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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어떻게 만남과 헤어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감정을 다룬 새로운 이민자 서사가 되었나
임수연 2024-03-15

서사의 자전성과 성찰의 단단함

삶에는 매 순간 무한개의 우연이 적용된다. 대다수는 인지되지 못한 채로 흘러가지만 유독 마음에 남는 분기점이 누구에게나 있다. 만약 그때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다른 학교나 반에 배정받았다면, 다른 대학에 진학했다면, 회사 면접에서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애인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결혼하지 않았다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자발적으로 ‘가지 않은 길’을 택했다고 하더라도 외부 요인이나 운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선택은 없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선택과 선택되어지는 것, 그로 인한 단절로 엇갈린 인연에 관한 영화다. 나영/노라(그레타 리)는 12살 때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같은 반에서 1, 2등을 다투는 라이벌이자 첫사랑이었던, 그래서 언젠가 결혼하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했던 해성(유태오)과 급작스럽게 이별한다.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이 꿈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당차게 말하는 나영에게 캐나다는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부모의 결정으로 시작된 이민이지만 나영은 그가 잃게 될 과거보다 얻게 될 미래의 가능성을 먼저 생각한다. 12년 후, 나영은 더이상 한글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연극 극작가를 꿈꾸며 노벨문학상에서 퓰리처상으로 목표를 바꾼 노라는 페이스북을 통해 과거 친구들을 찾아보다 우연히 해성의 계정을 발견한다. 오랜만에 스케이프 화상채팅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14시간의 시차를 극복하며 연락을 이어가지만 이번엔 불확실한 미래가 장벽이 된다. 각자의 꿈을 위해 잠시 연락을 멈추기로 한 노라와 해성은 가까운 곳에서 새로운 연인을 만난다. 또다시 12년 후, 극작가가 된 노라는 예술인 레지던시에서 만난 유대인 남자 아서(존 마가로)와 결혼한 상태다. 반면 해성은 현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기엔 직업과 수입 등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관계가 요원해졌다. 해성은 오로지 노라를 보기 위해 뉴욕에 온다. 12살 때 노라가 이민을 가지 않았다면, 군복무를 마친 해성이 중국 대신 뉴욕으로 왔다면, 혹은 노라가 서울로 돌아왔다면, 두 사람은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패스트 라이브즈>는 다소 직접적인 대사로 그들이 가지 않은 길의 가능성을 짚어본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프리미어를 가진 <패스트 라이브즈>는 공개 즉시 한 도시를 여행하는 커플을 따라갔다는 점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스킨십 하나 없이 배우자 외의 이성과 아슬아슬한 텐션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왕가위의 <화양연화>와 데이비드 린의 <밀회>, 떠나온 곳과 사람이 남긴 잔재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와 노라 에프런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등과 비교됐다. 여기에 부부가 만나기 위해서는 8천겁이 필요하다는 한국의 ‘인연’이란 개념이 들어온다. 서울과 뉴욕, 총 24년이라는 세월에서 오는 거리는 이따금 찾아오는 서먹한 침묵이 되지만 동시에 친밀한 긴장과 사소한 충동을 만든다. 떠난 자와 남은 자의 선택이 주는 회한과 체념은 그 또한 로맨스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 셀린 송 감독은 원래 극 중 노라처럼 극작가 출신이다. 그는 <패스트 라이브즈>가 연극이 아닌 영화로 만들어졌어야 하는 이유를 영화적으로 탁월한 순간을 통해 증명한다. 12살과 36살의 어떤 순간이 영화이기에 가능한 몽타주로 교차될 때, 카메라가 긴 트래킹숏으로 두 사람이 떠나보낸 선택들이 만든 간극을 아름답게 비출 때, 영어와 한국어 두 언어의 불일치가 조금씩 어긋나고 마찰하는 순간이 침묵의 사운드와 자막으로 완성될 때가 그렇다. 노라를 연기한 그레타 리는 이미 결혼한 남자와 첫사랑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어쩌면 무척 통속적인 ‘삼각관계’ 속에서 뜨겁게 끓어오르기보다는 현재와 과거의 짓궂은 충돌을 평온한 에너지로 연기한다. 이는 노벨문학상에서 퓰리처상, 토니상으로 점차 욕망이 축소됐던 동양인 여성의 체념이기도 하면서, 비가역적인 시간은 과거를 되돌려놓을 수 없지만 그 또한 지금의 자신을 만든 재료였다는 것을 인정한 성숙한 어른의 태도다. 선택은 때때로 확률적 우연의 부산물이기도 하고, 그것이 모여 필연의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수상 실적을 갱신하고 있는 <패스트 라이브즈>는 훌륭한 이민자 영화다. 태어난 곳과 떠나온 곳, 정착한 곳에서 경험한 이방인의 불안감은 <패스트 라이브즈>의 세계를 이루는 중추다. <페어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미나리>가 아메리칸드림을 찾기 위해 낯선 땅을 찾은 이민자 가족의 노동과 자립, 유대를 사회적 문제와 결부해 다뤘다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민자의 삶을 좀더 개인적인 내면에 집중해 로맨스 장르의 문법에서 풀어낸다. 아웃사이더로서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지만 관객은 캐나다와 뉴욕에 발붙이고 살아야 하는 동양인의 고립감이 정말로 이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를 떠났던 결단과 후회하지 않는 용기는 남녀의 로맨스 서사에 보편적이면서 내밀한 감정을 담는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포함해 7관왕 기록을 세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윤여정의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을 안긴 <미나리> 등 최근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아시안계 미국인 영화의 계보를 계승한다. 그리고 <패스트 라이브즈>는 A24가 올해 시상식 레이스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마케팅하고 있는 작품이다. 브라이언 후 미국 샌디에이고대학교 영화과 교수는 ‘A24와 아시안계 미국인 프레스티지 영화’(A24 and the Asian American Prestige Film, 이 논문에서 ‘Asian American Prestige Film’은 SNS와 언론을 통해 영화를 숭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오스카 투표자들과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써 명성을 얻은 아시안계 미국인 영화를 표현한다)에서 다양한 장르와 감성을 통합하며 MZ세대가 향유하는 ‘힙한’ 영화 브랜드를 구축해온 A24가 최근 아시안계 미국인 영화가 시상식에서 주목받는 이유를 분석했다.

