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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렛
2001-03-09

그녀의 초콜릿을 맛보면, 누구든 사랑에 빠진다. 마약보다 더 좋은 것.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그 무엇. 정체 모를 그 묘약은, 먼저 마음의 족쇄를 풀라고, 관능적인 매혹에 솔직해지라고 부추긴다. 달콤한 초콜릿의 성찬은, 금욕과 위선과 편견으로 무장한 한 마을에, 사랑의 훈풍을 불러온다. 달콤쌉싸름한 사랑의 맛이 오감으로 느껴지는 영화 <초콜렛>은, 사랑만이, 사람만이 세상의 희망임을 이야기한다.

여느 음식영화처럼 식욕과 성욕을 연결짓고 있지만, <초콜렛>은 신비와 순수의 공기를 곁들인다. 초콜릿의 유래와 기능을 상징하는 여인의 존재도 그 속에서 빛을 발한다. 성당에서 앳된 신부가 “진리는 어디에 있냐”고 목청을 높일 때, 그에 대한 대답인 듯 거센 북풍이 불어닥치고, 이방의 모녀가 마을에 당도한다. 얄궂게도 빨간 망토를 뒤집어쓰고. 미혼모와 그 딸.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가슴팍에서 주홍글씨를 읽으려 한다. 괴상한 접시(마야의 유물로 밝혀지지만)로 점을 보면서, 식성과 취향, 마음의 병을 맞히는 여자는, 어쩌면 마녀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시장의 표현대로, “사람들의 영혼을 물들이고 타락”시킨다. 초콜릿을 맛본 사람들의 얼굴에, 사랑의 신열이 오르고, 홍조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고해성사에서 초콜릿에 대한 매혹과 주체 못할 사랑의 감정을 호소한다. 초콜릿 제조사 비엔은 그렇게 사랑의 전도사가 된다. 그녀는 <달콤쌉싸름한 초콜렛>의 사랑과 관능의 요리를 선보이면서, <플레전트 빌>의 발칙한 반역을 범하는 것이다.

변화와 성숙에 진통이 따른다는 건, 마을의 통치자 레너드 시장을 통해 보여진다. 비엔의 등장이 규격화된 평화와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시장은, 비엔을 추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흥미로운 것은 시장의 낡은 권위에 대항해 마을 여자들이 연대한다는 사실이다. 매맞는 아내 조세핀, 딸과 절연한 외로운 노파 아만드는 초콜릿 가게에 함께 기거하면서, ‘해선 안 되는 일’이란 없다는 걸, 자신이 원하는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걸, 체득한다. 개과천선했다며 매달리던 폭력남편이 초콜릿 가게로 쳐들어왔을 때, 외로운 할머니 곁에서 그 딸이 손자를 떼어놓을 때, 이들은 가족보다 친밀한 ‘가족’이 되어 서로를 보듬는다. 레너드 시장이 꾸려 온 가족(유사가족)이 불협화음을 내며 망가져 가고, 결국 비엔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이다. <초콜렛>에는 동정조차 아까운 구제불능의 인간은 없다. 레너드 시장조차 애정결핍에, 사랑이 서툰, 가여운 사람일 뿐이다. 해피엔딩으로의 질주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그래서 쉽사리 제거된다. 동화에나 어울리는, 전형적인 캐릭터와 손쉬운 결말. 그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초콜렛>은 몽환적이다. 사물의 형체가 희미할 정도로 표백된 화면은, 이 이야기가 픽션이고 동화임을 상기시키면서도, 흡인력을 발휘한다. 고대 마야의 핏줄을 이어받은 비엔이 가족사를 회상하는 대목에서, 가족사진 속으로 북풍이 불고 모녀가 사라지는 이미지는 특히 환상적이다.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은 호화로운 캐스팅으로 의외의 조화를 일궈낸다. 예의 비감어린 이미지에서 빠져나온 줄리엣 비노쉬,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의 캐릭터를 재현한 조니 뎁, 매맞는 아내 조세핀으로 출연한 레나 올린, 괴팍한 듯 자애로운 노파 아만드로 출연한 주디 덴치, <매트릭스>의 여전사에서 고전적인 중년여인으로 거듭난 캐리 앤 모스의 연기는 완벽에 가깝다. <뽀네뜨>에서 엄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던 꼬마 뽀네트 빅투아르 티비솔이, “우린 아빠가 없는 게 아니라 아빠를 모르는 것뿐”이라며 엄마를 두둔할 만큼 훌쩍 자란 것도 반갑다. <초콜렛>은 현재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과 오스카 최우수작품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음악상, 각색상 후보에 올라 있다.

박은영 기자 cinepark@hani.co.kr

가족의 이름으로, 성장의 이름으로(라세 할스트롬 감독)

라세 할스트롬에게 가족, 그리고 성장은 주요한 테마다. <개같은 내 인생> <길버트 그레이프> <사이더 하우스> 등 빼어난 성장 드라마를 만들어 온 그는, <초콜렛>에 이르러 사랑과 매혹에 관한 우화라는, 우회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작품도 광범위한 의미의 가족, 사랑에 눈뜨거나 자아를 발견한다는 의미의 성숙과 성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를 감시하는 작은 마을, 교리와 규율을 내세우며 간섭하고 칭얼대는 미성숙한 사람들이 ‘초콜렛’이라는 묘약을 통해 온전한 가족이 되고 어른이 된다는 결론은,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 부딪히면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던 그간의 작품들과는, 그 표현법이 달라져 있긴 하다. 그가 즐겨 다루는 성장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의 가족은 결손돼 있거나 사회로부터 소외당해 있다. 그런 이유로 가족 구성원들은 결핍감에 시달리고 서로 갈등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그 자체로 비극적이지만, 라세 할스트롬은 그것으로부터 쓸쓸한 유머와 너른 공감대를 끌어낸다. 웃고 있지만 가슴 저리고, 가혹하지만 따뜻한 드라마. 본국 스웨덴에서 그룹 아바의 뮤직비디오 감독이자 코미디 작가와 감독으로 명성을 쌓고 1990년대 초 할리우드로 건너온 라세 할스트롬 감독은 유럽의 감수성을 견지하면서도, 전세계에서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어내고 있다. 잉마르 베리만의 뒤를 잇는 대표적인 스웨덴감독. 지난해 <사이더 하우스>에 이어 올해도 <초콜렛>으로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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