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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 정의의 이름으로 연기하겠어

<궁녀>의 박진희

어느 때부턴가 박진희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세일러문처럼 누볐다. 찰랑거리는 생머리와 팔등신 몸매 때문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은 전혀 청초하지가 않다. 굵직굵직하긴 해도 전혀 가녀리지 않지. (웃음)” 대신 박진희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올곧은 이미지로 정의의 길을 가르쳤다.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순애의 영혼을 받은 초은은 아줌마다운 배짱과 가치관으로 ‘젊은 것’들을 계도했고, <쩐의 전쟁>의 서주희는 돈을 향한 욕망으로 얽힌 사람들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돈과 거리를 두려는 인물이었다. 남한사회에 떨어진 간첩한테 운명을 빌려주는 <간첩 리철진>의 화이는 어떤가. 심지어 <여고괴담>의 소영 또한 이기적인 전교 일등이면서도 사건을 침착하게 바라보는 여고생이었다. 실생활에서도 그녀의 대쪽 같은 성미는 종종 에피소드를 만들곤 했다. 폐수가 흐르는 현장을 목격하고 구청직원을 달달 볶아 결국 시정하게 만든 건 이미 유명한 일화. 말하자면 박진희는 영화와 드라마, 현실을 넘나들며 외치고 있는 것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어!”

<쩐의 전쟁>과 병행하며 연기한 <궁녀>의 천령 또한 그녀의 이미지와 연장선에 놓인 인물이다. <궁녀>는 권력을 둘러싼 아귀다툼의 복판에 휘말린 궁녀들의 잔혹사다. 언뜻 하드보일드 누아르로 보이는 영화에서 탐정 격인 내의녀 천령은 줄곧 냉철한 이성으로 사건을 분석하는 한편, 지울 수 없는 상처 때문에 무너지면서도 자신을 부수며 음모의 근원을 찾아나선다. “여자들의 세계를 다룬 영화지만 남자들만큼의 위계와 혈투가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그녀는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작품에 에너지를 담으려 애썼다고 했다. 그녀의 힘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느껴졌다. 질문을 하기도 전에 먼저 질문을 던진 그녀는 나이와 이름을 비롯한 호구조사에 전공은 무엇인지, 회사에 입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한참을 털어놓은 뒤에야 본격적인 인터뷰를 허락했다. “어렸을 때는 기자분들이 대부분 어른이었는데, 요즘은 같은 또래가 많아서 인터뷰가 재밌다. 이제는 오늘 만날 기자분이 어떤 사람일지 내가 먼저 궁금해 한다. (웃음)” 자칫 실수를 했다간 어떤 심판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기운 센 누나와 마주선 남동생 같은 입장에서, 어렵사리 첫 질문을 던졌다.

-예전 <씨네21> 기사를 찾아보니 <산책>에 출연했을 때 인터뷰를 했더군요. 표지까지 7년이 걸렸는데요. =그게 마지막이었을 거예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영화가 없었나. (웃음) 나도 이 스튜디오가 너무 오랜만이라고 생각했어요.

-<궁녀>는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 중 처음으로 온전한 주인공을 연기한 작품이에요. 나름 의미가 크지 않을까 하는데요. =그렇죠. 이번 영화는 내가 애정을 쏟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여고괴담> 뒤 딱 10년 만에 출연한 작품이라는 의미도 저에겐 커요. 게다가 <궁녀>는 감독님, 제작자, PD까지 다 여자들이 뭉쳐서 만든 영화라는 의미도 있어요. 저도 이제 나이가 서른인데 남자배우의 서포터를 해주는 것과는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저한테 얼마나 있을까 싶어요.

