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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엔딩을 알아야 글을 쓸 수 있다” vs “엔딩을 미리 알고 쓴 적이 없다”,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감독 x <헤어질 결심> 정서경 작가
임수연 사진 백종헌 2024-03-15

두 거장의 만남이다. 2월29일 <패스트 라이브즈>홍보 활동차 내한한 셀린 송 감독과 <헤어질 결심>의 정서경 작가가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CJ ENM 비저너리 인사이트 토크 ‘<패스트 라이브즈> 응원할 결심’ 참석차 인연을 맺었다. 본격적인 행사가 진행되기 전 셀린 송 감독과 정서경 작가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미리 나눴던 대화를 옮긴다.

-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활동해온 작가의 조우, 2년 전과 올해 각각 시상식 레이스에서 좋은 결과를 보여준 영화를 만든 창작자간의 교류다. 먼저 서로의 작품에 대한 짧은 감상부터 나눠보면 어떨지.

정서경 <패스트 라이브즈>를 너무 재밌게 봤다. 처음 봤을 땐 생각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나더라. 노라/나영(그레타 리)가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울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래서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봤다. 그러니까 이유를 좀 알겠더라. “이게 이렇게 진행된다고?” 중간에 몇번씩 놀라면서 봤다. 이를테면 해성(유태오)의 행군 장면은 한국인에게 무척 생경했다. 우리는 군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직접적으로 찍지 않는다. 외국인이 보는 한국 청년의 모습은 이런 걸까? 근데 해성이 밥을 먹는 모습이 슬퍼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정서가 생긴 거다. 그렇게 장면 장면의 의미를 알게 되는 과정이 좋았다. 아티스트 레지던시 신도 정말 아름다웠다. 세상에 작가에게 글을 쓰라고 컵에 이름을 새기고 꽃을 꽂아주는 공간이 있을 수 있나? (웃음)

셀린 송 작가님은 레지던시를 가본 적이 없나?

정서경 난 그런 게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웃음) 작가에겐 눈물겹게 좋은 신이었다. 그 신 직전에 노라/나영(그레타 리)이 해성을 떠나기 때문에 아쉬운 감정을 안고 있었는데, 덕분에 이렇게 좋은 레지던시에 갈 수 있었다니 그와 헤어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일동 폭소) 아티스트 레지던시 시퀀스의 마지막에 자연스럽게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12년 뒤에 그와 결혼한 상태인 것도 좋았다. 아름다운 신들이 무척 유려하게 찍혀 있다. 원래 연극을 공부했다고 들었는데 <패스트 라이브즈>에는 영화적인 순간이 많았다. 극 중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도 아름답다. 특이하게 남자들이 좋은 말을 많이 하고 노라는 그냥 듣는다. 용기 있는 행동을 많이 하고 변하는 것도 남자들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정말 경제적이다. 시간의 흐름을 처리하는 방식이 정말 좋았다. 시나리오 쓰는 데 얼마나 걸렸나.

셀린 송 넉달 정도는 ‘띵까띵까’하면서 있었다.

정서경 그건 작가에게 정상적인 과정이다. (웃음)

셀린 송 구조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알게 된 다음부터는 한달이 걸렸다. 마지막의 바 장면을 오프닝으로 가져와서 거기서부터 영화를 시작하기로 했다.

정서경 보통 엔딩은 시나리오를 다 쓴 다음에 알게 되나? 혹은 엔딩을 먼저 정해놓고 글을 쓰나.

셀린 송 나는 엔딩을 알아야 글을 쓸 수 있다.

정서경 어떡하지? 난 아직도 엔딩을 알지 못한 채 글을 쓰고 있다. <헤어질 결심>의 엔딩도 중간쯤에 알게 됐다. 단 한번도 엔딩을 미리 알고 쓴 적이 없다.

셀린 송 혹시 <헤어질 결심>의 영제 ‘Decision to Leave’는 마음에 드나.

정서경 영어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결심’은 묶는 느낌인데 ‘Decision’은 자른 것 같다. 떠나기 위해 무언가를 잘랐다는 점이 무척 좋았다.