SNS와 멤버십 서비스, 흥미로운 굿즈 사업을 통해 충성도 높은 팬층과 교류하는 A24는 앞서 언급한 <미나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그리고 최근 에미상에서 작품상, 남녀주연상 등 8관왕을 휩쓴 <성난 사람들>의 제작사다. 브라이언 후는 “단순히 동양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양성, 대표성, 진정성에 대한 젊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 A24의 능력이다. 이는 A24가 배급사로서 가진 명성과 결합되어 비평가들과 오스카 투표자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받게 된다”고 분석했다. 미라맥스 시대의 미국 인디영화에서 다양성은 그리 중요한 화두가 아니었지만, #OscarsSoWhite(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운동이 할리우드를 휩쓸고 더욱더 다양한 인종의 회원을 유치하는 최근의 시상식 레이스는 A24가 고집하는 방향성에 부합한다. “A24는 홍보 자료를 통해 이민자들의 경험과 관련된 문화적 ‘진정성’의 차이와 가치를 강조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감독이 직접 연출할 수밖에 없는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임을 언급하며 비아시안 감독들에게 의존해 아시아 이야기를 했던 과거 할리우드영화와의 차별점을 강조했다.”

또한 아시안 미국 독립영화는 “지역 아트하우스 극장이든 젠트리피케이션에 직면한 차이나타운이든 낭만적인 공동체”를 통해 확산되며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경향이 있다. A24 그리고 4년 전 <기생충>으로 칸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모두 석권하고 <패스트 라이브즈>의 투자, 제작에 참여한 CJ ENM은 영화제에서 <패스트 라이브즈>의 가치를 널리 알렸다. 한국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없다며 캐나다 이민을 반겼던 나영은 이방인으로서 그리 순탄치 못한 여정을 걸어왔지만 이는 영화라는 매체를 만나 이 또한 현재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긍정케 하는 자기 치유는 얼마나 건강한가. 공신력 있는 상을 받는 것이 꿈이었던 소녀가 결국 할리우드에서 가장 큰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될 만큼 창작자에게도 독보적인 무기가 된다. 서사의 자전성은 가장 잘 아는 내면의 성찰과 사유를 전제하기에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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