-<궁녀>는 권력다툼의 한복판에 떨어진 궁녀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드보일드 누아르 같은 모습도 보였어요. 말하자면 ‘궁중 누아르’라고 할까요? 그래서 탐정 격인 내의녀 천령은 험한 일도 많이 겪습니다. 특별히 힘든 점은 없었나요. =그래요? 너무 다행이네요. <궁녀>를 찍으면서 우리도 남자들의 에너지가 물씬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했었어요. 제가 힘들었던 건 다른 게 아니라 여자라서 힘들었어요. 뛰는 장면에서도 남자처럼 뛰고 싶은데 몇번을 다시 뛰어도 여자처럼만 보이는 거예요. 나중에는 감독님이 “진희씨가 남자가 아닌데 어떻게 남자같이 뛰냐”고 그만하라고 하셨죠.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나온 것보다는 좀더 많은 에너지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18세 관람가를 받지 않으려고 수위를 조절한 부분이 있죠.

-아까 기사를 보니까 18세 관람가라던데. =어? (마케터에게) 18세 받았어? (잠시 말 못하다가) 정말 우려하던 일이 나왔구나. (다시 말 못함) 미치겠다 정말…. 그러니까 우리가 찍으면서 굉장히 조심했던 게, 심의를 받아야 해서 더더욱 못 찍은 게 많았거든요. 이렇게 찍었는데 18세 받으면 정말 억울하다 그랬는데, 힘이 빠지네 정말…. 참, 영화가요,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요. (웃음)

-촬영현장에서는 주로 어떤 스타일인가요? 지금 봐서는 현장의 맏형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빨빨거리고 잘 돌아다녀요. 제일 처음 하는 건 스탭들 이름을 외워서 불러주는 거예요. 우리 조명팀 막내애기도 얼마 전 <만남의 광장> 봤다고 문자 보내왔더라고요. 조명감독님은 “밥솥은 어느 제품이 좋냐”고 물어보고. (갑자기 자문자답) 내가 시집을 갔니, 뭘 갔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고 그래? 아 그렇지. 알았어. 으이그, 쿠쿠가 좋대. 쿠쿠로 사. 이러고 놀아요. (웃음) 현장에서도 좀더 자연스러워야 저도 불편하지 않은 거 같아요.

-박진희라는 배우에게는 올곧은 이미지가 있어요. 이번 영화의 천령이나 <쩐의 전쟁>의 서주희나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인물이죠. 심지어 <여고괴담>의 이기적인 소영까지도 그런 이미지로 보였는데요. =어느 순간 저한테 ‘바른생활 처녀’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면서 틀이 생긴 것 같아요. 원래도 그런 이미지가 미약하게나마 있었겠지만, 몇번 그런 연기를 했더니 계속 불어나는 거예요. 심지어 예전에 인터뷰할 때는 이런 질문도 받았어요. “참… 이미지가 없어요. 박진희 하면 떠오르는 게 없어요. 그런 것에 대해서 배우로서 좀 책임감을 느끼지 않나요?” 이건 정말 <무릎팍도사>에서나 나올 법한 질문이잖아요? (웃음) 그런데 생각해보니 없긴 정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기분 나쁠 이유도 없는 거야. 창피하면 창피했지. (웃음)

-실생활에서도 그런 모습이 있는 거 같아요. 예전에 한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는 동네에 폐수가 나오는 곳을 발견하고 구청에 몇번이나 전화해서 시정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를 소개한 적도 있었죠. =좀 뭐랄까. 나쁘게 말하면 제가 좀 팍팍한 데가 있어요. 사실 매번 그렇게 신고하고 살 수는 없죠. 불의를 보고도 잘 참아요. (웃음) 제가 보기 싫은 건 예의가 없는 행동들이에요. 그렇다고 후배가 인사 안 한다고 해서 그때마다 ‘너 왜 인사 안 하니?’ 이러지는 않아요. 요즘에 그러면 욕먹어요. (웃음) 그때 봤던 몰래 폐수를 버리는 현장은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예의가 없어 보였어요. 신고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거지.