셀린 송 <헤어질 결심>을 시사회에서 봤다. <헤어질 결심>이야말로 정말 경제적인 영화였다. 그리고 마무리가 정말 좋았다. 나는 늘 미스터리는 더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스터리가 풀려버리면 그 마음이 너무 간단하게 보일 수 있달까. <헤어질 결심>은 결말에서 미스터리가 더 깊어지고 깊어지고 마음까지 깊어진다.

미끄러지는 언어들

- <패스트 라이브즈>와 <헤어질 결심>은 영어, 중국어가 한국어와 함께 등장해 이들이 충돌하는 데서 독특한 정서가 빚어지는 작품이다. 번역에 따라 어감이 달라지는 대신 외국어이기에 더 순수하게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파고들 수도 있다.

정서경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패스트 라이브즈>를 접했는데 그때부터 영화가 너무 보고 싶더라. <패스트 라이브즈>라는 제목 자체가 무척 좋았다. 한국어의 ‘전생’은 그냥 개념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라고 하면 흘러가는 삶이 보이는 것 같다. 극 중에서 부부는 8천겁의 인연이 쌓여야 만날 수 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솔직히 두 사람이 만나기까지는 8천겁도 적다. 지금 <북극성>(김희원 감독이 연출하고 강동원, 전지현이 주연을 맡아 곧 촬영에 들어간다.-편집자) 7부 대본을 쓰고 있는데 1부를 쓸 때의 나는 거의 전생이라 완전 다른 사람이다. (일동 폭소) 지금 배우자를 만나기 전에 어떤 사람과 헤어졌다면 그때 수천개의 삶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렇게 결혼 상대를 만나기까지 무한대의 삶의 겁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도 여러 겁이 존재하지만 부모의 그것 역시 전생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영의 부모는 한국에서 살았던 삶 때문에 어떠한 이유로 이민을 결심한다. 그들이 한국에서 꿨던 꿈을 접고 캐나다로 오면서 분명히 잃고 얻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 또한 나영에게는 전생이 된다. ‘패스트 라이브즈’라는 제목에 수많은 겁이 와글와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셀린 송 서로 다른 언어의 갭을 넘기 위해 하는 노력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캐릭터들을 쓸 때도 그 부분을 의식했다. <헤어질 결심>의 인물들도 서로 대화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대화가 아닌 방식으로 소통하려고 한다.

정서경 <헤어질 결심>에서 탕웨이는 한국어의 뜻만 공부하고 어감은 알지 못한 채 연기했다. 그래서 눈빛이 절박했다. 아마 관객들도 보자마자 그것을 전달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래는 살인범인 데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셀린 송 사실 나는 계속 서래의 편을 들면서 봤다. 서래는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골라서 표현하는데 나도 ESL(English as a Seccond Language)이기 때문에 그게 뭔지 안다. 12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왔고 지금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만 특유의 한국어 악센트는 남아 있다. 감정이 격해질 때 자연스럽게 센 억양이 나온다.

정서경 감독님도 노라처럼 한국어로 꿈을 꾸나.

셀린 송 그때그때 다르다. 한국어가 나올 때도 영어가 나올 때도 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게 언어는 아닌 것 같다.

정서경 감정과 생각의 덩어리 같은 걸까. 나는 영어로 꿈을 꿀 때가 있다. 여기서 핵심은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거다. (웃음) 예전에 12주 정도 한국인이 없는 곳으로 어학연수를 간 적이 있다. 그때처럼 불행했을 때가 없었다. 내가 말을 잃었던 그때 처음으로 영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지금 영어 꿈을 꾸는 건 아마 단순한 문장이지만 힘이 있는 생각이었기 때문 아닐까. 낯설게 보고 싶은 생각을 영어로 하는 것 같다.

셀린 송 영어 꿈이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는 것 같나.

