other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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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단돈 20엔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돈을 내지 않고 나오다 점주에게 붙잡힌 아빠 사토시(사토 지로)와 그를 무사히 집에 데려오려고 한달음에 달려온 딸 카에데(이토 아오이)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둘은 부녀가 아닌 친구 사이 같다. 아니 카에데는 약간 얼이 빠져 있고 사회성도 부족해 보이는 사토시를 보호하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모습의 이면에는 사토시의 아내이자 카에데의 엄마가 루게릭병으로 살 의지를 잃고 자살한 사정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토시는 뜬금없이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연쇄살인범을 목격했다고 말한 뒤 다음날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카에데는 사토시의 근무지에서 사토시와 동명이인의 청년을 만나자 당황한다. 수배 전단에서 그가 연쇄살인범 야마우치 테루미(시미즈 히로야)란 사실을 알아챈 카에데는 아버지의 신변을 걱정하며 킬러를 향한 필사의 추적을 시작한다.
사이코패스 킬러에 관한 흥미로운 설정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플래시백 등장 전
[리뷰] 익숙한 장르, 독특한 스타일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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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고레에다 히로카즈
세상은 흑백이 아닌 회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회색에 대한 이야기.
<나는 지금... (40 something)> / 강승원
강승원님이 마흔 무렵에 쓰셨다는 곡. 노래를 통해 그의 마흔이 나의 마흔을 다독여준다.
유튜브 채널 <성시경>
‘노래’와 ‘먹을 텐데’라는 코너가 있는 음주가무를 겸비한 채널. 매주 꾸준히 업데이트해주셔서 그저 감사할 뿐.
<어린이라는 세계> / 김소영
‘천천히 해.’ 나와 내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담겨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읽을 때면 그의 살을 떼어 건네받는 기분이다. 작품에 대한 경외감을 넘어 창작자로서 나 스스로
[LIST] 배우 김준한의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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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를 만나면 꼭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를 읽으러 간다. 거창한 목표와 조잡한 결과물간의 괴리가 클수록 얄궂은 재미도 커진다. 그래도 말한 대로 책임지길 바라는 기획 의도를 만날 때도 있다. 의료사고로 임신한 드라마 보조작가 오우리(임수향)가 주인공인 SBS <우리는 오늘부터>는 베네수엘라 텔레노벨라를 리메이크한 미국 <The CW>의 <제인 더 버진>(넷플릭스)을 다시 한국판으로 옮겨왔다. 원작의 중요한 성취에 한국식 양념을 치는 드라마에 자주 실망했던 터라, 2년 사귄 연인과 냉동 정자의 주인을 오가는 우리의 로맨스는 남편 찾기로, 임신을 유지하는 결정은 생명의 가치 등으로 재포장한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았을 테다(불은 뿜었겠지만). 해서, ‘사랑 없이! 남자 없이! 여자 혼자! 임신한다면? 이건 여성이 중심인 가족을 만들 기회 아닌가요?’라는 기획 의도가 뜻밖이었다.
임신을 소재로 죄책감을 심는 드라마에 바짝 긴장하는 입장으로 &l
[유선주의 드라마톡] '우리는 오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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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베이비 / 왓챠
유대교 가정 출신 대니엘(레이철 세넛)은 대학 졸업반이지만 명확한 진로를 정하지 못했고, 슈거 대디 맥스(데니 데페라리)와의 섹스로 가까스로 용돈벌이를 한다. 어느 날 대니엘은 부모의 연락을 받고 삼촌의 둘째부인의 시바(유대교 친족 장례 후 애도기간)에 참석한다. 폐쇄성을 띠는 유대교 가족 커뮤니티에서 대니엘은 ‘연애는?’ ‘취업은?’류의 질문으로 고통받는다. 영화는 신경질적 스트링 스코어와 아기 울음소리를 끊임없이 삽입하며 대니엘의 고통을 극대화하지만, <시바 베이비>의 장르는 재치 있는 대사로 가득한 코미디다. 당황의 연속에서 먼 친척에게 “홀로코스트 뮤지엄에서 행복해 보이시네요!” 같은 아무 말을 남발하는 대니엘의 고군분투가 쓰라린 웃음을 자아낸다. 감독 에마 셀리그먼의 동명 단편이 원작이다.