-혹시나 그런 모습 때문에 인간관계에 애를 먹는 경우는 없나요? 특히 남자들은 그런 올곧은 모습의 여성을 피곤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하. 남자들은 내가 볼 때도 딱 그래요. 남자들이 여자한테 바라는 게 몇 가지가 있는데 일단은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가 내 맘처럼 됐으면 좋겠는 거야. (웃음) 그녀가 자아를 가지고 뭔가를 하는 걸 무척 싫어해. (기자에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웃음) 그런데 정말 웃긴 건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의 울타리 안에서 살려고 하지,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아를 갖고 사는 여자들이 노처녀가 되는 경우가 많은가봐. 내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도 그런 것 같고. (웃음)

-연애에 대해서는 별다른 욕심없이도 살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그렇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여배우에게 갖는 선입견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 만나는 데 어려움이 있어요. 그리고 저는 뭐랄까… 연애를 좀 정직하게 하는 편이에요. 쉽게 말하자면 “만난 지 100일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뽀뽀를 하니” 이런 거죠. 물론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정절이란 걸 들먹이겠어요. (웃음) 하지만 저는 빨리 달아오른 것은 빨리 식는다는 믿음이 있어요. 저라고 왜 손 안 잡고 싶고, 뽀뽀 안 하고 싶고, 안아보고 싶지 않겠어요. 다만 좀더 천천히 했을 때, 우리가 행복한 시간이 더 길어진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는 거죠. 물론 상대방은 장난해? 지금 내숭 들어온 거야? 이러겠지만. (웃음)

-약간의 공주병이 있었던 <만남의 광장>의 선미나 44사이즈를 입던 <돌아와요 순애씨>의 초은은 그런 이미지에서 변화를 꾀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었어요. 그 뒤 모바일 화보까지 찍었고요. 물론, 예전에도 모 휴대폰 CF에서 드러낸 늘씬한 각선미가 화제가 된 적은 있었죠. =섹시한 이미지는 그 CF 때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죠. (웃음) <돌아와요 순애씨>의 가장 큰 포인트는 아줌마와 아가씨가 서로에게 원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몸이라는 점이었어요. 그런 포인트를 드러내기 위해서 옷도 섹시하게 입었던 거죠. 물론 한편으로는 이제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제가 지금 (직접 시연하며) 생머리 날리면서 청순하게 보이려고 한다면 그건 아니잖아요. 그런 건 이제 스무살짜리 애들이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심지어 그애들은 나보다 피부도 좋고 더 예뻐. (웃음) 이제 서른인 저는 여성미를 드러내거나 여유로움을 보여주면서 내 것을 찾아가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여배우들이 이미 지난 시절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모습들은 정말 안타깝거든요.

-어렸을 때는 어떤 아이였나요. 집안에서나 학교에서나 똑 부러지는 아이였을 것 같습니다. =전혀요. 지금은 많이 똑 부러진 거 아니에요. (웃음) 예전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하는 평범한 아이였어요.

-우연히 별 기대없이 본 오디션을 통해 KBS 청소년드라마 <스타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고 해도 평소에 연기에 대한 동경이나 생각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 그건 학원비를 벌려고 한 거예요. 대학에 떨어져서 학원을 다녀야 하는데, 엄마가 “20년 동안 먹여줬으면 됐지, 또 무슨 돈을 달라고 하냐”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3개월간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돈이 잘 안 모이더라고요. 그래서 오디션을 봤죠. 그 당시 보수가 매우 좋았거든요. 커피숍에서는 시급 1500원에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면 한달에 70만원 정도밖에 못 벌었는데, 드라마에서는 일주일에 70만원씩 받았으니까요. 기대가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당연히 꼭 붙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스타트>에서는 조용하고 여린 여학생을 연기했어요. 지금 보면 정말 의아한 캐스팅인데요. =그래서 그때 PD님이 쫑파티 때 심경고백을 하셨죠. 자기 생애 최고의 미스캐스팅이었다고. (웃음) 원래는 드라마 편성이 3개월뿐이어서 실험정신 반으로 캐스팅했는데, 어쩌다 보니 10개월을 갔죠. 아마 그분도 제가 이만큼 활동할 줄은 몰랐을 거예요.