정서경 그것과는 또 다르다. 한국어의 여러 요소를 떼내고 순수하게 그 생각을 하고 싶을 때 영어 꿈을 꾸는 듯하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번역되지 않은, 물처럼 떠오르는 삶이 생각나는 영화이지 않나. 그런 개념이 떠올리고 싶을 때 영어로 생각한다.

셀린 송 작가님도 이미지로 생각할 때가 있나. 나는 그럴 때도 많다. 이를테면 ‘물’이나 ‘Water’가 아닌 그냥 이 이미지 자체로 말이다. 이건 내가 영어와 한국어 모두를 쓰는 사람이어서 그런 건지 다른 사람들도 그런 건지는 잘 모른다.

정서경 나는 일단 공간을 생각한 뒤 거기에 어떤 소리가 있는지 생각한다. 이미지보다는 소리에 더 가깝다. 이미지는 시간이 없지만 소리에는 길이와 속도가 적용되니 시간이 있다. 소리를 떠올리고 나면 그 신에 대해 많이 이해할 수 있다.

셀린 송 그런데 말이든 침묵이든 리듬은 무척 주관적이지 않나. 그래서 소리는 곧 글 쓴 사람의 보이스라고 본다.

정서경 얼마 전에 깨달은 게 있다. 우리는 인물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인물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다. 가끔 내가 내레이션을 쓸 때가 있는데 그건 그 인물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연극의 침묵이 참 좋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은 말이 없는 순간이었다.

셀린 송 내가 연극을 해서 침묵에 대한 신뢰가 크다. 사실 연극의 리듬 자체는 배우들의 호흡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에 맞춰 작품이 만들어진다. 연출자가 컷을 할 수가 없다. 영화를 만들면서 좋았던 것은 편집을 통해 침묵을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정서경 사실 내가 영화만 할 때는 배우가 리듬을 만든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 드라마를 하면서 배우들이 부딪치면서 엄청난 에너지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라마는 시간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연극적인 순간이 많다. 무대를 세우고 배우 두명을 놓고 그냥 가는 거다.

자전적인 체험을 영화로 만드는 일

- <패스트 라이브즈>는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반면 정서경 작가는 개인적인 경험을 작품의 아주 작은 부분에만 녹여낼 뿐 지금까지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써본 적이 없다.

정서경 안 그래도 셀린 송 감독님에게 여쭤보고 싶었다. 자전적인 체험을 영화로 만들고 나면 실제 삶도 변하나. 단지 이게 재미있는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이것을 영화로 만드는 게 스스로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에 하게 된 일 아닌가. 영화를 본 관객과 감정을 나누면서 그게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고 삶을 더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했을 것 같다.

셀린 송 덜 외로워졌다. 내가 겪은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나도 그런 적이 있다”는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가 어딜 가든 얼마나 멀리 가든 조금씩 영화가 더 커지고 그럴수록 나는 덜 외로워진다. 모두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작가 출신 감독에게 작용하는 편견이 있다. 이야기가 연극적이라거나 시나리오에 대한 능력을 주로 인정하고 연출에 대한 이야기는 덜 오가는 경향이 있다. 극작가 출신인 셀린 송이 <패스트 라이브즈>를 영화로 만들어야만 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셀린 송 이 스토리 자체가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어른이 공존하며 거기서 모순이 생겨야 한다. 서울과 뉴욕 등 도시들 자체가 캐릭터다. 비슷하면서 다른 공간들, 그곳의 소리와 냄새가 너무 중요했다. <패스트 라이브즈>에 인간 빌런은 없지만 장벽이 있다면 그것은 24년의 시간과 태평양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공간에 그 거리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야 했다. 사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나 감독 시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웃음) 스크립트 자체를 “내가 감독 할 수 있어요!”라고 느껴지게끔 썼다. 어떻게 촬영할 것인지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구체적으로 시나리오에 다 씌어 있다. 다행히 이 작품은 자전적인 이야기였고 나는 시나리오에 담긴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A24는 기본적으로 데뷔 감독과 그로 인한 리스크에 상당히 오픈되어 있는 곳이다. 덕분에 <패스트 라이브즈>로 영화감독 데뷔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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