야쿠자와 가족 / 넷플릭스
<야쿠자와 가족>은 야쿠자 겐지(아야노 고)의 삶 중 세 시기를 영화에 담는다. 야쿠자 출신의 꼬리표를 벗고
[리뷰 스트리밍] 시바 베이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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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시즌을 맞이한 <기묘한 이야기>의 배경은 1986년 여름이다. 마인드 플레이어의 활개 이후 윌(노아 슈나프) 가족은 일레븐(밀리 보비 브라운)과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마이크(핀 울프하드)와 더스틴(게이튼 매터래조)은 새로 사귄 친구 에디(조셉 퀸)와 헬파이어 클럽을 결성했고, 루카스(케일럽 매클로플린)는 친구들과 달리 농구팀에서 활약하며 세간의 주목을 즐긴다. 그러던 중 괴이한 살인 사건이 호킨스에서 연이어 발생하고 더스틴, 낸시(나탈리아 다이어), 스티브(조 키어리), 맥스(세이디 싱크) 그리고 로빈(마야 호크)은 본능적으로 이 연쇄 살인이 뒤집힌 세상의 괴물 짓임을 알아챈다. 한편 조이스(위노나 라이더)는 죽은 줄 알았던 호퍼(데이비드 하버)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구하러 알래스카로 떠난다. 새 학교에서 누적된 따돌림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엘은 우발적 폭력을 저질러 소년원으로 연행되고, 사라진 엘을 찾으려 마이크와 윌, 조나
[리뷰 스트리밍] 기묘한 이야기 시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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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홍예지)은 청각 장애를 가진 어머니 경숙(김지영)과 함께 밝게 살아간다. 어느 날 윤영은 귀가 중 범죄 피해에 놓이고, 피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 채 가해자를 상해치사에 이르게 한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름 대신 ‘이공삼칠’(2037)이라는 수인번호로 불리는 윤영. 범죄 피해는 수감 중인 윤영에게 예상치 못한 더 큰 신체적 절망을 안긴다. 이런 윤영을 위해 12호실 재소자들이 물심양면으로 나선다. 12호실 동기들은 괴로워하는 윤영을 각자의 방식으로 보살피며, 윤영이 범죄 피해 사실을 입증해 감형받을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돕는다.
재소자간 연대와 우정, 교도소 내 옆방과의 알력 다툼 등 감옥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익숙하게 접했던 요소들이 <이공삼칠>에도 존재한다. 이 상투성에 일말의 개성은 배우들이 부여한다. 전에 본 듯한 설정이 개성 강한 배우들의 육체를 입는 순간 영화는 일견 특별해 보인다. 윤영 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홍예지가 그중 놀랍다. 그는 캐릭터
[리뷰] 낯익은 서사 속 미더운 배우를 찍는 음흉한 카메라 '이공삼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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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가수 윤시내가 콘서트 당일 연기처럼 사라진다. 콘서트 오프닝 무대에 서기로 예정되었던 이미테이션 가수 연시내(오민애)는 아쉬움을 숨길 길이 없다. 줄곧 동경하던 윤시내와 같은 무대에 오를 기회가 불발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시내가 논란의 중심에 서면서 연시내의 가수 활동에도 비상등이 켜진다. ‘짝퉁 가수’란 원조 가수의 이미지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쉽고, 윤시내의 잠적 사건은 연시내의 무대를 앗아가기 충분하다. 하지만 연시내는 좌절하는 대신 윤시내를 찾기로 한다. 윤시내를 위해 담근 술을 직접 전하겠다는 핑계를 알리바이 삼아 짧은 로드 트립에 오른 것이다. 연시내처럼 윤시내의 이미테이션 가수로 활동 중인 준옥(노재원)과 연시내의 딸 장하다(이주영)가 연시내의 여정에 동행한다. 데면데면한 모녀 사이인 장하다와 연시내는 서로에 대한 오해로 자주 다투지만 이내 화해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여느 로드 트립 서사가 그러하듯 <윤시내가 사라졌다>는 각기 다른 가치관을 지닌 인물들
[리뷰] 가짜에도 진실함이 있다 '윤시내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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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베이비박스 앞에 두고 간 엄마 소영(이지은)이 되돌아오면서, 아이를 몰래 빼돌린 불법 입양 브로커 상현(송강호)과 동수(강동원)의 계획이 틀어진다. 이 둘은 소영을 설득해 아이를 더 잘 키워줄 수 있는 적임자를 찾는 여정에 동참시킨다. 여기에 보육원에서 합류한 소년 해진(임승수)까지 더해진 ‘이상한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 낯설지 않은 모양새다. 버리는 것과 버려진 것을 둘러싼 여러 사연 속에서 <브로커>는 가족이란 혼자였으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그저 함께하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일깨운다. 거래 현장을 덮치려는 형사 수진(배두나)과 이 형사(이주영)가 이들을 뒤쫓고, 멀리 있던 인물들이 감정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과정이 주요한 재미 요소다.
캐릭터의 명암을 섬세하게 살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들이 그랬듯이 <브로커> 역시 아이를 버리고, 심지어 빼돌려 팔려는 주인공 캐릭터들을 미워할 수 없게 그린다. 사채 빚에 시달리거나 가족에게 버
[리뷰] 혼자라면 못했을 일을 해내는 고레에다식 마법 '브로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