-원래 꿈꾸던 다른 미래의 모습이 있었겠네요. =일단 대학을 가서 직장 다니다가 시집을 가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여고괴담>을 찍으면서도 나중에 결혼해서 애들한테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직업이라기보다는 제 인생의 굉장한 추억이라고 여겼던 거죠.

-배우를 직업으로 느꼈을 때는 언제였나요. =<간첩 리철진>이 이게 내 직업이라고 완전히 깨닫고 한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그때는 정말 고통이 심했어요. 특히나 유오성 선배님은 연기를 너무 잘하시죠, 장진 감독님은 본인이 연기를 하시죠, 그 중간에서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정말 내 안에서 복닥거리는 게 많을 때였죠.

-그런 강박관념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제가 지금도 가끔씩 이야기하는 건데, 저한테 연기를 하게 해준 두분이 계세요. 한분은 강우석 감독님이고, 다른 한분은 (손현주의 형인 사진기자 손홍주를 가리키며) 손현주 선배님이세요. (웃음) <여고괴담> 포스터를 찍고 있었는데, 강우석 감독님이 그 자리에 놀러오셨어요. 그때 오기민 PD님이 쟤네들 중에 누가 배우될 거 같냐고 물어보셨는데, 감독님이 저를 가리키셨다는 거예요. 그때도 프로페셔널한 건 없을 때였지만, 나 같은 사람도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싶은 자신감을 얻은 거죠. 그리고 <간첩 리철진> 때는 드라마 <미우나 고우나>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손현주 선배님이 형부로 나오셨어요. <간첩 리철진> 시나리오를 들고 만날 골머리를 썩는 모습이 측은해 보이셨나 봐요. 어느 날 선배님한테 거의 숏바이숏으로 연기에 대해서 여쭤봤는데, 그날 저 몰래 제 다이어리에 메모를 남기셨더라고요. “진희야, 너가 하는 연기가 맞는 거야. 그게 정답인 거야. 그 역할을 너가 맡은 이상 아무도 할 수 없어. 넌 잘하고 있으니까 자신감을 가져”라는 내용이었어요. 나는 하찮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걸 뛰어넘게 해주신 두분인 거죠.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이제 서른입니다. 친구인 박경림씨도 결혼했고, 데뷔 10년 차를 맞이했는데요, 서른을 맞은 여배우의 고민은 어떤 건가요. =별다른 고민은 없어요. 오히려 서른이어서 좋아요. 서른이어서 내가 아우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사람 만나는 것도 많이 편해졌어요. 그만큼 행복해졌고요. 또 너무 감사하게도 제가 아직도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게 기뻐요.

-은근히 서른을 기다리기도 했을 것 같네요. =저는 20대 초반부터 ‘내가 서른이 되면 너희들 다 죽었어’ 이런 게 있었어요. 그때가 되면 꼭 성공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나한테 예의없게 굴었던 사람들을 다 짓밟아주겠다는 거였죠. (웃음) 그리고 서른이 되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20대 중반까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많이 했거든요. 물론 그때의 경험들은 저에 대한 투자였겠죠. 그것들이 쌓여서 나의 서른이 만들어지는 거니까.

-평소에도 그렇게 긍정적인가요. =저도 제일 안 좋은 경우의 수를 대비하면서 살지만, 그것도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에요. 이미 지나간 것에는 연연하지 않아요. 그러면 그럴수록 부정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옛날보다 지금이 못한 거니까. 하지만 옛날을 지워버리면 지금이 나의 최선이에요. 저한테는 저의 미래가 긍정적일 수 있는 이유가 그런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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